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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이름짓기(제임스 사이어, IVP)

 

 

코끼리 이름 짓기(세계관 개념의 역사와 재정의) 

-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다. 

 

1. 낙타, 캥거루, 코끼리

- 제임스 사이어는 그가 이전 그의 책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기독교 유신론,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원론,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루면서 제기한 7가지 기본 질문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서 그가 생각하는 부족한 항목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 “무엇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낙타, 캥거루, 코끼리)

 

2.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세속 철학자들이 세계관을 이해한 방식 4가지

1. 빌헬름 딜타이 : “어떤 세계관이든 궁극적 뿌리는 인생 그 자체다.”, 한 사람이 인지하는 것은 주로 본인의 정신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저기에 있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신 속에 내재된 구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29) / 세계관은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지적으로는 실재의 인식으로, 정서적으로는 삶의 평가로, 의지적으로는 능동적인 뜻의 이행으로 표현된다.(30)

2. 프리드리히 니체 : 그는 허무주의자인 동시에 실존주의자이다. / 모든 세계관이 시대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여긴다.(33)

3.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플라톤은 존재론(존재하는 그 무엇)을 지지하고 데카르트는 인식론(어떻게 알 수 있는가?)을 주요 관심사로 주장한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문법과 언어를 지도적 원리로 지명했다. 요컨데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관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했다고 볼 수 있다.(34)

4. 미셀 푸코 : 세계관은 언어적 권력의 옷을 차려 입고서 궁극적 실재를 해석하는 체하는 가짜에 불과하다.(38)

 

* 기독교적 정의

1. 제임스 오르 : 완전하고 정합성 있고 이성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기독교를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지적, 문화적 도전에 대처하는 것이 그의 목적(39)

2. 아브라함 카이퍼 : 그는 칼빈주의 기독교를 하나의 포괄적 세계관으로, 삶의 체계로 제시했다.(하나님, 인간,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3. 헤르만 도여베르트 : 그는 한사람의 세계관의 바탕에 있는 것이 이론적 사상이 아니라 마음의 종교적 혹은 신앙적 지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관은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 전이론적 결단이며, 지성이 아니라 마음과 경험 그리고 실질적인 삶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43)

 

* 최근의 복음주의적 정의들

1) 한 개인의 전반적인 사상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전 이론적, 전제적 개념들에 뿌리박고 있음, 2) 범위가 포괄적, 3)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지만 이상적으로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춤, 4) 모든 사물과 관계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 5) 굳이 비이성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성에 의해 최종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결단의 성격을 가진 신념(44)

1. 제임스 올시우스 :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와 우리의 소명과 장래를 조망하는 하나의 틀 혹은 일련의 근본 신념(45)

2. 알버트 월터스 : 한사람이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 틀

3. 로널드 내쉬 : 세계관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신념이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적 틀로서, 그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정돈하고, 실재를 해석하고 판단한다.(47)

4. 존 콕 : 삶으로 실천된 세계관이야 말로 우리의 신념을 실제로 나타낸다.(47)

 

* 노글이 말하는 기독교적 세계관 : 1) 객관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신념을 품고 2) 주관적으로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하나의 관점이며 3) 설화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언어체계다. 즉 실재는 본질상 객관적이며, 인해의 측면에서는 주관적이며, 그 의미를 파악하고 전달하는 면에서는 언어적이라는 것이다.(65)

 

3장. 무엇이 먼저인가?(존재인가 인식인가?)

* 제임스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의 일곱가지 질문(68)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존재론이 우선하는 경우(유신론과 기독교적 유신론)

-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무든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이 인식론보다 앞선다.(74)

- 근본적 실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곧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며, 선하신 놀라운 인격이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주가 이해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인식론이 우선하는 경우

- 데카르트 : 자아의 자율성 - 자기존재의 확실성 -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 - 외부 세계의 존재의 확실성

 

* 결론 : 세계관의 정립에서 존재론이 인식론을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세계관을 인간의 자아라는 깨지기 쉬운 구조 위에 올려 놓는 셈이다. 달리 말해서 이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 곧 각 개인의 자아 혹은 각 공동체의 의식이 지닌 자율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뜻이다.(101)

 

4장. 살과 뼈(이론적 성격과 전이론적 성격)

- 세계관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전이론적(직관적)이면서 전제적 성경을 갖고 있다. 

* 전이론적 : 우리의 정신적 구조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도무지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

* 전제적 : 아퀴나스나 칼빈이 말하는 신 관념(파스칼 : 마음은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 도여베르트는 세계관의 근원을 각 사람의 전이론적인 영적 중심에서 찾았다.

-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인간 경험이 하는 역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우리의 추구 방법 등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기에 계신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내재적 현존에 관한 지식을 우리가 선물로 받는 일이다.(124)

 

5장. 합리적 체계, 삶의 방식, 으뜸 이야기

- 각 사람의 세계관은 다른 사람의 것과 약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은근히 무의식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구나 세계관을 갖고 있다.(130)

 

* 제임스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의 일곱가지 질문(68, 132)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브라이언 왈쉬와 리처드 미들턴의 질문 4가지(135)

1)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인간의 본성과 사명과 목적은 무엇인가?

2) 나는 어디에 있는가? 혹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3)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혹은 나의 성취를 막는 근본적인 문제나 장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나는 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4) 치료책은 무엇인가? 혹은 나의 성취를 막는 이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발견하는가? 

 

* 삶의 방식으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은 신학이나 철학 같은 사상의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다. / 세계관은 결코 삶에 대한 시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삶을 위한 시각이다.(138)

 

* 으뜸 이야기(거대 담론)로서의 세계관

- 성경은 규범적이고 표준적인 이야기로서 궁극적으로 전체주의화를 반대한다. 그 이유는 성경 이야기에 스며있는 고난에 대한 철저한 민감성과 그 이야기를 자기 편을 위해 편협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창조의도 때문이다.(146)

- 레슬리 뉴비긴은 세계관을 이야기로 간주함으로써 그 실존적 적실성을 잘 전달하고 있다.

 

- 세계관에 대한 재정의 :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지적으로는 실재의 인식으로, 정서적으로는 삶의 평가로, 의지적으로는 능동적인 뜻의 이행으로 표현”된다.  

 

6장 세계관(공적 측면과 사적 측면)

*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것 :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인 동시에 호모 소시우스이다. 

