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의 원제는 “How I Changed My Mind About Evolution”이다. 번역하면 '나는 어떻게 진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었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판의 제목은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이다. 아마도 조금더 도전적인 제목이 되기를 원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지적 여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둘 중에는 전문 과학자, 신학자, 목회자등 다양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진화라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신앙과 크게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지적 여정중에 그런 갈등의 시기를 통과한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는 독법과 자연을 읽어내는 독법이 같을 수 없다. 각각의 분야의 전문가로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우고 연구하고 또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제 그 창조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진행되었는지를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은 과학의 역할이다. 성경은 누가,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를 밝힌다면 과학은 언제,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해서 성경과 과학이 서로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갈등처럼 보이는 여러 삶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플때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면서 동시에 병원에 가서 의상의 진찰을 받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받는다. 아프면 오로지 기도만 해야한다거나, 병원을 가야만 한다는 배타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과 과학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25명의 저자들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은 영국의 톰 라이트가 쓴 “영국인이 본 미국의 진화 논쟁”이라는 부분이었다. 미국에서는 1925년 스콥스 재판 이후에 ‘창조와 진화’의 대결구도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유럽도 진화론의 공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그 강도가 특별히 컸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주의의 발흥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첨예한 편가르기의 경험이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톰 라이트는 미국 사회에서의 창조와 진화 논쟁은 단지 이 주제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노예제도의 정당성, 미국 흑인들의 사회적 위상과 관련된 상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곪아 있다가 과학 대 종교 혹은 진화대 성경의 논쟁으로 촉발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논점은 한국적 상황과 맞닿아 있다. 전세계적으로 젊은 지구론의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과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도 일제 치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과 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보수와 진보로 편가르기를 강요하는 시대적인 문화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투적인 젊은 지구론, 창조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톰 라이트의 미국에 대한 문제의식을 한국적인 상황에 적용해서 연구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 등장하는 모든 저자들이 표면적으로 혹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상은 바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성경의 주장과 과학의 주장이 갈등하는 것 같아도 그 갈등의 이유는 각각의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의 한계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겸손과 상호의존'이라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학문은 반드시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이라기 보다는 도그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진리를 밝혀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반대하고 거부하기보다 정말로 그러한가 상고하여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197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1980년대생들은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더 심각한 구조조정을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이제 1990년대생들이 사회로 나아오고 있다. 과거 시스템에 순응하던 이들과 달리 90년대생들은 간단함, 재미, 정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고 있다. 인사 담당자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이 이들과 함께 일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들은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하는지 의문을 제시하며 워라밸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근무 환경도 바뀌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정착되고 있으며 근무 형태도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기존의 소비자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스마트 컨슈머로 호갱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하고 살아내기 위해서 90년대생을 탐구해보자.
1부. 90년대생의 출현
그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한국은 1960년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룩해 왔다. 이 당시 세대들은 대기업에 입사해 평사원으로 들어가 조직 내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갔다. 이 순환 과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멈춰버렸다.
70년대생들이 IMF 외환위기 시절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의 직격탄을 맞은 모습을 본 80년대생들이 선택한 길은 ‘자기 계발’이었다. 하지만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중간 관리자 이상만이 아니라 전 직급에 걸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90년대생들은 상시 구조조정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향후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연공서열과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 혹은 공무원 취업에 올인한다.
신카스트제도의 출현 : 취업률을 기준으로 신분 등급을 매긴다. 문과생은 천민인 반면 이공계는 귀족 등급이다. 그중에서도 전-화-기(전기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전공자는 왕족 등급으로 불린다.
90년대생들은 어떤 세대인가?
세대는 시간, 집단, 사회구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다. 1997년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1970년대생,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세대인 1980년대생과 지금의 1990년대생을 비교해볼 수 있다.
X 세대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에 민감하며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가능항 세대 중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연령층을 의미했다.
밀레니얼 세대
중국의 경우 바링허우(80년대생), 쥬링허우(90년대생)로 불리운다.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은 아마도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문자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니 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도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두명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라는 표현이 쉬지 않고 나온다. “폴리스의 미래가 걱정된다”라는 말도 나온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은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라는 말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비자]의 <오두>에서는 “지금 덜떨어진 젊은 녀석이 있어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욕해도 움직이지 않고,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행실’, ‘스승의 지혜’라는 세가지 도움이 더해져도 끈내 미동동 하지 않아, 그 정강이에 난 한 가닥 털조차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며 당시 젊은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했다. (66)
90년대생의 첫 번째 특징 : 간단하거나
- 90년대생 은어의 특징과 유형 : 1) 줄임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2) 신교 은어의 생성 및 쇠퇴가 빠르다. 3) 더 다양하고 창의 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단체 카톡방에서 두 문장 이상의 말을 입력하려다 보면 어느새 빠른 대화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빠른 문자 입력을 대신한 새로운 도구들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이모티콘과 짤방(짤림방지)이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긴 텍스트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세대에게는 문자를 빨리 쓰는 능력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보유한 이모티콘이나 짤을 보내는 것이 더 인정받는다.
비선형적 읽기 시대에 긴 글을 내려가면서 읽어주는 참을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이렇게 스크롤 압박을 이유로 세 줄 요약을 요구한다.
