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뭔가를 반복해서 한다. 그러면 매우 능숙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행동이라 하지 않고 습관이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일상이 선교적인 생활 습관이 되게 하라.
선교적인 습관이란 무슨 전략이라기 보다, 무엇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우리는 축복하고 밥상을 마련하고 성령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배우며 복음 전도의 과업을 위해 파송받는 것이다. 선교적 습관을 들이게 하는 묘책은 믿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로 연합하여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가 보는 데 있다.
삶으로 전도하는, 선교적인 사람들의 다섯가지 생활 습관(BELLS)
BLESS(축복하기) : 나는 이번 주에 세사람을 축복한다.
EAT(먹기) : 나는 이번 주에 세사람과 식사한다.
LISTEN(듣기) : 나는 최소한 주중 한 번은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
LEARN(배우기) : 나는 최소한 주중 한 번은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
SENT(파송되기) : 나는 주중에 내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썼던 모든 방법을 일기에 기록한다.
타성에 젖지 않을 세가지 방법
첫째 복음 전하는 은사를 받은 지도자들의 본질적인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이것들이 선교적인 삶을 위한 습관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책임성있는 관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습관 : 축복하기 Bless
축복이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로 bletsian인데 이는 게르만 조어 blodison에서 온 것으로 ‘이교도의 제단위에 피를 뿌려 신성하게 하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이 ‘행복을 기원하거나 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어원중에 ‘다른 사람의 팔에 힘을 보태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확신을 주는 말’, ‘친절한 행동’, ‘마음을 담은 선물’등을 통해 축복할 수 있다.
축복할 때 조심해야할 점들
첫째 단지 그를 개종시킬 목적으로 축복해서는 안된다.
둘째 제대로 한 축복이라면 상대방이 자기가 축복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우리가 제대로 말을 잘 했어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습관 : 식사하기 Eat
인자가 온 것은
(막 10:45,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 19:10,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7:34, 개정)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하여 후한 대접을 하면 그도 나를 초대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우리의 선교적인 삶이 심화되는 것이다.
세 번째 습관 : 듣기 Listen
선교적 습관을 위한 조언
첫째 시간을 작정하여 따로 떼어놓으라
둘째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라.
셋째 하나님께 내어드려라.
넷째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들을 따르라.
네 번째 습관 : 배우기 Learn
예수님을 배워야할 이유
첫째 당신이 예수님께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길러지며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것들을 들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그 아름다운 말씀덕분에 그분의 임재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경건의 가치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그분을 전해주려면 그분을 배워야 마땅하다.
배움의 시간 활용법
첫째 복음서를 공부하라
둘째 예수님에 관한 책을 읽으라
셋째 더 많이 시청하라
‘서핑선수들이 켈리 슬레이터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 ‘축구 선수들이 프리미어 리거들, 손흥민, 메시, 호나우두에 대해 말하는 방식’, ‘나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다섯 번째 습관 : 파송일기 쓰기 Sent
모든 신자는 선교사이며 화목케 하는 삶을 위해,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아름다움을 위해, 온전함을 위해 보냄 받았다.
일기쓰기 습관의 좋은 점
첫째 일을 순조롭게 진행한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다.
셋째 통찰력 있는 기록을 보관한다.
넷째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다섯째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한다.
제자도, 양육, 책임성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사항을 일회적인 행동이 아닐 습관으로 만들어 선교적인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이것이 DNA 소그룹이다. Discipleship-제자도, Nurture-양육, Accountability-책임성을 함께 감당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깨어진 세상에서 실실한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다. 르완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분열된 세상을 함께 걸어가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25)
1장. 화해의 비전들
“복음 전파와 교회 사역은 역사의 흐름과 동떨어져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진흙탕 같은 세계 역사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파괴하는 모든 세력, 곧 개인적, 사회적, 영적 파괴 세력을 분별하고 그에 맞서야 한다.”(35)
1) 인기있는 개념이 되어 버린 화해
2) 개인적 구원이 되어 버린 화해
3) 다양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화해
4) 불의를 해결하는 화해
5) 소방 활동으로서의 화해
- 우리는 위의 일반적인 화해의 비전에서 한걸음 물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지는 특별한 비전을 발견해야 한다.
2장. 한걸음 물러서기 : 하나님 이야기의 목적, 화해
“때로, 한걸음 물러서서 긴 안목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을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비전도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는 건축 책임자가 아니라 일꾼이며, 메시아가 아니라 사역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예언자입니다.”(51)
- 물러서는 것은 깨어진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상상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가만히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비전을 신뢰하는 자세다.
- 기독교적 화해 비전은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에 뿌리박고 있기에 그 이야기를 삶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 비전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의 습관을 갖게 한다. 그 이야기가 우리 속에 더 깊이 자리잡을수록 이 세상의 지배적인 비전이 제시하는 유혹에 좀더 쉽게 저항 할 수 있다.
3장. 화해 :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
이 세상에서 화해를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1) 화해는 여정이다.
2) 여정의 중심을 예수님이다.
3) 여정은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4) 이 여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름받는다.
5) 우리는 질그릇으로서 이 여정을 걸어간다.
4장. 성경은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가
화해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이 여정의 통제권을 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1) 평화와 조화 :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
2) 평화의 습관을 키울 시간
- 일상적인 평화의 생활 습관(경청하고,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정원을 가꾸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가정을 돌보는 습관)을 키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3) 깨어지고 분주한 세상에서의 안식
4) 선물로 주어지는 또 다른 평화의 길
5) 하나님 이야기 속의 드라마
6)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허다한 증인들 : 이 증인들은 비합리성(madness)적인 삶을 살았다. 이들 증인들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합리적인 행동) 미래의 비전에 따라 현재를 바꾸었다.