* 이상형으로서의 세계관

*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 타당성 구조란 사회의 대다수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서 그들이 무의식저긍로 혹은 아주 확고하게 품고 있어서 그것이 참인지를 물어 보지도 않는 신념들의 망이다.(158) / 한 개인의 세계관이 사회의 세계관과 동일할 경우에는 자기 세계관이 참된 것임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162)

 

7장 세계관의 새로운 정의

- 다원주의(다소 상반된 세계관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 세계관의 재정의 :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173) 

- 마음의 성경적 개념 : 지혜(잠 2:10), 감정(출 4:14; 요 14:1), 욕구와 의지(대상 29:18), 영성(행 8:21), 지성(롬 1:21)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175) /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과 더불어 그리고 그 세계관 때문에 생각을 하는 것이지, 우리의 세계관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176)

- 아브라함 카이퍼 : 모든 사상은 단 하나의 원리, 고정된 출발점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181)

- 우리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려면 우리의 세계관에 담긴 모순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오르의 말처럼 우리는 “사물들을 통일체로 묶고 이해하려는 노력, 곧 단 하나의 보편적 관점을 추구해야”한다.(187) /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환생을 믿는 것(인지 부조화로 세계관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 세계관을 재정의한 결과 

- 초점을 명제와 이야기에서 그런것을 포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옮겼다.

- 누구든 세계관의 명시적 전제들은 잘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그 전제들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세계관의 대들보가 존재론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이 하나님이나 자연 혹은 자신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8장 낮에 서로 부딪히는 유식한 사람들(분석 도구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 분석이 다원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비슷한 동시에 왜 그토록 다른지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196)

- 자연 과학 분야에 속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전반적인 세계관은 유신론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과학적 연구를 할때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자가 된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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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과학과 신앙, 특별히 진화와 창조를 주제로 이야기한다. 
다윈의 진화론(종의 기원)이 현대 세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가동할만하다. 진화라는 주제로 인터넷이나 출판물을 검색하면 생물학의 주제만이 아니라 실로 다양한 주제의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진영 안에서도 이 주제(진화론)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에서부터 진화론을 통해서 신학을 연구하기도 한다. 
과거 과학과 신앙은 구별되지 않았었다. 신학자들이 과학자였고 과학자들이 신학자요 철학자였다. 특별히 최후의 르네상스인으로 추앙받는 뉴턴의 경우에 신학, 과학, 연금술에 전문가였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학문이 파편화되면서 신학은 과학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재 창조와 진화의 관계는 젊은 지구론-오래된 지구론-진화론적 유신론-유물론적 진화론의 스펙트럼으로 대변된다. 이 안에서 기독교의 입장은 문자주의적인 해석(젊은 지구론)부터 간격이론, 날-세대 이론, 점진적 창조론, 진화론적 창조론, 유신론적 진화론, 지적설계 창조론등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진다. 이 다양한 견해는 창세기의 천지 창조에 대한 해석, 진화론의 수용 정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저자(신재식)은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종교와 과학을 인류가 생명 세계에서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메커니즘중의 하나로 봅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종류의 지도(실측 지도와 문화적 지도)가 있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은 생명세계의 지식을 다른 의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과학이나 종교가 생명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설명이 유일하게 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활동의 존재 근거를 무시하는 행위는 환원주의이며 독단주의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극단을 피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종교와 과학을 설명하며 ‘설명의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말하는데 이는 설명의 계층구조로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바퀴가 구른다. 엔진에서 연료가 연소해서, 선생님이 운전중…)이 가능한 것처럼 생명에 대한 설명이 종교와 과학의 입장에서 다른 계층 구조를 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신학을 한다라고 할때 철학이 절대적이었던 것처럼, 현대에와서는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연과학을 공부해야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당대 최선의 지식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종교와 과학에 대한 주장을 읽으면서 지나온 역사가운데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나아왔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서 의미있었다. 창조와 진화의 논쟁 또한 시대의 산물이기에 시대적인 상황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저자는 마지막 창조와 진화간의 논쟁을 다루면서 자신의 입장은 ‘진화론적 유신론’이라고 말하면서 너무 성급하게 진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다. 현대 과학의 방법론적인 자연주의의 한계를 간과하였다고 생각한다. 현대 주류 과학계안에서 바라보는 지적 설계에 대한 논의를 더 깊이 공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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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기독교(미로슬라브 볼프)

 

해넘이 채화대에서(2016 간사수양회) 


“세상에서 배제되는 위험과 세상 전체로 침투하는 위험 모두를 극복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1장. 신앙의 기능 장애
* 상승 기능 장애(기능 축소와 우상으로 대체)
- 기능 축소 : 겉으로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여 전망하고 실천하나 실상은 그 내용과 추진하는 방법이 신앙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의 핵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 우상으로 대체함 : “어느 날 예언자들이 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돌판에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금송아지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이상한 연금술을 통해 “내가 너를 승리하게 하리라”는 말로 변형되고 십자가가 적대감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사랑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 회귀 기능장애
1) 신앙의 나태함 : 유혹의 미끼, 체제의 힘(개인으로서는 결코 하려고 하지 않을 일들을 부대안에서 군인은 기꺼이 하고자 한다.), 신앙에 대한 오해(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게 하고, 그길을 인도하며,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의미를 부여할 때라야 고유한 과업을 수해하는 것이다.)

2) 신앙의 강요 
- 신앙이 억압의 수단이 되는 모든 경우, 사실은 신앙의 기능장애가 일어난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억업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온 이유 : 신앙의 왜소화(수단의 경시는 신앙의 왜소화로 이어진다. 그러 인해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신앙과 상관없는 가치에 의해 세워진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신앙에 의해 목표를 설정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신앙이 현실에 부적절하게 보인다는 문제, 좁은 길로 가기를 꺼리는 문제

2장. 나태함
- 신앙이 나태해지는 이유 : 1)신앙인의 인격, 2)체제안에 갇혀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하여 신앙의 요구사항보다 체제의 규칙을 따름, 3)신앙자체와 관련
신앙의 네가지 기본방식 1)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2) 어떻게 실패에 대처할 수 있는가? 3)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않아도 되는가? 4) 왜 어떤 활동에 꼭 참여해야 하는가?

- 우리의 행동에 대한 신앙의 지침 : 개인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분별하는 것 : 전쟁을 개전함에 있어서의 정의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정의, 한 국가는 전쟁을 일으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 자체는 부당하게 수행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이라 해도 우리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윤리적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을 분간해야 하고 그러한 결정에 의거해서 행동해야 한다. 도덕적인 문제는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또한 적절하게 기능하는 신앙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탁월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 하나님이 우리 일의 의미와 관계를 맺는 방식 : 고용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 하나님과 협력, 보존

3장. 강요
오늘날 종교의 재부상은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 볼때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폭력과 더불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약화 혹은 무력화 하고 더 나아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 표층적이면서 열정적인 신앙의 실천은 폭력을  촉진하기 쉬우나 심층적이면서 전적으로 헌신된 실천은 평화의 문화를 낳고 유지된다. 