신기술의 변화는 35세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데 반해 35세 이상에겐 당황하고 난처하게 만든다. 2010년 이후 급격한 모바일의 변화는 7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재앙과 같았고 8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90년대생들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셔츠를 직접 만들어 입거나 짐승을 직접 도살하는 것만큼이나 구식이고 심지어는 멍청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86)
80년대생들이 웹 네이티브라면 90년대생들은 앱 네이티브이다. 이들에게 조용하고 집중적인 기존의 선형적 사고는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온라인상으로 제공되는 축약된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팰요할 때 바로 찾는 비선형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바일의 배터리가 없거나 잔여 데이터가 떨어지면 단절의 두려움을 느낀다.
90년대생의 두 번째 특징 : 재미있거나
80년대생 이전의 세대들이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면 90년대상들은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들은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질서라는 것을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썹맨 : TMI(Too Much information), JMT(존맛탱), 엄카(엄마카드), 흑우(호구), 핵인싸(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 새로운 세대에 맞춰서 재미의 포인트가 변화된 것이다. 이전의 시청자들에게는 외면되었을 내용이 지금 젊은 시청자들에게 병맛스러운 감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컨텐츠가 TV채널 뿐만 아니라 유투브를 통해 확장되었다. 또한 시청자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빠르게,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90년대생의 새로운 능력 : 드립력(그 상황에 어울리는 짧은 말이나 글로써 촌철살인의 웃음을 주는 것)
브리태니커-위키피디아-나무위키(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나 말장난, 농담을 사용)
재미를 통한 자아실현이 기본이 된 90년대생들 : 먹방, 맛집 투어
90년대상의 세 번째 특징 : 정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이유
그들은 이제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완전무결한 정직을 요구한다. 당연히 혈연, 지연, 학연은 일종의 적폐다. 공개 채용의 비리를 접하면서 90년대 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그래서 공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그나마 자신이 정직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을 믿지 못하고 이 제도가 있는 자에게만 유리하다고 여긴다. 이들은 신뢰의 시스템화를 요구한다. 진학과 취업은 넘어서 사회 전방위적으로 학대될 것이다. 선수 선발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신뢰 시스템 요구, 부동산의 호가가 아니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한 플랫폼의 출현, 화장품의 전체 정보를 제공하는 앱의 등장
솔직함 :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잡아라. 소비자가 기업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나는 접점, 즉 영업과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을 말한다. 본인이 말한 작은 것에 책임을 지는 태도, 더 이상 기업의 광고가 통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결국 투명한 정보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제는 구직자가 면접관을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압박면접도 점차 사라지고 구조화 면접이 대세가 되고 있다.
화이트 불편러와 프로 불편러의 등장
불편러란 단어는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개인의 권리의식과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과거에는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 문져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중이 자유롭게 의견을 풀어놓을수 있는 인터넷의 발달로 토론과 비판활동이 활발해졌다.
사회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바른 소래를 내는 불편러들의 증가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예민함은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다만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강화한다거나 타인에게 자신의 선호를 강요하거나 부당하게 참견한다면 꼰대질과 다를게 없어진다. 이는 프로 불편러가 아닌 블랙 불편러이다.
2부. 90년대생이 직원이 되었을 때
1. 90년대생, 그들이 몰려온다.
실제로 현재 기업들은 90년대생의 출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마윈,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은 중국과 인터넷 비즈니스의 미래, 그리고 청년 세대에 대한 신뢰였다.
정부가 청년일자리정책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에 대기업의 연봉과의 차이를 보상해주는 정책을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연봉이 적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기업문화가 꼰대 수준이기 때문이다.(145)
90년대생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꼰대질 속에서 살아왔다. 문제는 그동안은 꼰대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꼰대의 유형으로는 1)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유형(23%), 2) 상명하복(까라면 까) 유형(20%), 3) 전지전능형(내가 해봐서 안다) 유형(16%), 4) 무배려-무매너(네가 이해해라) 유형(13%), 5) 분노조절장애(너 미쳤어?) 유형(10%), 6) 반말(다짜고짜 야!) 유형(9%)
꼰대질이 심해지면 갑질과 모욕과 같은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 또라이를 피해 조직을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 여럿이 있음
3) 팀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 임
2. 90년대생 인재들의 특징
현재 20대인 90년대생들에 흔히 붙어 다니는 꼬리표는 다음과 같다. ‘충성심이 없고’, ‘자기 실수는 인정 안하고 변명만 늘어놓고’, ‘끈기가 없어서 쉽게 포기하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없고’, ‘고집이 세고’, ‘힘든 일은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꼬리표는 보통 기존 세대들의 시각에 따른 것이다.
로열티 ;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중진들이 볼대 90년대생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보인다. 미국의 경우 1965년이후 출생한 X세대는 1990년대부터 회사에 진출하면서 이전의 베이비붐 세대와 갈등을 보였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돈 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Young) 도시의(Urban) 전문직(Proffesional), 즉 여피족Yuppies과는 다르게 젊고(Young) 개인주의적이며(individualistic) 자유분방하고(Free-minded)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수고 적은(Few), 즉 이피족Yiffie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려 하지 않아 회사에 대한 충성을 높게 사는 기존 세대나 관리자들이 이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90년대생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70년대생들과 상시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가져왔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쑥대밭이 되었던 80년대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안정된 생활은 특정 세대의 기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정작 90년대생들은 안정적인 삶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이후로 열심히 일해온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팽겨쳐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90년대생들에게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야근 문화에 익숙한 70년대생 이전 세대에게 정시 퇴근 캠페인은 회사가 주는 하나의 혜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80년대, 90년대생들에게는 정시 퇴근이란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이다.