7)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8) 공존을 넘어선 일치라는 선물
9) 정의에 관한 근본적인 재정의
5장. 탄식의 훈련
1) 깨어진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말
- 심각하게 깨어진 세상에서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전략이 아니라 기도다. 화해의 여정은 말 그대로 속도를 늦추고 이세상의 참상을 정직하게 보고 대면하라는 요청에서 시작된다.(중략) 탄식은 절망이 아니며 애처로운 흐느낌도 아니다. 허무로 끝나는 절규도 아니다.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이 세상 깊은 상처의 진실을 알고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희생의 대가를 깨달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이다. 세상의 현실 때문에 깊이 상심한 사람들의 기도다.
역사 :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에 대하여 기록한 것 즉 역사 서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행하고 경험한 것 즉 역사 과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
* 역사 서술과 역사 과정이 불일치 하게 되는 두가지 이유
1) 사료의 문제 : 연구 대상인 소재와 과거를 직접 접하거나 재연할 수 없다. 여러 사료들 중에는 허위 문서와 위조 문서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역사가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 역사는 새롭게 발견되었거나 새롭게 해석된 사료를 토대로 기존의 견해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역사는 비판적인 정신 구조를 요구한다.
2) 역사가 자신의 문제 : 역사가가 기술하는 역사는 그의 가치관, 관점, 세계관에 의해서 구성되기에 자신이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속에서 자신의 판단력이 활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중립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무의식적인 전제들을 피할 수 없다. 역사가 자신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역사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 역사의 개연성
* 역사의 사실성
* 역사철학
1) 순환 사관 : 오리엔트와 고대 세계 모두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남, 자연계에서 계절이 순환하는 것으로부터 유추하여 역사도 순환 유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니체, 토인비)
2) 유대-기독교 역사관(직선 사관) : 역사 과정은 특별한 시점 즉 창조에서 시작되어 섭리적인 인도를 따라 그 마지막 목표점까지 계속된다.(피오레의 요하임, 라인홀드 니버, 허버트 버터필드)
3) 진보 사관 : 기독교적 유형의 일직선은 유지되었으나 신학의 이론적 근거는 거부되고 신 대신에 인간을 역사의 유일한 행위자로 본다.(콩도르세, 콩트, 플룸, 시드니 폴라드)
4) 역사주의 사관 : 역사가 일직선적이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그 중심 동기는 개별 국가가 독특한 문화를 향유한다는 사상이다. 이 유형에 따르면 역사는 다양한 문화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비코, 헤르더, 랑케, 콜링우드)
5) 마르크스주의 사관 : 인간이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역사 과정이 창출된다는 신념이다.(마르크스, 헤겔, 크리스토퍼 힐, 톰슨)
기독교 역사관의 세가지 요소
1) 하나님의 개입
2) 일직선론
3) 종말론
천국과 제국 :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의 번영(교회의 운명과 제국의 운명을 연관)
but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역사 개입 사이에는 정확한 상관관계가 없다.
어거시틴의 7시대론(하나님의 도성 마지막 장)
1) 아담으로부터 홍수기
2) 아브라함까지
3) 다윗까지
4) 바벨론 포로기까지
5) 성육신까지의 시기
6) 투쟁하는 교회의 시기
7) 엿새 동안의 창조후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던 것처럼 교회를 위한 안식기
진보사상
- 특징 : 직선적 유형, 미래에 대한 낙관론, 객관적 기준
기독교 역사관이 세속화된 결과로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서 진보사상이 생겨났다.
과학혁명으로 인한 산업혁명,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사상이 힘을 얻었다.
- 뉴턴의 경험론과 로크의 감각주의, 이어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통해서 자연 선택이 개체의 유익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모든 육체적 정신적 자질은 완전을 향하여 진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 진보의 기준 : 인간의 행복, 합리성
역사주의
-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역사주의
- 모든 문화가는역사에 의해서 형성된다. 특수한 가치관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근거로 민족을 강조
-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했다. 이에 역사주의자들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물질생활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역사적 행위이다. 생산 양식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시대 구분론과 혁명-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등 생산양식에 따른 인류사의 계기적(繼起的) 단계로서의 4시대구분론)
- 변증법적 유물론 : 다윈은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발견, 마르크스는 역사라는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계급 투쟁을 발견했다.
- 헤겔의 영향(정반합),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당신이 여행을 계속하여 그 여행의 끝에, 내가 “당신은 왜 지금 여기 있는가?”라고 물으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오고 싶었기 때문에” 또는 “기차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이 모든 대답은 아마 동시에 그리고 서로 다른 차원에서 진실일 것이다.
-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듥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이 내용은 마틴 로이드 존스가 당시의 복음에 대한 변질과 왜곡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1971년 IFES 컨퍼런스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이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서 자신이 염려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복음주의의 참된 본질을 제시하면서 복음주의의 토대를 다시한번 강조한다.
1강 염려하는 이유
(유 1:1-3, 개정)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본문에서 유다는 믿음 전체가 공격 당하고 훼손당하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진리와 교리의 특정부분을 말하는 것이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며 믿음의 뿌리로, 근원을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주의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이유
과거의 역사 곧 오랜 세월을 걸쳐 내려온 교회의 역사가, 교회의 삶에 고정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제도는 상반된 제도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 루터교-루터교 스콜라주의 / 개혁주의-주지주의 / 시작이 바르다고 해서 그후로도 계속 바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 19세기 고등비평운동(좀과 동록)-변화는 은밀하게, 하지만 치명적으로 진행된다.