* 유일신 신앙
- 유일한 신의 도덕적 형이상학적 성격에 관한 진리 주장이 보편성을 띠면 불가피하게 공적 주장이 된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주장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이와 반대되는 주장과 마주칠 때 충돌을 야기한다. 

유일신 신앙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특징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하는 데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믿음의 일부가 폭력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오용이다. 이러한 행동은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표층적이게 만듦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예언자적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은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여 우리의 노고를 축복하고 우리의 실패를 위로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도덕적인 지침이 되어 주며 우리의 삶과 활동을 지지하는 의미의 체계를 제공해준다. 

* 구속
-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적인 행위로 악한 자들을 정복하러 세상에 오신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4장. 인간의 번영
낙관주의(푸투룸)는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
희망(아드벤투스)은 외부,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과 연관

* 인간의 번영을 파악하는 세가지 단계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보편적인 선행, 경험적 만족감
- 델반코는 무한하신 하나님에서 구원자 미국이라는 이상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기자신이라는 소멸점에 이르기까지 희망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 예언자적 종교에는 두가지 근본적인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 메시지를 따라 이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과정 모두 필수적이다. 상승이 없으면 전할 것이 없고, 회귀가 없으면 전할 대상이 없다. 

*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도전
1)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번영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번영을 위한 열쇠라는 주장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은 하나님이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5장. 정체성과 차이
-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원화된 세상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1) 현대사회의 네가지 주요 특성
- 자발성, 차이, 다원주의, 상대적 자족

2) 이러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 부적절하게 보이는 세가지 방식
- 적응(자유주의적 프로그램), 순응의 방향의 반전(후기 자유주의 프로그램), 세상으로부터 철수(분리주의 프로그램)

3) 보다 나은 대안
- 떠나지 않으면서 다르게 사는 것 :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의 어떠한 요소들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어진 문화안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문화의 요소중 그리스도인이 거부해야 할 것들이 있다.
-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이다.(137)
*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와 해야하는 한가지
-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적응도 불가능하다 : 그렇다면 문화적 변화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 차이를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기독교의 정체성은 외부적인 것을 거부하고 싸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핵심요소를 포용하고 강조함으로 생긴다, 외부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는 사랑으로 지배되어야 한다, 경계는 투과성이 있어야 한다) 
- 참여가 답이다 :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의 전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며, 이 참여는 문화의 모든 차원과 연결된다.(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문화의 모든 영역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하나도 완전히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한다. 범위로는 전체적이지만 정도로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한은 개인적 제도적 혹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한 저항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유한성과 연약함 때문에 나타나며 변화를 추구하면서 선한 방법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기도 한다.)

6장. 지혜를 나누며
- 이 시대는 만족의 근원은 상관하지 않고 만족을 경험하는 것, 즉 자신의 만족만이 중요하게 되었다. 
- 다원적인 세상에서 모든 종교의 주된 사명은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희망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사람을 살게 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 지혜는 조언의 작은 조각, 삶의 방식, 거룩한 인격등의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왜 지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가?
- 그리스도인에게는 지혜를 나눠야 하는 의무가 있다. 지혜를 나누는 의무는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안에 거하는 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 지혜를 나누는 핵심적인 방법(증언)이 아닌 것은?
- 증인은 무엇을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다, 증인은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아니다.(무언가를 팔고자 하는 이는 상품을 구매자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라도 판매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처럼 지혜를 사고 팔면 지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형성하기 보다 기껏해야 마음속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쓰일 뿐이다.) 뭔가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증인은 단지 산파가 아니다.

- 주는 것과 받는 것, 이 두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지혜를 나누는데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 자신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궁극벅으로 그들은 지혜를 나눠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지혜를 나눈 통로가 되는 것이다. 
- '예언의 역전’이 필요하다. :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외부로부터 그들의 신념과 관행을 흔들어 놓을 예언적 자극과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아니 그런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에 좀더 일치하게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 

- 우리는 지혜가 사람들의 삶에 자리잡게 되는 것을 돕기 위해 사람들을 기만하고 강압해서 지혜를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된다.
- 우리는 지혜를 통해 기꺼이 회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지혜가 매력적이고 합당하고 유용한 것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 우리는 신앙의 지혜를 입맛에 맞고 먹기 쉬운 지혜의 조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려는 계획속에 삽입하여 적용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7장. 공적 참여
종교가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세속화론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근대화의 길 가운데 경제성장, 기술발전, 그리고 지식의 증대와 전파 같은 현상이 번성하는 종교와 편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 오늘날 빠르게 자라나는 세계관들 : 기독교, 이슬람, 불교, 세속적 휴머니즘

* 종교적 다양성
- 근대화론자들이 품었던 세속 세계에 대한 동경은 ‘기독교적인 유럽’이나 ‘기독교적인 미국’에 대한 기대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깨지게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종교
- 자유주의는 자신의 해석이 어떠하든지 각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서 살아갈 자유와 개인의 인생관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을 두가지 기본개념으로 하고 법 앞에 평등한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자신이 택한 신앙이 시키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 세속주의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고 한 묶음의 연관된 가치들과 진리주장들인데 이는 부분적으로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과 시장에서 생성된 것 그리고 자연과학으로부터 뽑아낸 것들로 구성된다. / 종교적 이성을 공적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정교분리를 철저히 시행할 때 세속주의는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선호되며 이는 신앙인들에게 아주 불공평하다. 
- 이에 대안으로 월터스토프는 사회적 협의(consocial)라고 부르는 자유민주주의 형태를 제안한다. / 다수 공동체의 공존의 정치

* 다원주의를 정치적 과제로 지지해야할 충분한 이유
1) 신은 한분뿐이시므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2) 유일하신 신이 중심적으로 명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는 황금률에서 표현된 대로 네가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3)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는 타인의 권리를 우리와 우리가 소속된 집단을 위해 주장하지 못한다. 
4) 내면적으로나 외적 행동에 있어서나 종교는 강요될 수 없다.

*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상이한 인생관으로 폭력적 충돌이 생겼을때 평화의 문화를 길러 낼 내적 자원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자신의 종교적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말한다는 것은 두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하여 ‘해석학적 호의’를 베풀고 서로 선물을 교환해야 한다.(191)
- 논쟁만 하는 것으로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을 멈출 수 없다. 논쟁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정치체계에서 행동하는 중요한 방식은 투표하는 것이다. 논쟁하고 나서 투표하고 또 논쟁한다.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잘 운영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이 취하는 방식이다. 

결론 
- 오바마 대통령의카이로 연설(2009년)-문명의 충돌의 주장에 반대 /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해석하게 되면 종교적 전체주의에 반대하며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 현대 문화 속에서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추진력이 사랑을 즐거워하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만 진정으로 인간이 번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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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전도계획의 항목들을 항목별로 공부할 수 있도록 정리했습니다. 