보여주기식 업무에 대한 염증
성과 창출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보여주기는 부지런한 비효율의 대표주자다.
형식에 빠져 낭비되는 시간들
90년대생들은 또한 실행보다 게획이 중시되고 알맹이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조직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격언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의사결정은 없다’라는 격언을 압도한다.
3.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고용
2018년 ‘주 52시간 근무 시대’의 개막
주 52시간 근로제의 시행은 누군가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저녁을 굶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다.
90년대생들은 기존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기업의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낮다. 반대로 기업에서 개인의 미래와 가치 상승에 대한 관심은 높다. 여기서 기존의 경직된 인사제도에서 벗어나 회사와 개인의 필요에 따라 찬력적으로 인력을 운영할 필요가 생긴다.
4. 새로운 세대의 직원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강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대
예전 빠따로 다스리던 시절은 갔다. 무엇보다 90년대생들은 자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들에게는 권위와 통제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강압적인 요구에 그들의 권리를 잃으려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견이 아닌 참여를 원하는 세대
버티라 하지 말고 버텨야 하는 기한을 알려야
90년대생들이 일하는 조직의 관리자들은 이제 이들이 입사 후 얼마 동안 도제식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부분과 그에 따른 모습을 현실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표준 답안을 제시하기 보다 더 나은 방안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90년대생들에게도 회사란 노동을 하러 오는 곳이다. 다만 그들은 어디에서라도 유희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직장에 오락시설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그 회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업무 몰입이나 흥미 증진에 있어서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90년ㄷ생들에게 일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직에 관대한 기업일수록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기 쉽다. 외부 인재들은 이직에 관대한 회사에 입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3부. 90년대생이 소비자가 되었을 때
1. 90년대생, 소비업계를 뒤흔들다
호갱의 탄생 그리고 반격
호갱은 기업의 차별적인 가격 부과 행위나 억지스러운 상술에 당한 고객을 말한다. 기업은 ‘어디에서 가장 좋은 조건의 거래를 할 수 있는지’를 고객에게 숨겼다.
정보의 비대칭과 그동안의 소비 프레임 속에 갇혔던 소비자들은 기업이라는 거인에 대항하지 못하고 벽만 쌓아 올렸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과 모바일을 무기삼아 기업에 반격을 시작했다.
스마트 컨슈머와 스튜피드 컨슈머
간결하게, 더 간결하게
90년대생들은 고객만족이나 고객감동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번거로움의 제거다.
1-2인 가구 비중의 증가로 가정 간편식 시장이 급증하였고, 요식산업이나 조미료시장의 변화가 일고 있다.
90년대생들의 경우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생겼을 때 모바일로 검색을 하고 게시판에 문의사항을 남기거나 챗봇을 통해 즉시 상담을 한다. 비대면상담을 선호하는 것이다.
연결이 권리가 된 세대의 모습
90년대생들에게 연결은 이제 하나의 권리처럼 여겨진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므로 빼앗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방전포비아, 배터리 거지)
십대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두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놔야 하기 대문이라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다.
2. 90년대생들이 바꿔버린 소비 지형도
호갱기업
1) 직원과 협력업체에 대한 갑질 등 불공정 행위를 하는 기업, 2) 국내의 낮은 경쟁 상황으 이용하여 차별적인 가격정책을 취하는 기업, 3) 기업의 수익성 향상을 위해 제품의 품질을 고의로 악화시키는 기업, 4) 복잡한 프로세스를 개선하지 않아 소비자의 불편을 야기하는 기업
대리점 밀어내기로 갑질의 대표기업이 된 남양유업
용산 전자상가를 무너뜨리다.
프리미엄 전략을 역풍을 맞은 다이슨
한국 시장에 대한 역차별로 비판받는 현대자동차
맥도날드가 점차 사라지는 진짜 이유
질소 과자에 경종을 울리다
맥주 시장과 주점 프랜차이즈의 변화를 이끌다
스몰 비어의 등장과 기존 프랜차이즈의 몰락
해외 직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위기를 맞을 산업들
호갱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 Slow-Death 시키기
새로운 소비자들이 용산 전자상가를 특별히 보이콧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호갱이되고 싶지 않았던 새로운 세대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말없이 떠났던 것이다.
3. 90년대생의 마음 사로잡기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이다. 이러한 융합기술의 발전 방향은 번거로움의 최소화이다.
아마존고라는 무인 매장과 알리바바의 미래형 매장인 허머.
기술의 발전의 방향이 소비자의 편리보다 점포 관리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새로운 세대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20대가 유투브를 보는 또 다른 이유
네이버 캐스트와 같은 타 동영상 서비스에 비해서 짧은 광고 대문이다.
그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유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의 경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저의 돈이 아닌 광고주의 돈이다. 광고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저의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유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90년대생들을 답한다. 우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라고 말이다.
정직한 제품과 서비스만이 살아남는다.
창렬푸드의 몰락과 혜자푸드의 성공
배달앱의 사용이유로 간편성과 아울러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형 뽑기방의 몰락(호구가 되기 싫은 90년대생들)
이처럼 90년대생들은 직원을 일하든 소비자로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는다.