기독교의 진리가 영광스러운 이유는 많은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에 속해있기 때문에 주변부의 사소해 보이는 변화라도 그 영향이 곧 중심부까지 파급된다.(23)
잘못된 구분에 따르는 위험
복음주의를 지나치게 좁고 엄격하고 상세하게 정의할때 교회의 분열로 이어진다.
고전 12장에서 그들은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다름때문에 갈라졌다. 설교자에 대한 선호(바울, 아볼로, 게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 영적 은사에 관한 문제 / 분열은 신앙의 중심 교리에는 일치하면서도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문제들로 서로 나눠져 다투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지나치게 넓고 개방적이고 느슨하게 정의하려는 시도
교회일치(에큐메니컬) 운동의 시대 /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가능한 모든 대상들과 협력함, 미묘한 변화가 발생) / 칼 바르트, 말콜 머거리지, C. S. 루이스 이들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은사체험 운동의 위험성
자유주의자들도 교회 일치 운동에 반대하는 한가지 목적에 일치하여 복음주의자와 손을 잡으려고 한다. 나와 같이 적과 싸운다고 해서 상대방이 모두 내편인 것은 아니다.
2강 복음주의자들의 특징
복음을 보존함 : 믿음을 정의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역사에서 배움 : 역사를 무시해서도 역사에 노예가 되어서도 안된다.
부정적인 점들을 견지함 : 갈라디아인들은 복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할례를 덧붙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추가시켰다.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아야 : 목회자가 복음적인지 아닌지는 그가 설교시간에 무엇을 전하지 않는가를 보면 된다. 잘못된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문제는 해야할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한 권의 책에 속한 사람’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다.
이성을 신뢰하지 않음. 철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신뢰하며 철학자는 모든 진리를 포괄하려고 한다. 이성과 학문, 철학을 제 위치에 두라.
이성의 위치 : 이성은 우리가 믿는 내용을 결정해서는 안되고 이성의 할 일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에 복종하지 않고 과학과 철학과 그 밖의 다른 학문을 의존할 때 문제가 생긴다.
복음주의자들은 성례에 관해 특별한(낮은) 견해를 취하고 역사와 전승을 비평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복음주의자는 연속성의 원리가 아니라 불연속성의 원리를 믿는다.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복음주의자는 항상 모든 것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둔다.
최상의 관심사들
중생을 대단히 강조 : 기도모임과 거룩한 삶의 방식
부흥에 대한 관심
설교에 우선권
전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
3강. 복음주의의 토대
우리는 과거에 물려받은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단순히 맹목적으로 채택하고 동의하고 계속해서 변호하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 진술들이 우리 시대와 우리 세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입증해내야 한다.
성경에 관한 교리 : 성경은 최고의 권위일뿐 아니라 유일한 권위이다. 성경의 계시는 전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같은 방식으로 영감은 전적으로 성령의 통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성경이 명제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 초자연적 요소가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문자적 진실성과 역사성을 믿어야 한다. 성경 전체를 믿어야 한다.
우리의 입장과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과학적 선언들 위에 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가? 과학적 선언들은 가변적이고 항상 움직인다.
첫사람의 역사적 타락 사실, 대홍수의 사실성을 강조해야 한다. 마귀와 그에게 속한 영들의 존재를 믿는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어있고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
속죄의 대속적 측면과 요소, 대리 형벌을 특별히 강조해야 한다.
교리와 성례의 순수성, 권징을 믿어야 한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사효성(성례 자체와 그것의 자동적 효능)을 믿지 않는다.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서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는 것들이다. 많이 깨달았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우리의 여러가지 현실적 한계와 죄성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선택과 예정 또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본질적인 범주에 넣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세례받을 수 있는 연령과 세례를 집례하는 방식을 비본질적인 것들의 범주에 넣었다. 교회 정치의 문제도 비본질적인 것이다. 예언에 대한 해석 문제(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도 비본질적인 것이다. 성화의 방식에 대한 신조들, 성령 세례와 카리스카타(영적 은사)의 문제
이 강의의 목적은 복음을 수호하고 복음주의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영혼 구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기독교 교회가 널리 퍼져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신앙은 최근에 개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오래된 것, 사도와 모든 경건한 스승이 우리 앞서 가르쳤던 것들을 다시 가르치고 확립하는 것이다.(루터)"
복음주의적 신앙은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으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적 신앙은 근본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인간의 생각 : 반지성주의-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성경의 성격 : 문자주의-다양한 방식의 해석 인정
성경의 영감 : 기계적 영감-이중 저작설(유기적 영감)
성경의 해석 : 성경의 본문을 자신들에게 직접 적용 - 본문의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여 재상황화
에큐메니컬 운동 : 교회 연합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반대 - 분별력을 발휘
교회 : 분리주의적인 교회론 - 온전한 순결은 이 세상에서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
세상 : 세상으로부터 고립, 분리 - 구별되려고 노력, 세상에 침투
인종 : 인종적 분리주의 - 인종 평등
기독교 선교 : 선교와 전도가 동의어로 교회의 소명은 복음 선포 -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
그리스도인의 소망 : 미래에 대해 교조적인 입장 - 재림을 사모하지만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로 남음
복음주의의 분파와 신조
피터 바이어하우스 교수의 견해
신복음주의자 : 빌리 그래함을 포함한 이들, 최대한 협력
엄격한 근본주의자 : 분리주의적 태도, 타협을 불허
고백파 복음주의자 : 신앙고백과 현대의 교리적 오류를 거부
오순절주의자와 은사주의자
급진적 복음주의자 : 사회-정치적 헌신
에큐메니컬 복음주의자 : 교회 연합 운동에 참여
복음주의 핵심 진리에 대한 집중 연구(제임스 패커와 베빙턴)
제임스 패커(복음주의 영국 국교도의 정체성 문제)
4가지 일반적인 주장 : 복음주의는 실천적인 기독교, 순수한(순전한) 기독교, 연합하는 기독교, 이성적인 기독교
6가지 특수한 확신(복음주의의 근본 진리) :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하심, 성령의 주되심, 회심의 필요성, 전도의 우선성, 교제의 중요성
데이비드 베빙턴(영국의 복음주의)
주된 특징 : 회심주의(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확신), 행동주의(복음을 표현하고자 노력), 성경주의(성경을 특별히 여김), 십자가 중심주의(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조)
존 스토트
스토트는 위의 패커나 베빙턴의 주장속에서 핵심 진리와 주변 진리를 구분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적 진리(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말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며(십자가),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심(성령))와 인간의 경험을 구분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고전 15:1-5절을 통해서 복음은 기독론적이다. 성경적이다. 역사적이다. 신학적이다. 사도적이다. 개인적이다.