주님의 전도계획(로버트 콜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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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1장. 현대세계_바른 질문 배우기
-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1963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폭스 극장이 주일에 문을 엶
- 그리스도인은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질줄 아는 모험적인 교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1) 올바른 신학적 질문들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와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변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 슐라이어마허의 과제 : 기독교에 도전하는 교양있는 비판자들에게 신앙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고자 했음
- 틸리히의 견해 : 당신이 어떤 것을 믿고 있는 한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될 것이 없다. 
- 진짜 기독교에 해당하는 어떤 핵심이 존재하기에 고대 근동지역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버려도 그대로 유지되는 추상적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번역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기본적인 관념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운동에 참여하고 한 백성이 되라는 초청을 받는다.(27)
- 콘스탄티누스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충성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의 정치적인 구조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케하는 지적인 이론들을 만들것을 요구함으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복음을 바꿀것을 요구하였다.(28)
-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믿을 것이 무엇이냐에 있다. 
- 틸리히는 조직신학을 새롭게 개조해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신학적인 과제라고 생각한 반면 바르트는 더 나은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31)
- 신학의 과제는 예수를 현대적인 범주들로 번역하는 해석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그분을 향하도록 변혁하는 것이다. 신학자의 업무는 이 세앙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음의 기준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것이다.(31)

2) 새로운 이해인가 새로운 삶인가
- 교회안에서도 끔찍스러운 악이 좀더 나은 선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옹호되었다.(원자폭탄 투하, 대규모의 낙태)
- 교회를 급진적이고 영원히 새로운 형태로 지켜 나가는 힘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논쟁거리들과 관련해 좌파와 하나되게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예수를 교회가 아는 데서 온다.(37)
- 바르트는 복음을 세상속의 현실 체제에 맞추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복음에 맞추려고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틸리히보다 더 새롭고 더 급진적이다. 바르트에게서 우리는 신학 연구의 목적이 이치에 맞는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것, 즉 복음의 놀라운 주장들에 비추어 삶을 재형성하는데 있다는 신약성경의 주장을 재발견한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회심을 통해서 이런 지식을 얻는다.(38)


2장. 새 세계와 기독교 정치
1) 종교와 정치의 혼합
라인홀드 니버는 공적 교회관을 강하게 옹호하였다.
17세기 종교 전쟁이 끝난후 이들의 관심은 민족국가로 이어진다. 이제 국가를 위해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불신앙의 정치
- 불신앙이나 무신론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Q. 문화위의 그리스도와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사이의 어느 지점들로 해석(문화의 그리스도는??)
- “그리스도와 문화”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데 방해가 된 책도 없다라고 결론 내림(56) 그리스도와 문화는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니버가 사용한 범주들의 구조자체에 문제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대해 전부가 되거나 무책임하게 분파이기를 고집할것을 선택하라고 가르친다(59)
- 교회만이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는 그런 정치적인 대안을 들고 교회가 세상과 만나게 될 때 이것을 분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공동의 삶을 통해 증언하고 보여줄 수 잇는 교회가 사라지는 곳에서 국가는 가장 악독한 부족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61)

3) 사회 전략인 교회
- 교회는 사회 전략을 갖지 않는다. 교회 자체가 사회 전략이다. 
- 요더의 유형론 : 행동주의 교회(activist church), 회심주의 교회(conversionist church), 고백 교회(confessing church)
행동주의 교회 : 교회를 개혁하는 일 보다는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회심주의 교회 : 사회 구조를 뜯어 고친다고 해도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백 교회(십자가의 교회) : 자신의 주된 정치적 사명이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효율성이 아니라 신실함)


3장. 구원은 모험이다. 
- 오늘날 교회는 불신앙의 사회속에서 나그네된 거류민으로 살고 모험을 감행하는 식민지로 존재한다.(71) 
-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전투태세)
1) 다시 길을 떠나며
- 구원이란 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이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자녀는 낳는 주된 목적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88)
- 항상성 요구,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주도하게 만들고 자신의 능력만 의지해 이루어 냈을 때보다 훨씬 놀라운 삶을 살게 해준 것은 바로 메시아와 메시아의 공동체였다.(96)

2) 명분을 지닌 백성
- 평화의 백성 :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부로 보도록 초청받는다. 

4장. 식민지의 삶_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교회
-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교회적 지침을 세우고 정부에 그 견해를 지원해줄것을 요청하는 방식
-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믿는 것, 곧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볼때만 타당하다.(107)
1) 너희는….한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 산상설교는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고 있다.(115)
- 공동체로 있을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만이 참된 곳일 수가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삶은 교회 안에서 더 나아진다.(116)

2) 기독교 윤리는 곧 사회 윤리다. 
- 모든 기독교 윤리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니며 정치적인 출발점, 곧 교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볼때 우리의 윤리는 곧 사회 윤리다. 우리의 모든 윤리적 응답은 바로 여기, 교회에서 시작된다.(123)
-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리가 제시해야할 가장 창조적인 사회 전략은 바로 교회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며 도 약속으로 충만하기에 그 방식과 모순되기까지 한 새로운 표징을 이 세상속에 드러내는 데 있다.(바르트, 125)

3) 눈으로 보는 것 그대로
- 산상수훈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산상수훈의 방식은 우리가 따라야할 새롭고 훨씬 엄정한 규칙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그림이다.(129)

4) 세상의 끝
- 산상설교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선포는 지극히 종말론적이다. 
- 산상설교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일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해주는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바로 교회다. 


5장. 평범한 사람들_기독교 윤리
1) 오묘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 윤리란 행함(doing)의 문제이기전에 먼저 봄(seeing)의 방식이다. 
- 사람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 속하고, 손윗사람을 살펴보고, 그들을 흉내내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가 윤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사람들을 이끌어 기독교적인 삶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인물과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148)

2) 탁월한 모범이 되는 성도들
- 기독교 윤리는 산상설교와 같은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신 에수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동체에서 생겨난다. 

3) 사례를 통해 다져지는 신앙
- 기독교 윤리가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 다른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이다. 