4. 90년대생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방법
샤오미는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자가 제공하는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른 운영체제 업그레이드를 지원해 제품 안정성을 높여 소비자의 충성도를 이글어내고 있다.
70년대생들이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불만을 전화나 엽서를 통해서 알렸다면, 80년대생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내용을 올려 답변을 제공받았다. 이제 90년대생 고객들은 본인의 불만을 기업의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상담하거나 온라인 채널에 등록하지 않고 본인의 SNS에 잡담식으로 올리거나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올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를 관찰할 수 있는 두가지 방식
첫 번째 방법으로는 기업의 담당자 혹은 조사자가 별도의 체계적인 조사 설계 과정 없이 담당 세대가 하는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 대한 내부자적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세대의 말과 행동의 전반적인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책은 앞선 책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의 후속편으로 예배를 처음 접했던 주인공, 푸블리우스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몇년이 지나서의 하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하루의 일과를 다루면서 다양한 주제(가족, 신분 문제, 자녀 교육, 동성애, 사업, 헤어스타일이나 장식, 부부관계,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우상 재물, 가난과 부, 구제, 예배, 직원 징계, 신용 등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가족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의 방법은 가족과 일과 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다. 내가 택한 하루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거의 한 주 동안이나 급속히 번진 끔찍한 화재 사건 바로 다음 날 이었다.”
가족 소개
푸블리우스, 아내 유니아, 아들 누기오, 딸 쿠미아
숙모 드루보사, 세 노예 : 암비오와 그의 아내 파우스타, 그이 딸 탈루스
하루 일과를 시작하다.
아침 식사 : 누기오(늦잠, 패스트푸드)
쿠미아(딸, 학교 교육, 중매 결혼에 덜 의지)
옷 입기 : 로마의 드림 장식을 제거(부적), 헤어스타일이나 장식에 대한 견해
업무를 개시하다
은행업
암비오의 실수를 책망함
아침나절의 광장
쇼핑과 거래, 광장의 토론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들
도시 전역에 수백개의 목욕탕, 한 무리의 음담패설(혼외정사와 남성중심의 사고방식)
신앙을 갖게된 이후에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성적 자기 결정권(여성의 주도권)
(고전 7:1-5, 개정)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일상의 침례(신자들과의 친교)
종과 주인이 함께 하는 점심식사
주간 친교 모임분만 아니라 점심 식사때도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 노예들의 우려
학교생활과 자녀교육
나이든 남자와 소년 사이의 관계
당시의 여성관 : “우리 문화에서는 남자가 이성보다도 동성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 아내란 아이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돌보고 남편의 사회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 야망을 지원하는 데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남자와 같은 지적 혹은 정서적 능력이 없으므로, 아내와 완전한 우정이나 사랑을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저녁 식사에 초대 받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를 위해 공적으로 올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가?, 공공 기부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
우상에 바친 고기
(롬 14:13-17, 개정)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20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2011년 히브리어로 발간된 이 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어로는 2015년 번역되었다. 그는 과학과 역사를 융합한 시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관통한다.
그는 철저하게 진화론의 시각에서 내용을 전개한다. 하지만 인지혁명(지식의 나무, 선악과)을 이야기하면서 사피엔스가 지구상의 주인이 된데에는 허구를 상상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세가지 혁명으로 분류한다. 첫번째는 인지 혁명, 두번째는 농업혁명, 세번째는 과학혁명이다. 인지 혁명은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로 인해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집단간의 협력이 가능해졌다고 본다. 12000년전의 농업혁명으로 수렵채집의 삶에서 문화를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하게 되는 농경사회로 진입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농업혁명의 결과가 행복이 아니라 인구 폭발과 만족한 엘리트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농부는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많이 일했지만 더 다양한 음식을 먹지도 못했고 여유로운 시간도 갖지못한 정도로 바빠졌으며 건강도 더 나빠졌다고 말한다. 또한 잉여 생산물은 특권층의 손으로 들어가서 압제에 사용되었기에 농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큰 사기극이라고 보았다.
1500년경 과학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성장했고, 글로벌화,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확대, 환경파괴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생명공학의 발전이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이룰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점은 긴 인류의 역사를 종적으로 관통하며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큰그림을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인문학적인 책읽기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단편적인 내용의 나열이 아니라 알고 있는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을 다른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주는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내는 이 신선함은 여러모로 재미있고 도움이 된다.
저자는 철저한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때 전능한 창조주가 창세전에 그분의 위대한 계획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역사속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처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여러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시대를 읽어내는데 있어서 비상한 시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책의 첫 부분에서 사피엔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차별점은 허구를 믿는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돈, 법, 인권, 종교 모두 허구의 산물이지만 이것을 믿는 믿음이 사피엔스를 연합하게 했고 더욱 큰 공동체, 기업, 국가에 충성을 바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지난 40억년간 모든 생명체는 자연법칙에 따라 진화했지만 이제 인간이 지적 설계자가 되어서 신인류를 만들어낼 분기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이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비유기물공학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는 마치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고 지혜로와진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까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룹과 화염검으로 에덴의 입구를 막게 하셨는데 이제 그것을 돌파하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현대의 기술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속도와 업적을 내고 있다. 인공지능이나 유전공학의 발전은 질병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을 불사의 존재로, 지금의 지능과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지적능력을 가지도록 만들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기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가속페달을 더 밟도록 허락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을 함께 해야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1장.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135억년전의 빅뱅-45억년전의 지구의 탄생-7만년전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12000년전의 농업혁명-1500년경의 과학혁명-18세기의 산업혁명
2장. 지식의 나무
인지혁명 이후에는 생물학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서사가 호모 사피엔스의 발달을 설명하는 일차적 수단이 되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차이를 기술하며 그 차이가 허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로 보았다. 이는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간의 유대와 협력이 가능한가의 차이였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이 인지 혁명을 지식의 나무(선악과)라고 묘사한다.