복음의 기원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 내용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 효능은 수사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며 성령에 의해 확증된다.
하팍스(단번에-칭의, 롬 6:10; 벧전 3:18)와 말론(더욱더-성화, 빌 1:9; 살전 4:1)
1장. 하나님의 계시
계시, 영감, 권위
계시
계시는 이제까지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객관적인 행동을 묘사한다.(고전 1:19021; 고전 2:7-10)
일반 계시 또는 자연 계시 : 대부분의 인류에게 자연을 통해 주어진 계시(피조물과 양심을 통해, 이세상의 합리성, 짜임새, 아름다움, 옳고 그름, 의무와 실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통해)
특별 계시 또는 초자연적 계시
점진적 계시(사 28:13; 히 1:1) : 구약의 제사 제도, 삼위일체 교리
인격적 계시(계시와 조명)
영감
영감이란 그분이 자신을 알리신 방법, 즉 적어도 특별계시에서 인간 저자들에게 말씀하신 방법을 말한다.
성경의 이중 저작권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말로서, 인간의 말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딤후 3:16, 2. 성경은 또한 인간의 말이다.(역사적 이야기, 문학적 스타일, 신학적 강조점, 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말이다.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릎꿇고 겸손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읽어야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말이기에 비평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 비평에는 본문 비평, 역사 비평, 문헌 비평, 편집 비평이 있다.
성경에 대한 경건한 접근
권위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권위를 가진다. 하지만 이 세상은 권위를 거부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교권, 전통을 통해 교회를 다스린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조명된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나 또는 교육받은 자들의 일치된 의견을 통해서, 영국 국교회의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성경, 전통, 이성의 삽겹줄을 통해서, 복음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해 그분의 교회를 다스리신다고 말한다.
교회가 역사적으로 성경에 복종해 온 이유는,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함께 속해 있다.
제자들의 삼중적인 독특성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직접 위임을 받은 것과 그분을 직접 목격한 경험과 그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특별한 영감에 있다.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의 견해에 속한 세 단어
명료성 : 구원을 위해 우리가 꼭 알고 믿고 지켜야 할 것들은 성경의 여러부분에서 분명히 설명되어 있고 또 열려져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충족성 : 성경이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충족하다.
무오성 :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온전히 참되고 믿을 만한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필사자의 실수와 해석자의 실수에 대해서 신적인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직 원문의 권위를 인정한다. 우리는 최초로 주어진 것과 바르게 해석된 것으로서의 성경의 전적인 권위를 인정한다.
2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 6:14
헬라어 ‘카우카스타이’는 ~을 자랑하다, 영광으로 삼다라는 의미아다. ‘카우케마’는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이다. 바울의 카우케마는 바로 십자가였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롬 5:8; 고전 15:3; 갈 1:4; 엡 1:7; 히 10:19-22; 벧전 3:18; 요일 4:10; 계 5:9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속량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분의 대속적 형벌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궁극적인 계시이며 결정적인 악의 정복이다.
칭의의 다섯가지 측면
칭의의 원천 :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칭의의 근거 :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5:9)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
칭의의 영역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갈 2:17)
칭의의 수단 : 믿음으로 밀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8; 5:1; 갈 2:16; 빌 3:9)
칭의의 열매 : 칭의는 선행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선행을 향한 것이다.(엡 2:8-10)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칭의와 성화의 다섯가지 근본적인 차이점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판결이고 성화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그분의 도덕적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성령의 중생케 하심과 내주하심을 통해 그들을 성화시키신다.
칭의는 즉각적이다. 하지만 성화는 점진적이다.
칭의는 완전하다. 하지만 성화는 불완전하다.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화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
일상적인 삶을 통한 제자도
십자가는 용서의 길일 뿐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을 것을 명하신ㄷ.”(본 회퍼, 나를 따르라)
우리의 선교와 메시지
기독교 교회는 선교로 부르심을 받았다. 세상을 위한 우리의 메시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있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자랑할 것인가 십자가를 자랑할 것인가?
3장. 성령의 사역
복음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여섯 단계
그리스도인의 시작
그리스도인의 시작에 대해 생각할 때 회심이 아니라 중생을 복음주의의 핵심으로 지적해야 한다.
신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신생은 갑작스러운 것이다. 신생이 반드시 의식적인 경험일 필요는 없다. 신생은 세례와 동일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확신
예수님의 사역은 공간에 제한을 받으셨고 외부적이었다면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를 보편화하셨고 내면화시키셨다.