6장. 모범적인 교회_기쁨으로 진리 말하기
1) 목회 훈련
QQ- 탁아소를 세우는 것이 과연 이들을 돕는 일인가? 더 나은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별장, 2대의 자동차, 더 넓은 집) 맞벌이를 해야하기에 탁아소가 필요한 것이라면?? 반면에 제3세계나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어떠한가?(글래디스의 지적) 
- 사실 우리는 사람을 도우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185)
- 글래디스는 우리를 사로잡아 버린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적이며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근본 문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 근본문제란 교회가 교회로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물어야할 물음으로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신념을 따라 사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188)

2) 성공적인 목회
- 성서 해석은 지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문제다. / 교회는 성서와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이다.(197)
-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거짓말을 물질주의와 짝을 이룬다. 루터는 안전을 최고의 우상으로 보았다. 이시대는 목회자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부부의 잘못을 호되게 지적하기보다 부드럽게 대하고 이해해줄 것을 요구한다.(204) / 베드로가 굳게 믿었던 것은 복음과 그 위에 세워진 공동체는 우리처럼 평범하고 이기적이며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들조차도 변화시켜서 성도들을 닮아 가도록 만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205)
- 톰과 수 부부, 낸시 목사의 이야기 : 이혼을 고려하라고 권유하기에 앞서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 앞서서 과연 교회가 그들을 진정으로 돕고 있는가? 

3) 하나님을 섬김


7장. 힘과 진리_목회를 가능케 해주는 미덕
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핍박받는 초대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난을 요구하지 않는 윤리는 진정한 윤리가 아니다.(230)

2) 담대하게 복음의 목회 선언하기
- 교회의 정치는 진리로 충만하고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243)

3) 목회를 위한 능력
-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실제 목회에 얼마나 연관이 있는가? 역사적 비평적 성서 해석들, 성서 원어에 대한 지식들
- 목회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행사하는 권위의 출처에 관해 명료할 필요가 있다.(252)
- 비극적이게도 우리중 많은 이들이 성서 없이 설교하고 교회없이 성서를 해석하려 애쓰고 있다.(253)
- 설교의 성패는 전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본래성을 회복하는데 달려 있다.(254)
- 만일 목회자들이 자기네 교인들에게 열정적인 모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패자다. / 갱신은 고립되고 영웅적인 사상가들이 아니라 앞에서 예로 들었던 그런 사람들의 평범한 행동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258)

4) 하나님의 능력으로
- 진리로 충만할 때 힘이 나온다. 종됨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분께 순종하는 한에서는 힘이 된다. / 진정한 과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부여한 말씀과 성례전을 베푸는 놀라운 권세를 어떻게 도덕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 되느냐이다. 
- 목회자의 활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신가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만일 목회자가 이 점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변덕이나 부리고 속이는 짓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월터 브루그만, 263)
-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할 과제는 기독교적인 신념들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즉 그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신념으로 형성된 나그네 된 거류민의 식민지를 세우는 것이다.(265)
Q. 이땅을 식민지로 이해하는 저자의 이해가 합당한가? 



해설. 
현재의 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기형적 통합을 성취한 콘스탄틴주의, 이성과 신앙의 통전성을 해체한 계몽주의,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개인들의 사상누각으로 변질시킨 개인주의의 포로가 되어있다. 이러한 진단의 처방이 바로 하늘나라의 식민지로서 교회의 자기 정체성 회복이다. 
- 이땅에 거하고 있지만 이땅에 정착해 안주하지 않으며, 이땅의 현실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이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이땅의 타락에 저항하지만 하늘의 진리로 혁명을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해법이다. 
1) 모험 공동체다.
2) 이야기 공동체다.
3) 종말론적 공동체다. 
4) 혁명 공동체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 광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는 것, 개인주의를 찬미하는 문화적 주류를 향해 공동체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 자본주의를 신으로 섬기는 맘몬의 신전에서 십자가로 우상을 파괴하는 것, 실용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맹신하는 세상을 향해 평화와 용서를 설교하는 것, 폴력의 전차에 올라타 세계를 향해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비폭력의 깃발을 흔드는 것, 그리고 종교를 국가의 부속기관으로 임명해 충성을 요구하는 콘스탄틴주의를 향해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장엄하고 거룩한 혁명인 것이다.(276)
-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의 이념과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십자가 공동체로서 자신의 본질을 재발견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먼 여행을 과감히 떠나는 나그네로서의 비전을 되찾아야 한다. 불신앙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인간적 구애의 손길을 뻗치는 대신, 하늘의 비전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담력을 길러야 한다.(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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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이전 책 “The Transforming Vision”에는 고통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고통은 성경의 중심 주제중의 하나이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1장. On Imaging God in Babylon
- 현재 문화속에 있는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과 같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출애굽이 필요하다. 
- 바벨론의 창조신화와 창세기의 창조신화의 차이 : 바벨론에서는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서 마르둑이 킹구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 바로 이렇게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의 이야기인 것이다. 

2장. Beyond Worldview to way of Life : Diagnosis
- 우리의 세계관과 우리의 삶의 방식의 차이(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 하웃츠바르트가 말하는 세가지 우상 : Scientism, Technicism, Economism

- 진보, 발전을 추구하는 이시대의 문화가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후대의 안전한 미래를 앗아갔다.(몰렉에게 자신의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우리의 모습, 요란한 드럼소리때문에 아이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 선지자적 반응
- Prophetic critique, prophetic hope, prophetic imagination
-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세상의 역사에 방관자가 아니라 열정적인 참여자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이 역사의 하나님이 시라는 사실을 상상할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3장. Waiting for a miracle : Christian grief at the end of history
- 이시대는 슬픔, 상실의 시대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선지자)이 필요하다.
* The end of history
- 후쿠야마는 물질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헤겔 주의자로 역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을 “Ideas”라고 했다. 그는 사상과 의식이 물질에 대해 독립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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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목사의 역할
1) 목사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2) 평신도들을 구비시킴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 목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연스런 삶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역이다. 
3) 평신도들의 사역의 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1장. 평신도가 되기로 결심한 어느 목사 이야기
- 엡 4:12
- 새언약은 가장 약하고 가장 부적합한 사람들을 봉사의 일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후 3:4-6)
“리더십과 관련된 신약의 용어들은 피라밋 형태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다…. 안수 제도는 오히려 이 수평적인 관계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장벽이 없는 곳에 장벽을 세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제도는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벽을 세우며 서로서로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한다.”(24)
- 어려운 것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만족하는 것이다. 
- 두가지 종류의 평신도 사역 : 흩어져 있는 교회(디아스포라-기능, 경력, 전문직업, 가사)와 모여있는 교회(에클레시아-일반 교회안에 있는 사역)
- 평신도들은 엄청난 시간을 집 안팎에서 일을 하는데 소모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삶의 전부를 바치도록 평신도를 구비시키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단순히 껍데기만 남은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위해 망치질하는 것이며 정확히 톱질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영적 안목을 갖는 비결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어두움 가운데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눅 11:33-35)
- 구비시킴(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은 엡 4:12에만 사용되는 단어로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게 건강하도록 뼈나 마디 마디마다 또 부분 부분마다 잘 맞추는 것을 뜻하며, 탈구한 수족을 교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2장. 평신도층을 폐지하자
- “교회 전체, 즉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성직자이다.”
- 성도들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다양함 때문에 이상적인 일치가 교회에 존재한다.
첫째 교회지도자들은 우선적으로 성도를 구비시키는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부르심은  설교나 상담의 사역에 비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목사의 존재이유이다. 
둘째,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부족한 일들을 위해서 또는 교회의 부서의 일에 평신도들을 종사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목사의 일을 분담시키는 것도 아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고유한 사역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구비되어야 한다. 