3장.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저자는 인지혁명이 약 7만년 전에, 농업혁명이 12,000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인간 공동체의 지식은 고대 인간 무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고대 수렵채집인은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현대는 기술과 지식이 전문화 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다른 영역은 해당 분야의 사람들의 지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데 반하여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서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폭넓게 알아야만 했다.
4장. 대홍수
아프리카, 아시아에 거주하던 사피엔스들이 호주와 알라스카를 거쳐 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해당 지역의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멸종의 제1의 물결이,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멸종의 제2의 물결이, 오늘날 산업활동의 결과로 멸종의 제3의 물결이 벌어졌다.
제 2부
5장. 역사상 최대의 사기
저자는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고 본다. 도리어 수렵채집인들은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던 반면 농부들을 더 많은 노동을 해야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피엔스가 식물(밀, 쌀, 감자)를 길들인 것이 아니고 식물들이 사피엔스를 길들였다라고 주장한다.
"초기 농부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모유를 덜 먹이고 죽을 더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영구 정착촌이 전염병의 온상이 되리란 사시를 알지 못했다. 또한 단일 식량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가뭄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또한 풍년이 넘쳐나는 창고는 도둑과 적을 유혹할 것이며 이를 방비하려면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서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p. 134)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6장. 피라미드 건설하기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날 그날 먹고 살아가느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적었지만 농업혁명이후로 계절에 맞추어 농사의 사이클에 따라 노동을 해야했고 흉년을 대비해 곡식을 저장해야만 했다.
함무라비 법전과 미국의 독립선언문 : 저자는 철저하게 생물학적 진화를 주장하며 진화의 과정에 평등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유, 행복, 평등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내일 중력은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에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개인주의-독립된 공간)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바벨론으로 여행을 꿈꾸지 않았다. 아내나 부모를 위해서 피라미드를 지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이 경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상상의 질서는 우리의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객관, 주관, 상호 주관)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7장. 메모리 과부하
사피엔스의 사회질서는 가상의 것이기에 DNA의 복사만으로 전수가 불가능하다. 이를 유지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는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적이어서 많아진 정보를 유지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수메르인들은 숫자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8장. 역사에 정의는 없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 대답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10장. 돈의 향기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돈은 보편적 전환성과 보편적 신뢰라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11장. 제국의 비전
제국이란 정치질서의 두가지 중요한 특징(문화적 다양성과 국경의 탄력성)
첫째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서로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서로다른 민족이나 국민을 지배해야하고 둘째 탄력적인 국경과 잠재적ㅇ로 무한한 식욕이다.
12장. 종교의 법칙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식탁에 앉는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 내린 것이다.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불교의 가르침 :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인데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본주의(인간성을 숭배하는 종교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 진화론적 인본주의
4부. 과학 혁명
14장. 무지의 발견
1500년대를 기점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과학혁명의 고리 : 권력-자원-연구-권력
현대과학의 다른점 :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 치 차지, 3) 새 힘의 획득
15장. 과학과 제국의 결혼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18세기 이전 유럽은 아시아에 비해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18세기가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이다. 이는 마치 높은 탑을 쌓는데 한쪽은 나무와 진흙으로, 다른 한 쪽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쌓는 것과 같다. 처음 탑을 쌓을때 나무와 진흙이 그 속도가 더 빠르지만 임계점이 지나면 첫번째는 무너져 내리고 철근과 콘크리트는 계속해서 비약적인 속도로 그 높이를 올리게 되는 것과 같다.
유럽과 비 유럽의 가장 큰 차이는 무지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였다. 중국의 경우에 더 이른 시기에 세계를 항해했고(정화 함대) 그럴 능력이 있었지만 관심이 없었던데 반해 유럽(스페인이나 영국)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 정복을 해나갔다.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16장. 자본주의의 교리
과거 사회 전체의 파이의 크기는 거의 균일했다. 하지만 1500년 이후 과학혁명과 진보의 개념이 도래하자 점점 파이의 크기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지난 500년간 진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더욱 신뢰하게 했다.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고,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더 많은 신용의 길을 열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적인 수익을 늘리려는 이기적인 인간의 욕구가 공동체 부의 기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자에게, 부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가장 신성한 제1규율인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마법의 순환(콜롬버스의 예) : 새로운 대륙으로의 항해를 포르투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이사벨라여왕의 지원을 받는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엄청난 부를 제공한다. 이후 왕자들과 은행가들은 탐사의 잠재력에 큰 신뢰를 보내고 기꺼이 자신의 돈을 투자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실패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상인들과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했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성장이 최고이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17장. 산업의 바퀴
산업혁명,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발명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18장. 끝없는 혁명
지역마다의 시간의 통일
산업혁명은 지난 2세기동안 급속하게 기존의 가족 공동체를 해체했다.