성령의 내주는 놀라운 특권이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과 신악에서의 사역 사이에 가장 주된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확신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거룩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활동의 다섯 단계 : 1) 지성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신다.(Discern), 2) 의식의 측면에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게 하신다.(Distinguish), 3) 하나님의 뜻을 향해 불타는 소원을 갖게 하신다.(Disire), 4) 하나님의 듯을 따를 것을 결단하게 하신다.(Determine), 5) 행함이 이루어지게 하신다.(Do)
성령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의 차이를 인정한다. 교회의 순결을 하나님이 정하신 합당한 목표로 여긴다. 우리는 '포용성의 원칙'을 지지하면서 ‘비원칙적인 혼합주의’를 거부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태(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누구도 성령을) 자신에게만 가두어 둘 수 없다. 성령은 계신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나가신다. 흘러나감이 없다면 그분이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이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필수적인 표지는 그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를 향한 열정적인 전도와 세계 선교를 향한 진지한 헌신이다.
전도와 사회활동의 문제, 전도와 기적의 문제, 전도와 부흥의 문제
그리스도인의 소망
성령의 선물은 상업적(계약금), 농업적(첫 추수), 사회적(전채 요리)와 같다. 성령은 선물인 동시에 약속이 되시고, 최초의 경험인 동시에 미래의 소망이 되신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서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기달려야 한다.
신생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한 것이며, 거룩은 성령의 열매이고, 교회는 성령의 교제이며, 그리스도인의 선교의 동력은 성령으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추리의 최후 상속을 위한 최초의 보증금이 되신 성령의 선물로 인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을 인정한다.
결론 : 복음주의 신앙의 도전
복음주의적 온전함을 향한 부르심
즉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공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우리가 행하는 것 사이에 우리의 말과 우리의 존재적 상태 사이에, 결코 이중성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근본적인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복음주의적 안정성을 향한 부르심
안정성의 주된 기초는 거룩한 성경, 복음주의적 진리라는 바위이다.
복음주의적 진리를 향한 부르심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해야 한다.
복음주의적 연합을 향한 부르심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권위에 순복하고자 하는 열정이 동일하게 강렬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경우, 우리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명시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아디아포라에 해당되는 12가지 항목 : 서례, 성만찬, 교회의 정치 기관, 예배, 은사들, 여성도들, 교회 연합운동, 구약의 예언들, 성화, 국가, 선교, 종말론
일차적인 진리들은 특별히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정의된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관계된 진리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성경의 탁월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만 가능한 죄인의 칭의, 그리고 성령의 필수불가결한 사역등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우선적 진리에서의 연합과 이차적인 문제에서의 자유를 사랑안에서 추구한다.. “진리에서는 연합을, 의심스러운 문제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경우에 사랑을”(루퍼트 멜데니스)
복음주의적 인내를 향한 부르심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삶속에는 반드시 대적들이 존재한다.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가운데 인내가 요구되어진다.
후기 ; 겸손의 탁월함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장 으뜸가는 신조들은 바르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필연적으로 겸손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복음주의적 확신들은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인간의 헛된 영광을 무너뜨리게 되어 있다.
존 스토트는 계시(revelation), 구속(redemption), 중생(regeneration)을 주장하면서 계시는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중생은 성령에게 연관시켰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효력 그리고 성령의 필수 불가결한 사역을 증거하기를 원했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구현하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특히 목회자나 기독교의 리더들은 성서의 메시지(텍스트)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컨텍스트)과 연결시켜 해석해 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 역사는 기독교의 교리의 형성과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초대교회를 통해 한국 교회를 고민하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결코 그 시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순간도 현실교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 초대교회의 기록들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도전들 앞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교회사를 신학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게 되면 한계가 있고 또한 교회사의 시대구분이 다분히 서구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인식과 의식의 지평 확대
역사 서술에서 객관이란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객관은 사료를 다루고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1장. 교회의 시작점에 대한 논의-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
첫째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신앙고백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오늘 교회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다.
가톨릭 교회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예수 탄생의 날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 그래서 사제가 행하는 성찬이 중요하다. 화체설이란 사제가 성찬식에서 성체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술취한 사제를 가장 두려워했던 포도주 생산 농민들) 이런 논리의 결과로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베푸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가 깨뜨린 것이 바로 이 논리인데 구원이 교회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교회를 중시했고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겼다.
자유주의 - 인간 예수와 교조화된 그리스도
이들의 기본 입장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최소한 예수를 도덕선생, 율법학자 혹은 선지자로 긍정적으로 그렸다. 20세기 초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했다. 현대화된 예수가 아닌 1세기 당시의 실제 예수를 찾아가려는 시도로 우리가 성서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한 인물일 것으로 보았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미지 혹은 종교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회의 출발은 유대교와 그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된 1세기말에서 2세기 초 정도로 본다.
복음주의 - 예수 승천후 이루어진 교회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를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사두개파 혹은 바리새파처럼 유대교 내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알려졌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죄의 해결을 위해서 유대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린다. 예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구약에서 지시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다. 이제 이땅에 교회를 두심으로 천상사역과 연결점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볼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이 함께 함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이를 깨닫지 못하여 다 도망갔었다. 하니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등장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주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시작이다.
2장.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구약의 세계에서 초대교회의 세계로
신약의 역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를 서술할 때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구약 시대와 신-구약 중간사 시대, 그리고 에수 탄생 시점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초대 기독교외의 역사를 공부하는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 중간사 시대는 인도의 석가모니(기원전 624년경)부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플라톤(기원전 429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와 중국의 공자(기원전 551년), 맹자(기원전 372년)등에 이르는 세계사의 성현들이 탄생한 시기이디고 하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기원전 586년)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서 귀환한 유대인들을 통해 성벽과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 중간기의 시기는 열방들 속에서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시기이고 결국 유대 역사가 끝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드로스의 통치를 거쳐서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의 통치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마카비 왕조의 유대 민족 운동이 일어난다. 이후 기원전 63년에는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100여년후 멸망하게 된다.