제2부.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구조
-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에서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 즉 사역의 일을 위한 구조

3장. 가장 훌륭한 신학교-지역교회
-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시키려는 세력들 : 세속주의(Secularism), 사제 제도주의(Sacerdotalism), 성례주의(Sacramentalism),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
- 신약에 나타난 모델 : 이동성 신학교(walking seminary), 세상속의 개방학교(open school in the marketplace), 전진-후퇴 모형(advance-retreat pattern)

4장. 구비사역에 합당한 교회 구조
“가죽부대는 포도주와 세상이 만나는 접촉부분이다. 또 포도주의 품질과 세상에서부터 오는 압력에 맞추어 가죽부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인간 문화에 접할 때 가죽부대가 생긴다.”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간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들을 모아 놓은 집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우에 그러한 교제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 성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구조(80)
유기체적인 교회 조직의 성격
1) 적당한 규모
2) 단순성
3) 주인의식
4) 융통성
5) 개기인의 차이점
6) 성령의 인도하심에 항상 열려있는 융통성

* 구조적 변화를 촉진하라
1) 기도하라
2) 가르치라
3) 선포하라
4) 찾으라
5) 초대하라
6) 시범을 보이라
7) 허용하라
8) 기도하라

제3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신학
- 교회의 디아스포라의 역할, 즉 일의 사역을 위해 교회를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면

5장. 일이 먼저인가, 사역이 먼저인가?
- 일과 사역의 관계에 대한 세가지 분류
1) 전문 직업적인 그리스도인(Professional Christian) : 풀타임 사역자, 
2)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문인(Christian professional) : 요셉
3) 자비량 사역자(tentmaker) : 바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우리는 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쉽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구러나 우리는 신자들이 일 가운데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을 구비시켜야 한다. 

-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서 안식을 추구할때 경험하는 불안
1) 우리 자신의 성취감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는 유혹
2) 안전을 위해 의를 타협하려는 유혹
3) 정체성을 일에 연관시키려는 유혹
“의심할 것 없이 주일에 우리가 교회에서 입으로 고백하는 신학과 세상에서 우리가 주중에 행하는 행동신학간의 제일 큰 격차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용납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든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우리의 정체와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얼마나 잘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믿는 신앙이 행동을 통해 무심코 드러나게 된다.”
“석공 세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분필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쪼아가던 삶은 “나는 이 돌을 자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사람은 “나는 돈을 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세번째 석공은 “나는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6장.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선교의 목적은 우리를 종교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있다. 선교명령을 주신 이유는 창조명령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 교회 선교의 다양성은 교회의 모이고 흩어지는 리듬에서 뿐 아니라 다양한 영적 은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비 콕스는 “세속 도시”에서 사회를 겨냥한 교회의 선교를 디아코니아(섬김), 고이노니아(교제), 케리그마(선포 혹은 구두로 하는 의사소통)으로 나누었다. 
- 소금은 두가지 치명적인 독약, 나트륨과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제4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전략
7장. 독불장군식의 사역을 피하기 위한 여섯가지 방법
* 구비사역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1) 아르티오스 : 온전함, 건전함(딤후 3:17)
2) 카타르티스모스 : 준비(엡 4:12), 섬기는 일이나 행동을 위해 준비시키거나 유능하게 함
3) 카타르디시스 : 온전케 되어짐(고후 13:9)
4) 카타르티조 : 질서를 잡다, 회복하다, 준비하다.

* 구비자로서의 목사에 대한 여섯가지 이미지
1) 의사이다(목회사역) : 헬라의 의사들을 탈골한 뼈를 제자리에 다시 맞추어 넣어 몸의 다른 부분과 바른 관계를 회복시킴으로써 몸을 구비시켰고, 금이 간 곳이나 빠진 부분을 교정함으로써 환자를 구비시켰다. 
2) 그물을 고치는 어부이다.(개인 사역) : 카타르티조는 첫번째 방금전에 하던 일로 인해 생긴 해로운 것과 손상된 것을 없애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3) 석공이다.(구조적인 사역) :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를 카타르티조로 번역했다.(스 4:12),
4) 토기장이이다.(지도하는 사역) : 창조하다. 형성하다.(롬 9:22, 히 10:5, 벧전 5:10, 히13:21)
5) 부모이다.(모범을 보여주는 사역) : 모방하게 하는 과정이다. 
6) 설계자이다.(방향 있는 사역) :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성장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후 13:9, 11)

* 다섯가지 불변하는 진리
1) 성령님을 사역을 위한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이 분배하신다. 
2)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들은 창조때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교회는 이 차이점을 존중해야 한다.
3) 교회의 질서에 관해서 서신서들과 관계된 구절들을 읽은 결과 결혼 생활과 회당안에서 남자가 머리 역할 하는 구약의 모형은 교회가 어느 정도는 계승해야 한다. 
4) 교회 지도자들은 부부관계에서 교회에서 모본을 보여야 한다. 
5) 무조건 교회 전통에 따르거나 내용이 텅 빈 상징을 유지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와 관심사들이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 고전 11:10의 권위 (144) 

8장. 자비량 목회 사역을 하라 - 롤랜드 알렌 목사와의 인터뷰

9장. 자비량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영성
* 자비량 사역자의 훈련과정
1) 천천히, 지속적으로, 2) 사회적으로, 3) 모험을 하면서 훈련받았다. 

제5부. 구비자를 구비시키려면
10장. 구비자의 영적 준비
* 영적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세가지 : 깊이(Depth), 분별력(Discernment), 연단(discipline)
- 필요는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경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바쁜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필요때문에 바쁜것은 특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는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 참된 영성을 위한 훈련 : 위를 향한 여행, 안으로 향한 여행, 밖으로 향한 여행

11장.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무엇이 사역자를 만드는가?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그들을 만드신다…. 주님은 금간 곳을 고치시는 의사시요, 그물을 고치시는 어부시요, 벽을 재건하는 석공이시요, 진흙을 빗으시는 토기장이시요, 모범적인 부모요, 강요함이 없이 모든 부서진 조각들을 적절하게 다시 붙이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얼어붙은 자원을 녹이는 일, 즉 그의 백성, 그의 평신도를 해방시키는 것에 우리보다 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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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영속적인 문제
기독교는 현세적 생활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것과 짝하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모둔 인간적 사업이 멸망할것을 예측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6

영속적인 문제
1. 현세의 생활을 멸시하고 영생불멸을 확신하는데 열중한다. 
2. 그리스도가 인간을 유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게하고 인간 자신의 성취에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3. 편협한 기독교. 로마의 관용정책과 충돌

하나님 사랑은 찬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는것은 긍휼과 용서로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하나님 사랑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사랑해야할 그대로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기를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실수 있는 강력한 긍휼로 사랑하는 이원성. 