약한 가족 공동체-강한 국가와 시장-강한 개인의 사이클
핵무기로 인한 대량학살 위협은 도리어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이로 인해 국가간 무역이 확장되고 점점 국가간의 연결망은 치밀해진다. 이제 개별 국가가 독립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19장.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예를 들어 수렵채취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바뀌어가면서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행복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 : 사람에 따라서 행복 지수가 일정한 범위안에 세팅되어서 같은 조건에서 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반대의 사람도 있다는 관점이다. 이것을 따른다면 역사, 역사의 발전은 별 중요한 변수가 아닌 것이 된다. 중세의 농부와 현대의 은행가(진흙집과 펜트하우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p. 552) 단지 호르몬이 분비만이 아니라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나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수많은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0장.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저자는 지난 40억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설계가 지배하는 새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서 그는 창조주를 지적설계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조작으로 이제 새로운 피조물(형광 토끼)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지적설계를 이루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전공학의 발전은 기술적으로는 이미 지능이 높은 사피엔스, 한 배우자에게 충실한 사람을 만들어낼 수준에 이르렀다. 매머드를 복제하거나 네안데트탈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생명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세가지 기술 :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공학
게놈 프로젝트를 완수하는데 15년의 세월과 30억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수백달러만 있으면 한 사람의 DNA지도를 만들 수 있는 시대이다.(p. 579)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p. 584)
매우 거창한 소개의 글을 보고 이책을 구입했지만 선뜻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내심 좋은 자료, 학적인 글일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다가 지난주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학적인 글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나간 글이었다. 물론 초대교회의 역사적 자료를 기초로 고증을 거친 글임에 틀림없다.
이 글의 주인공은 푸블리우스, 풀 네임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이다. 이 사람이 친구의 초대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참석한 가정예배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속에는 교회가 추구해야할 다양한 가치들이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아이와 어른, 성만찬과 세례, 식사와 성찬, 논쟁과 조정...
만약 우리들이 초대교회의 예배에 초청을 받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초대교회의 자료들을 기초로 초대교회의 예배를 지금 21세기에 구현한다면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
이러한 교회를, 예배를 은혜롭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이단적이라고 비난할까?
우리는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구호로 초대교회를 부르짖는다. 이 책에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이 지금 우리의 교회안에 구현될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제대로 수용하고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를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는 않을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모호하다. 성경의 어느 시대인지? 성경은 한권의 책이지만 매우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기에 그중에 어느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책의 저자처럼 1세기 초대교회의 모습을 꿈꾼다. 이 책 안에 녹아져 있는 예배, 기도, 성찬, 대화, 은사, 복음을 우리도 살아내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책의 부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아직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프롤로그중에 이런 말을 한다. “과연 의심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이 존재할까요?..... 의심은 상승을 위한 불편함이지만 무관심은 하락을 위한 방조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들리는 수많은 신앙 대화, 상징, 예식과 같은 종교적 익숙함을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우리네 교회는 의심을 믿음의 반대말로 여기며 의심하는 것을 불신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무언가 질문이 올라올때도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저자는 적극적으로 의심하고 질문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한번쯤 했을 법한 여러 질문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본 책을 통해서 제시한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목사가 에쿠스를 타도 될까?
십일조 띵까면 암 걸릴까?
하나님은 네가 뭘 선택하든 별로 관심 없으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한다. 물론 어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한다기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선한 견해들, 때로는 성경적인 풍성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하고 저자 개인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며 때로는 너무나 좋은 표현들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저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일독하기를 추천한다.
저자 최종렬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지금까지 서울이나 수도권의 대학생들의 삶에 대한 도전이나 그들에 대한 정의가 지방대생들과는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심층 인터뷰를 통해 질적 조사를 실시한다.
여기서의 표본은 대구 경북지역의 대학으로 재학생 6명, 졸업생 17명, 지방대생의 부모 6명으로 총 29명으로 진행되었다.
저자는 지방대생의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이며 이러한 가치는 성찰적 겸연쩍음이라는 방식으로 추구된다고 말한다. 성찰적 겸연쩍음이란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겸연쩍어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서 자기 계발에 나서지 않으며 주변의 습속을 따른다. 나아가 알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한데 이는 자기 계발보다는 자기보존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소위 수도권안에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을 만나보면 똑똑하다. 그리고 계산이 빠르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시간을 안배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나쁜 말로 표현하면 이기적이고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지방의 학생들을 만나보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착해 보인다. 재빠르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전체를 위하려는 모습이 강하다. 그런데 실상은 이들의 이면에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착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개의 단어로 이 책의 주제를 뽑아 보자면 “가족의 행복”, “성찰적 겸연쩍음”, 습속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책은 지방의 대학교의 재학생, 졸업생, 부모들을 대상으로한 인터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질문은 이들의 우짖는 소리가 청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연구가 가능했다면 같은 방식으로 수도권 대학을,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으로 지방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지금까지 나온 웹툰 ‘복학왕’을 모두 보았다. 어떤 부분은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라고 여거지기도 하고 어떤 에피소드는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웹툰이 모든 청년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일부의 청년들의 고민과 일상을 담아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성찰적 겸연쩍음과 습속의 왕국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청년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22)
우리는 실재로 개인의 우상(사랑과 가정, 돈, 권력 성취, 타인의 인정, 건강, 몸매 등), 문화적 우상(군사력, 기술 발전, 경제 번영)등이 있고 전통 사회의 우상에는 가정, 노력, 의무, 도덕적 가치가 있는 반면 서구 문화의 우상은 개인의 자유, 자아 발견, 개인적 풍요, 성취 등이 있다. 또한 지적 우상도 있는데 흔히 이를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이러한 우상들을 사랑하고, 우상을 믿고, 우상에 순종한다고 묘사한다.