구약의 주요 활동배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던 우르와 페르시아만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약의 초대교회는 이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지 않고 유럽으로 서진했다. 왜 성령께서는 바울을 구약의 문화권이 아닌 새로운 문화권으로 부르셨을까? 그리고 그 성장을 촉발시킨 배경은 무엇인가?
중간사 시대 - 동서양의 만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동진하여 페르시아와 일전을 치르면서 동방지역의 헬라화를 성취하였다. 이 시기가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을 이룬 첫 시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오면서 헬라화의 압박(헬라문화와 헬라어 사용 강요)이 심해진다. 이에 항거해 마카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같은 중간기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세분화되면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이후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63년경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주류인 헬레니즘과 소수에 불과하던 헤브리이즘이 만나게 되었고 이 과정이 복음의 수용을 가능케한 토양의 준비인 것이다.
헬레니즘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확산 지역이 구약과 예수의 활동범위를 훌쩍 넘어선 전혀 다른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당시 예배때는 전통 히브리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구사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들은 헬라 문화속에서 유대 문화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문화충돌은 불가피했다. 헬라문화는 문화족 인종주의(타자를 전통, 문화, 종교, 언어, 역사적인 기준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였다면 유대인들은 혈통적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화되기 쉬웠던 반면, 헬라인들이 유대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칠십인 역, 기독교 확산의 언어적 토대
성서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통해서 종교적 일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70인역’ 성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칠십인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별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칠십인역은 헬라 문화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헬라의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헬라인들이 이를 통해 유대 신앙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불리웠다.
상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에수와 그 열두 제자들이 구약의 세계를 벗어나 신약의 세계인 헬라 문화권인 지중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기 전부터 흩어진 유대인들과 칠십인역을 통해서 사전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에 유대 사상 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에도 정통한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서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세계의 범주를 넘어선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큰 그림속에서 로마를 바라본 것이다.
로마와 초대교회
로마는 인근을 정복하면 조약을 체결하여 해당 국가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두고 단지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로마의 법과 행정,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로마가 이런 간접 지배를 기본적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이유는 당시 이미 헬라 문화가 전 지역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예배를 드렸다. 중세교회가 라틴 문화권이라면 초대교회는 헬라 문화권이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 메시야 사상에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와 로마 문화의 토양위에서 확산시켜 나갔다. 그 복음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헬라 철학과 로마법의 영향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복음의 완성과 확산을 위해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됨으로 기독교가 퍼져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졌다. 이러한 준비가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의 전파는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3장.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 유대교와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 분화의 흐름
칠십인역으로 인해 기독교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서 동시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종교로서 유대교가 기독교에 우선권 혹은 정통성은 넘겨주게 되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유대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 즉 구원의 역사를 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대민족의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의 배타성이 가려 놓은 신의 존재와 신에 관한 인식에 존재하던 차별의 장막을 거두어 해방시켰다.
종교라는 관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예언자적 전통, 경전의 존재, 창조와 타락, 종말론의 관념등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 그리고 이후에 미쉬나라고 하는 유대의 재판 기록과 그것을 해석한 탈무드 등의 율법 해석서들을 주요 경전으로 신봉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신봉하며,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주의의 형성과 발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관통하여 기원후 70년, 즉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까지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귀환한 이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그들이 정통으로 서게 되었다. 이들을 귀환 이후 제2성전을 재건하고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의 혼합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특하게 정형화된 형태의 종교를 확립해 나갔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화를 강요하였고 독립한 유대는 업격한 유대주의를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깊은 골과 상처가 생겼다. 초기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등의 분파가 있었지만 기원후 70년의 유대전쟁과 그 후의 박해를 거치면서 유대주의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시점을 랍비 유대교의 출현으로 보는데 이들의 특징은 책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전들이 집대성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기보다는 유대교 여러 종파중의 하나였다. 유대교로 발전하는 바리새파와 정체성을 달리하던 나사렛파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행 24장이나 28장을 보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역초기 자신이 가는 도시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다. 이는 초대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이 학식있는 유대인이있기에 무슨말을 하는지 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회당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자 결국 그를 배척하게 된다.
기독교, 유대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인인 헬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앞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 결과가 폐쇄주의와 배타성이었다. 유대교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면서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하였다. 기독교가 단순히 유대교의 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편 종교 혹은 세계 종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궁극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더불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점은 율법의 종교에서 약속의 종교로 나아간 것이다.
베드로는 선택받은 백성이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라고 가르친다. … 고등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중심성의 극복에 있다. 보편 종교가 되는 것은 그 시대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가능하다. 그 시대 속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할 때 성장하고 꽃을 피워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성장한 시기는 유대교의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 유대 인종, 유대혈통주의와 선민주의를 벗어나서 세계 시민주의를 외쳤을 때이다.
교회의 갱신- 자기 중심성의 극복
오늘 날 기독교가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바리새파 운동도 처음에는 헬라문화에서 오염된 유대인의 신앙을 개혁하는 개혁운동이었다. 하지만 바리새파운동이 그 역동성을 상실했을때 이데올로기로 박제화되어 수구적이고 폐쇄적이 된 것이다.
12세기의 스콜라학 - 13세기 대학의 모태가 됨 하지만 이 스콜라학은 16세기 스콜라주의로 이데올로기화 되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대상이 된다.