문화의 특징
1. 사회적인 성격
2. 문화는 인간의 성취이다.
3.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어떤 목적을 위해서 고안된 것)
4. 문화는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2. 문화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3.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4.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1) 새 백성과 ‘세상'
요한 1서속에서의 ‘세상’의 의미(2:15)
-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기에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
- 2세기 기독교 문서(터툴리안) : 2세기 당시 기독교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이외의 제 3의 민족, 새백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신념에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논리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던지 다 악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다. 

2) 톨스토이의 문화배척
- 베네딕트의 규칙, 메노파, 퀘이커파
-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입법자로서 그의 계명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과 타락하지 않은 이성의 명령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모든 국면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 그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폭력과 기만의 제도화를 대표한다. 
- 또한 그는 경제, 철학, 과학, 예술등에 반항했다. 
- 동과 서의 카톨릭, 정교회와 종파적 프로테스탄트, 천년왕국주의자와 신비주의자에게서 이러한 입장을 찾을 수 있다. 

3) 필요하나 부적절한 입장
“퇴거와 포기의 운동이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에 대한 책임적인 참여운동도 그와 못지않게 필요하다. 이런 균형이 결핍될 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번영이나 공공적 평정을 위한 공리주의적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 우리는 문화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가 살고 있던 그 문화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던지,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말씀을 우리의 사회질서 안에 번역해서 받아들이든지 둘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다. 
- 독신 - 결혼-재혼-신자와 결혼-일부일처-일부다처-무책임한 성관계

4) 신학적 문제들
- 이성과 계시의 문제
- 죄의 본성과 만연성의 문제
-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의 문제

- 이 견해의 문제점 : 자연의 창조주, 역사의 지배자, 그리고 피조물에 내재한 영과 기독교인 공동체 안에 있는 영, 이런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문제이다. 결국 이들은 이 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반대되는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적 영영과 영적인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는 정신적 영역의 둘로 구분하려는 유혹에 걸리게 된다. 이는 터툴리안의 몬타니즘, 영적 프랜시스주의, 퀘이커 교도의 내적 광명교리와 톨스토이의 정신주의등에서 솔 수 있다. 


3장.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의 문화와의 조화
- 그리스도를 온전히 문화적 용어로 해석하고 사회적 신념 또는 관습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아무런 긴박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경향을 대표한 그룹은 헬라 문화에서의 영지주의자들이었다.(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그들은 당시의 문화에 기독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과학적, 철학적 해석을 가하였고 이는 문화속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된 기독교는 한 종교적 또는 철학적 체계로 되어 버린다. 

2)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 존 로크 : 기독교의 합리성(중용지도)
- 라이프니츠 :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칸트)
- 제퍼슨 :  
- 슐라이에르마허 
- 칸트, 제퍼슨, 슐라이에르마허등으로부터 헤겔, 에머슨, 리츨로 옮겨져서 이성의 함계안에서의 종교가 인간성의 종교로 됨에 따라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여러가지 모양으로 다시 선포되었다. 
- 리츨의 신학 : 계시와 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였다. 리츨은 그의 신학적 임무를 시작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또하나의 출발점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지를 그 원리로 삼고 있는 문화적 공동체이다. 리츨은 이처럼 교회와 문화 공동체 사이에 이원성이 있고 그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고 주장했다. 
- 리츨에게 문화의 열쇠라고 느껴진 것은 칸트의 높은 윤리적 이상주의였다.

3) 문화적 신앙에 대한 변호

4) 신학적 반론
- 그 시대의 문화에 충성한다는 것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4장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
1) 중립적 교회
-중립적 교회는 반문화적 극단주의자와 문화에 그리스도를 적응시키려는 문화주의자와의 쌍방을 모두 거부했다. 
- 중립적 교회의 신념 
하나 :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둘 :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셋 : 죄의 보편성과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
- 중립적 교회의 세부류 : 종합론자, 이원론자, 개변주의자

2)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다 긍정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이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주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림이어서 한 인격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백한다. 
- 종합주의자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는 간격이 있으며 조화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이 간격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고 극단주의자들은 당초부터 극복할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저스틴, 클레멘트, 토마스 아퀴나스(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 레오 13세

3) 종합의 문제점
- 피조물의 구조 자체 안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이성을 사용하여 그 법을 알고 또 그 법대로 자신을 통어해가야 한다는 것과 그 법이 이성적인 언어의 개념안에서 조형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 토마스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비판 : 이원론자, 개변론자, 극단주의자. 이들은 기독교적 완전을 향한 등급을 설정하려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 종합주의자가 인간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 필요하며 위대하다는 점을 아무리 고백한다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안에 내포된 근본악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결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5장.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1) 이원론자의 신학
- 종합론자는 온건하고 발전적인 세상을 그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나,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있다. 
-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자의 해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다. 

2) 바울과 마르키온의 이원론적 동기
- 바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문화적 제도와특징, 모든 인간적 업적을 상대화했고 죄아래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님의 은혜의 거룩한 침입을 향하여 열려있다. 
- 종합론자는 문화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또는 교사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로 움직여 간다. 그러나 바울은 문화의 심판자 또는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적 문화로 나아간다. 
-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에 항복한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윤리와 모든 불의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총괄적인 진노에 유의하는 윤리로 나눌 수 있다. 
- 마르키온(영지주의자, 마니교) : 세계를 하나님과 악의 권세로 구분, 참된 이원론자는 두 서로 잡아당기는 양극 사이의 긴장안에서 산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그 두 극성을 따로따로 분리시켜버렸다. 
 
3) 루터와 현대의 이원론
-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요 세상나라는 진노와 가혹의 나라로 이해했다. 
- 복음서에서 발진티푸스의 치료법을 찾을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 가운데서 국가적 범죄자를 처리하는 특수한 법률을 찾을 수 없다. 
- 신앙과 과학은 서로 같은 표준에서 비교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이 두영역에 살고 있는 위대한 양서류이다. 
- 윌리엄스는 정치 복음을 연합하려는 영국국교와 청교도등의 종합주의, 개변주의를 배격했다. 