프롤로그. 우상,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1장. 내가 만든 신, 평생 소원 : 오래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창 12:1, 22:2 : 아브라함과 독자 이삭
2장. 내가 만든 신, 사랑 : 사랑에 속고 속다 환멸에 찬 노예가 되었다.
창 29:16-20 : 야곱의 우상, 라헬
3장. 내가 만든 신, 돈 : 풍족한 소유와 소비로도 영혼의 헐벗음은 면치 못한다.
눅 19:1-10 : 삭개오의 구원 /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115)
4장. 내가 만든 신, 성취 : 그 어떤 성공신화도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왕하 5:1-13 : 군대 장관 나아만
5장. 내가 만든 신, 권력 : 권력의지는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단 2:1-3, 31-35 : 느부갓네살
6장. 가면 쓴 숨은 신들, 문화와 종교 :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 하나님’을 만든다.
욘 2:1-2, 4, 8-10 : 요나의 우상
7장. 제자리를 찾아서 : 전인격이 예수 복음을 통과해야 한다.
창 32:24-31 : 야곱의 축복
에필로그.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다. : ‘참 하나님’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이다.
복음은 감정이나 의지에 직접 호소하지 않고 이렇게 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사실상 당신의 진짜 구원과 구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에 의지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이 만든 가짜 신이며, 당신의 삶이 변화되려면 그 우상을 파악해 배격해야 한다.(254)
팀 켈러는 이시대의 대표적인 설교가이다. 그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리를 훔치는 이시대의 우상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탁월하게 현대와 성경의 시대를 넘나들면서 우리에게 하나님 보다 더 우선 순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이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상이 없어진 그 자리를 복음이, 하나님이 자리하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외치고 있다.
이 책은 지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한 기독교 역사학회에서 배덕만 교수가 진행한 기조 강의의 내용이다.
먼저 그 주제가 ‘헬조선과 개독교 시대에 읽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역사’인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 사회의 현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금 500년전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 부흥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을까 라는 바램을 담은 책이다.
헬조선은 '지옥(hell)같은 조선’이라는 의미인데 한국의 청년들이 우리 나라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이것과 아울러서 3포, 5포, 7포, N포 세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미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 최근의 땅콩 회항이나 갑질 논란속에서 보듯이 흙수저, 금수저 논란등이 이 시대를 부르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개독교라는 호칭을 얻었는데 이는 이 땅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 시대 지탄의 대상이 되고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양심이 되고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과 섹스와 권력의 문제에 얽혀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 속에서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으로 한국 교회안에 팽배한 혼합주의, 현실과의 타협, 신학의 실종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적 영성의 회복, 종교 본연의 초월적 가치 추구,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배경이 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도와 라틴어 텍스트를 복원하는 운동이었는데 고전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인간의 위치를 회복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고전 연구는 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인문주의운동의 선구자로 에라스무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고전어를 공부하여 고대 문헌을 교정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성경과 고전, 교부들의 작품을 발굴해서 편집, 주석하는데 생을 바쳤다. 에라스무스는 이런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고 본래의 순수한 진리를 복원하여 자기 시대의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65) 이러한 일환으로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새로운 라틴어 번역을 소개했으며 ‘불가타’의 오역을 지적했다. 또한 시대를 풍자한 ‘우신예찬’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했던 루터와는 달리 인간의 창조성과 존엄성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67)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신약성경을 출판했던 일차적 이유를 “시골 사람이 쟁기 끝에서, 방직하는 사람들이 베틀에서, 여행하는 사람이 자기의 여행 중에 성경을 노래하는 것을, 심지어 여자들도 성경 본문을 읽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식과 믿음, 자유와 경건, 개인과 교회가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세상이 이성과 교육을 통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믿음은 카톨릭과 종교개혁의 진영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고전어, 성경, 그리고 교부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차이점으로는 인문주의자들은 교리에 관심이 적었던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참다운 교리를 확립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순수한 신앙과 도덕적 실천에서 찾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보다 성경에 근거한 참다운 교리를 우선시 했다. 또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훨씬 더 낙관적,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루어와 에라스무스 사이에서 한사람을 선택해야 했을때 그들은 에라스무스 대신 루터를 선택했다.(74-6)
교회는 인간에 대한 인문주의적 가치에 주목하며, 이 지옥같은 현실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라고, 인간을 상품이 아니라 생명체,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선언해야 한다. 성경이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언급한다고 해서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성경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균형있게 조명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강력히 선포하기 때문이다.
‘개독교’ 현상은 중세 말의 타락한 가톨릭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죽음의 공포를 토대로 연옥교리와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 했고, 교황이 황제와 세속의 권력을 다투며, 교회가 종교적 목적을 앞세워 십자군을 동원했다. 재정적 탐욕에 의해 성직이 매매되며, 성직자들에 의해 사생아들이 무수히 양산되었고, 재물-치유-출산을 목적으로 뮤물과 성지순례가 성행했다. 이를 위해 신학자들이 성경과 무관한 교리를 만들고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야말로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가 된 것이다. 500여년전의 카톨릭 시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해법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리와 관행 위에 성경을 두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이교적 세속적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안에서 주인 행세 하는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진지하고 정직한, 그리고 철저한 연구와 묵상을 수행하고 이를 가르쳐야 한다.