신앙의 본질, 삶의 본질에 천착하여 나온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다. 이런 신앙의 정화 운동이었던 바리새 운동이 역동성을 상실했을 때 조직으로 바뀌고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종교를 수용하는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가치는 교리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단순히 유대교가 메시야 예수를 부정했기 때문에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다. 보편적 가치, 신의 인간을 향한 본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유대교의 자멸을 낳은 것이었으며, 반면에 인간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기독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초기 기르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 혹은 헬라인과 유대인과 다른 제 3의 인종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정체성은 헬라인의 문명과 야만의 구분, 유대인의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인종의 벽, 계급의 벽, 문화의 벽, 성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경계를 세우고 나누는 이들이 아니라 넘어서는 이들이었다.
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페허 위에서 돌아보는 초대교회의 성장
초대교회는 그 성장기와 박해기가 중첩된다.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상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되었다.
교회, 대안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제시하다.
초대 교회는 당시 로마의 전통종교가 주지 못했던 것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고 둘째로 기독교회가 내세우고 실천한 인권과 평등사상이며 셋째로 로마인의 인식과 비교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내세관이다.
당시 노예나 하인, 여성이나 아이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복음과 예수가 가르쳐준 인간관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로 치면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빌레몬서에서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주인에게 오네시모를 잘 맞아 줄 것을 바울은 권면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고 비난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앞서간 인식이요 행동이었다.(3세기 로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교황으로 선출)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때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여성을 위하고 보호하는 모습에 두번 놀랐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사상 속에서 역사란 동일한 과정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신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졌다. 이들은 역사란 신의 의지가 역사에 실현되며 역사는 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박해의 순간에 하늘나라의 복락을 고대하며 그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로마의 박해 이유와 양상들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기독교회 안에는 순교자들과 변증가들이 출현했다. 순교자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로마의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변증가들은 기독교 신앙의 편에 서서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서 외친 자들이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제로 이를 ‘피에타스’라 불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겼는데 이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풍습을 가졌다고 여겼으며 근친상간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오해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도리어 로마인들의 눈에는 무신론으로 여겨졌다.
박해 앞에서 순교자들의 의연한 죽음은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큰 용기를 주었다.(폴리갑)
박해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과제
박해로 인해 교회가 정화되고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는 배교한 자들을 교회가 다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말로 증거되기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보였다.
“순교자가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5장.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 교회
라틴 교회, 헬라 문명을 넘어서다.
라틴은 본래 이탈리아 남부 라티움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세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가 나왔다.
초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언어는 헬라어였다. 초대 교회의 발전에서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주교구 교회가 로마, 콘트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로마를 제외한 네지역이 동방이다.
북아프리카, 라틴 신학의 중심에 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의 이주 정책으로 아주 밑바닥부터 라틴 문화가 이식된 지역이다.
도나투스파 운동(경제적 분노와 종교적 열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 -라틴 교회의 빛과 그림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율법이 들어오게 된다. 서방 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회가 결정하여 수용한 전통도 궁극적 권위로 동등하게 인정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뿌리를 형성한 인물로 교회의 정의, 역할, 권위에 대해 다룰때에 철저하게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에서 주장을 이끌어냈다. 그는 라틴어로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남겼는데 이후 몬타누스 이단 운동에 빠져서 성인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로마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발전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지배자의 대중의 언어가 동일한 라틴어였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때 빠르게 문화화 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라틴화에는 두가지 작업이 수반되었는데 먼저는 헬라어로 정착된 신학 개념과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직 진화 단계에 있었던 신학을 라틴어를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증거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동방 신학은 헬라 철학의 바탕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서방신학은 로마법에 기대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속화(엄격한 금욕주의 주장)와 마르키온 주의(마니교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세례는 이 땅에서 살면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박해를 견디는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식을 넘어서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결단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고안하여 처음 사용하였다. 관계성의 층면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라틴 신학, 공로주의의 길을 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대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법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가 공로주의로 가는 카톨릭 신학의 길을 열었다.
6장.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 교회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동양에 관한 인식과 규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헬레니즘은 서구 역사의 뿌리가 아니다. 도리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와 같은 아시아권 문화와 융합했다.
이처럼 역사 해석에 있어서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텍스트 지상주의에 매몰되기 쉽다. 모든 신학이나 사상은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컨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무리하게 다른 컨텍스트에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견해를 기초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환원주의이다.
언어의 전환이 만들어 낸 다른 전통들
헬레니즘 철학과 헬라어라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유하던 문화의 틀이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사고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스테리온(mysterious)과 세크라멘툼(sacramentum) : 신비를 나타내는 헬라어와 라틴어. 신비와 비밀. 신비를 풀려고 해도 쉽사리 풀 수 없는 것. 신비스러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 반면, 비밀은 풀어 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등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 세크라멘툼은 군인이 훈련소에 들어가 선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민간인이 선서를 통해 군인으로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의 변화와 정체성을 법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결단이 내포된 법률적 자격이나 정체성의 변화로 받아들였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죄가 용서되며 성령이 임하는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탐구하며 그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교회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인 선포로 본다면,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가 더 깊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본다.
결혼이 완성되는 순간은? 성혼 선포, 예물교환, 혼인신고, 초야를 치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사의 언어에 대한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교회의 역할의 차이를 가져왔다. 서방 교회에서처럼 법률적 관점에서 성사를 규정하면 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서 교회가 정한 의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이 라틴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카톨릭의 체제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즉 교회가 정한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이러한 틀이 깨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성서를 번역하여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성서와 비교 편집함으로써 언어의 변환으로 인해 생긴 오류를 규명하였다.
동방 교회, 신비를 숙고하다.