4) 이원론의 장점과 결점
- 이원론은 기독교인을 반율법주의로 인도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에 빠지게 한다. 
- 이원론은 일시성 또는 유한성을 죄와 긴밀하게 괸련시킴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매우 가깝게 접근시켰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1) 신학적 신념 
- 이들의 기독론은 종합론자나 이원론자와 비슷하다. 그리스도가 새 율법을 주신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은 인류의 촤선의 정신적 원천을 표징하는 분이라는 것 보다도 인간이 만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죄관은 이원론자에 더 가깝다. 개변론자(Conversionist)가 이원론자로부터 구별되는 요점은 그들이 이원론자보다도 문화에 대한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적극적, 희망적)로 첫번째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속량에 너무나 치중하기때문에 창조는 속량의 위대한 행위의 일종의 서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둘째로 창조때의 선에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된다. 그러나 그는 그 타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며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로부터 구별하는데 극히 날카롭다. 그의 문화는 부패를 향한 질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부패된 질서이다. 이것은 존재의 나쁜면이 아니라 전도로서의 악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문제는 개변의 문제이지 새창조로 대치할 문제는 아니다. 
셋째로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작용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이다. 
“배타적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교회 혹은 기독교 문화의 발흥과 이교문명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자연과 정신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종합론자에게서 역사란 영혼이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교제를 율법, 이성, 복음 그리고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원론자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신앙과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완성될 때의 중간기간인 것이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 있어서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2) 제4복음서의 개변주의적 동기
- 요한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창조와 그 말씀이 육신을 이룰데 대한 그의 신념에서 물질계나 정신계를 막론하고 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정적 태도를 확신했다. 
- 세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피조물 전체, 특히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어둠속에 거하는 악한 일을 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그런 인간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된다. 
- 요한은 개변주의자들의 동기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그룹의 분리주의를 결합시켰다. 

3) 어거스틴과 문화의 개변
- 개변주의자들은 배타적 기독교의 반문화주의에 대항하며 동시에 문화적 기독교의 타협적 태도에 대항해야 했다. 
- 어거스틴은 그가 훈련받고 가르쳤던 도덕위에 은혜의 경험의 결과에 따라서 가치 변이 또는 방향 재지정을 꾀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이다. 그 뜻은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방향을 전환시키고 다시 생기를 불어 넣으며 거듭나게 한다는데 있다. 
- 칼빈에게 있어서 복음이 현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게 하려는 의도는 루터보다 강하다. “인간은 각자의 직업활동에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그이 보다 역동적인 직업관, 국가는 다만 악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다는 소극적인 직책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그의 국가관,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 타락의 폐허 가운데서도 여전히 빛나는 인간성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견해, 육체의 부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그의 교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과 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어서 인류의 본성과 문화를 변혁시켜 마음속에 기록된 뮬법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로 될게 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게 했다. 

4) 모리스의 견해
-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 안에 나타난 완전주의의 주요 대표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생활의 변혁자이다. 
- 에드워즈는 창조, 죄, 칭의에 대한 민감하고 심오한 관점과 천년왕국적인 희망과 회개의 방법에 대한 그의 이해등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그 문화의 갱신자라는 사상의 운동을 수립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 모리스는 요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비사회적인 기독교인, 비기독교적인 사회주의자 모두와 충돌했다. 

7장. 하나의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
1) 결정적인 결론
제한된, 적은 믿음을 받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최후 단언을 내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찬탈행위가 될것이다. 
- 이 결론은 이론적인 통찰이나 전망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찰에서 행동으로, 통찰에서 결단으로 이동함으로써 꾀해지고 획득되는 것이다. 

2) 신앙의 상대주의 
결론들은 개인의 부분적이고 분완전하며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에 상대적이다. 
해결책과 결단은 다 상대적이다. 
우리의 추론과 결단이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가치의 상대성

- 우리 개인들, 사물들, 운동들의 상대적 가치를 다룰 때, 이 모든 실재가 그들의 상호관계에서 여러 가지 가치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사회적 실존주의
- 결단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색적인 탐구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라 자기에게 참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순간에서 행동하는 책임적 주체로서 자유롭게 내려야할 결단인 것이다. 
- 우리는 역사와 사색에서 뛰어나와 행동으로 얾겨가야 한다. 결단한다는 것은 개인적 책임 아래서, 우리에게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신앙의 열정으로써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결단에서 우리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 구러면서도 이지적인 것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 

4) 의존적 자유
- 우리에게는 믿음안에서 선택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신앙은 초월적 원인의 현존안에 있는 자아들의 공동체 내에만 실재한다. 
“믿음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그룹 또는 한 역사적 시간이 교회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부분적, 상대적인 일을 하고 또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가 교회의 머리실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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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탄생


루터는 1521년 4월 18일 라인강변의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철회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대해서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자비로 부탁합니다. 전하와 영명한 군주들, 또는 지위의 높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가능하시다면 선지자나 복음서 저자들의 글을 사용해 증거를 보여주시고, 저의 실수를 드러내 주셔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단 깨닫게 되면 저는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저의 주장을 포기할 것입니다. 동시에 저의 책을 불 속에 던저 버리는 첫번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위 대답에서 그의 입장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 법정은 그에게 분명하게 철회를 할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전하와 군주들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기를 원하시니, 저는 투쟁적이거나 악의를 가지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납득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없다면(저는 단지 교황이나 공의회라 해서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잘못을 저지르며 모순된 행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일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에 저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루터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즉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성경의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권위에 앞서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 루터의 성경에 복종함으로 권력의 압력에 저항하는 행동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태동하였다. 

(터닝 포인트, 7장 마틴 루터의 보름스 국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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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매달았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따분한 사람이라고 고발했던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역동적이어서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충격적인 개성을 질식시키고 그분의 주변을 지겨운 분위기로 감싼 것은 그 후의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유다의 사자의 발톱을 매우 효율적으로 깍아 주었으며, 그분께 "온유하고 부드럽다"는 증명서를 붙여 주고, 그를 창백한 성직자들과 착실한 할머니들에게 딱 맞는 애완동물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분을 결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험한 선동가라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분명 그리스도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우셨으며, 정직한 구도자들에게는 인내심이 많으셨으며, 하늘 앞에서는 겸손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존경받던 성직자들을 위선자다라고 모욕하셨으며, 헤롯 왕을 "저 여우"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잔치상에서 함께 어울렸으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다. 그분은 분에 차서, 거래하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그들과 물건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분은 성스럽고 고색 창연한 수많은 규제들을 논파하셨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병을 고쳐주셨고, 다른 사람의 돼지떼와 재산에 대해서는 충격적일 만큼 무관심하기도 했다. 그분은 부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해서도 마땅한 경의를 표하지 않으셨다."(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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