저자는 기독교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그리고 이시대 한국교회를 연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헬조선, 개독교라는 단어를 극복할 것을 이시대 교회에 요청하고 있다. 앞서 1-4부는 5부를 선포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여겨진다. 5부의 각 주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장. ‘헬조선’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선포하라
2장. 근원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라
3장. 단절된 세상과 소통하라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는 이 내용을 역사 신학회의 기조 연설로 준비했기에 마지막 부분에 신학자들을 향해서 저항하는 지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학문을 하는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역자, 목회자들을 향해 요청되는 메시지일 것이다.
저자는 이책의 말미 5부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문주의자들은 대학과 교회를 지배하던 스콜라주의를 당당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교회의 전통이란 미명하에 성경적 진리를 억압, 왜곡하던 당대의 교회를 향해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과 초대교회를 토대로, 성직자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용감하게 지적하며 저항했다. 이를 위해 대학의 강단이나 교회의 고위직에 연연하지 않고, 당시에 빠르게 발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쇄소를 중심으로 학문과 지성을 통해 시대와 싸웠다. (중략) 그야말로, 인문주의자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비판적 지식인, 행동하는 지성, 저항하는 인텔리겐치아였던 것이다. 반면, 현재 한국의 신학자들은 철저하게 교권에 종속되어 있다. 교파와 신학의 차이를 떠나, 대부분의 교단신학교는 교단의 통제 아래 놓여 있으며, 학문의 자유나 교수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교단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일체의 비판적 성찰이 불가능하며 신학적 실험도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신학자들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면서 다수의 신진 학자들이 신학교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다양한 명목의 비정규직 신분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학교 내의 갑을 관계도 극복하기 어렵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며 한국교회를 위해서 외친 저자의 외침은 이시대 신학자들과 사역자들을 향한 사자후처럼 들린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린 시대에,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상식이 기적이 되어 버린 교회’속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달게 받으며 우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을 외치고 이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평소 관심있는 주제의 책이어서 단번에 읽어내려갔다. 저자는 지적설계론을 진화론을 대체할 중요한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이론또한 작업가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창조론 vs 진화론”의 프레임은 “신앙 vs 과학”으로 대치된다. 하지만 여기에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믿지만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사상이나 신념이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다윈의 진화론이 기존의 창조론을 붕괴시켰다면 20세기 후반 분자 생물학의 발전으로 유전자 정보가 해독되면서 도리어 이 정보를 가진 단백질 합성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이 도리어 비과학적이게 되면서 지적 설계론이 조명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어떤 유물론적이고 자연주의적 설명도 생명의 기원이나 캄브리아기 폭박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실패한 반면 지적설계는 이를 설계자가 의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자의 존재를 상정하기에 지적설계론을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라고 말하지만 혹시 미래에 특정화된 정보나 메커니즘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생명의 기원이 설명된다면 지적설계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격을 상실할 것이기에 반증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진화냐? 혹은 설계냐? 여전히 서로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는 작업가설이기에 선제적인 전제나 선입견 없이 자연의 증거가 우리를 이끌어 가는대로 나아가면서 무엇이 더욱 받아들일만한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매우 복잡하고 오래된 논쟁의 내용을 저자는 매우 중요한 핵심만을 짚으며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적설계에 대한 흐름을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 이론이 자연을 관찰하여 얻어진 객관적인 증거에 철저히 기초하여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특히 생명의 기원과 진화와 같이 생명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종교적 함의를 가진 문제들의 경우에는 각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생관 또는 세계관은 다양한 형태로 과학자들이 관찰된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욱이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오래 전 과거 생명의 역사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실험실에서 직접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과거 생명의 역사에게 무슨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올바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신념을 증거로부터 분리하여 철저히 객관적 증거와 자료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6)
다윈이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서 말한 자연 선택은 타 개체에 비하여 자연의 변화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형질을 가진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우월한 형질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수함으로써 종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개념이다. 그가 본래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선택의 개념은 우리에게 설계자 없는 설계를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계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30-40년대에는 신다윈주의이론이 등장했는데 이는 수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시간에 따른 소규모 변이와 돌연변이의 축적이 결국 대규모의 형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면서 등장한 이론이 화학진화론이다. 이는 오파린의 가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원시 대기상태에 산소가 없었던 환원성 대기에서 화학반응에 의해서 생명체의 핵심 물질인 단백질에서 원시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캄브리아기 폭발로 알려진 화석 기록과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분자생물학이 발달되면서 도리어 진화에 의한 생명의 창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다시금 지적설계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적설계론은 생명체 내의 많은 정교한 현상들을 방향성 없고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과정이 아닌 지적 원인에 의해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는 논거에 기초하고 있다.
마이클 비히는 자신의 책 ‘다윈의 블랙박스’를 통해서 박테리아 편모와 같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부품들 중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라고 명명했다. 윌리엄 뎀스키는 이른 ‘설계 추론’에서 특성화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으로 발전시켰다.
작동과학에서는 귀납법적 추론 방법(중력의 법칙의 적용, 현재에 재연 가능)을 사용하지만 역사과학의 경우에는 귀추적 추론 방법(화산재가 있으면 화산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론)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