일반적으로 헤브라이즘과 신본주의, 헬레니즘과 인본주의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데 사실 헤브라이즘은 철학체계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일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 : 이데아(천상)와 그 그림자인 현실세계 / 신플라톤주의(일자 개념)
서방과 동방의 차이 : 삼위일체, 구원에 대한 이해 / 서방은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면 동방은 신비를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성품을 설명할때 동방은 부정의 신학을 통해 신을 설명한다. 신의 성품을 규정하게 되면 신의 속성중 선함이란 무엇인지, 무한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규정해야 한다. 반면 동일한 내용도 부정문으로 표현하면 신의 진정한 성품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모나키(통치 혹은 시작, 원천 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차이(필리오케 논쟁-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라고 바꿀것을 주장) / 성화상에 대한 입장 차이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컨텍스트에서 사용할 때 다르게 이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근대 선교 운동이 일어났을때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를 하자 이미 토착화된 그리스 정교와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기성의 관념을 흔들 만한 낯설고 다른 것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들은 이렇게도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자세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에 댛해서 도그마를 앞세워 단죄하는 자세로는 신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있다. 물론 이런 포용은 자신이 위치해 있는 신학의 기반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 위에 안정되게 서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7장.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교회사 속에서의 이단의 역할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기독교를 정통 교회, 이단, 신비주의의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과거 그 시대에 있다가 사라져서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비고비마다 유사한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오늘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다.
이단이 무엇인가? 신학적 관점에서 주류 교회나 주류 신학이 가진 신학적 프레임에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보편성이 결여될 문제가 있다. 실천적-사회적 관점에서는 건강한 모습을 띠느냐이다. 그래서 교리적 독특성뿐 아니라 해당 집단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 자명할 때 이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단 - 신비와 논리 사이
정통과 이단의 관계 : 본래부터 정통이 존재했고 이단이 반기를 든것인가? 아니면 여러가지 견해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궁극적으로 이긴 것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
정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함축적인, 암묵적인 정통이었다. 이단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그 정통이 더 잘 설명될 필요가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통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교회사속에서 이단의 도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것을 확인하고 보존하고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교리화의 과정이었다.
1985년 예수 세미나(150명의 성서학자들이 참여) : 이들은 사복음서와 도마복음, 5개의 텍스트를 비교하여 이중에 예수의 진정한 말씀은 붉은 구슬, 정확히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것은 핑크 구슬, 예수의 사상 속에 들어 있었을 정도의 말씀을 첨가한 것이라고 보면 회색 구슬, 후대의 완전한 창장물이라고 판단되면 검은 구슬을 넣어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92%의 찬성으로 최고 득표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은 82%의 득표를 얻었다.(p. 185)
교회에 대해 제기되는 도전에 대해 반이성, 초월성, 신비성만을 강조하여 대응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초월과 신비라는 가치가 제거되는 순간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교회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 교회는 교회의 초월과 신비를 설명하는 교리적인 정밀함이 아닌, 교회다움의 본질로서 거룩을 보여줌으로써 대응해 나가야 한다.
마르키온파와 몬타누스파의 역사적 위치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했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는 율법과 은총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몬타누스파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 엄격한 신앙적 고행,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사라진 이유는 정경이 마련되고 교회 직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재세례파중에 폴란드 츠비카우의 예언자 조직은 독일의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뮌스터시를 점령하여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고 재림을 예언했다.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이 반대파를 암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등의 과격한 행동을 일삼자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이 뮌스터시를 전복시키고 재세례파를 흩어 버린다. 이후 메노 시몬스라는 지도자가 재세례파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당시 재세례파가 국가의 박해를 받은 주요 원인은 유아세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가교회는 해당 영토에 태어나는 자는 자연히 영아세례를 받음으로서 국가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교회란 누구나 다 태어나자마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다르게 정의한 것이다.
개혁 -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정통이 모두가 믿어야할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면 이단이나 이설은 내부의 정통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실상 사회와 제도 교회가 흘러가는 관성을 거스르는 급진적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 운동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반응
첫째, 교회는 정경을 정하였다.
둘째, 믿는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셋째, 교회의 직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제도화, 안정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이는 고착화라는 부수적인 문제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8장.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위치
초대교회의 종교개혁을 이어 주는 중세 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기를 암흑기로 볼 것인가 의미 있는 시기로 볼 것인가?
보통 수도원을 제도 교회와 비교하여 파라처치라고 표현한다. 이는 수도원 운동을 제도 교회, 주류 교회에 대한 주변부적인,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기성 교회 제도가 사회적 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종교성을 상실했을 때 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하는 역할을 감당했다.(영성과 운동성)
세속화를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
313년 콘스탄니누스의 기독교 공인,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교회 역사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기독교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예수를 믿을 때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안믿는 것이 차별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초기 수도원운동은 강력한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기번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종교로 도피한 불행한 삶”을 선택한 이들로, 부르크하르트는 “도피주의자들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세속화를 심각하게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로 평가했다.(당시의 세례 요한)
공동수도회 : 대중적인 운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든 개개인을 위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는 온정주의 차원에서 시작됨 / 사람들이 모이게 되며 모임의 규칙이 강화됨
독거수도회 : 종교적 엘리트를 추구
사막 교부들이 은거한 사막이란 지리적으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장소가 아니었다. 사막은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간 상징적인 장소였다.
은둔 수도사들의 정체성 : 첫째 수도사들은 대개 신학자가 아닌 영성가를 추구했다. 둘째 수도원 운동은 속인 중심의 운동이다.
서방의 수도원들
베테딕투스회의 회칙의 핵심은 순종과 겸손으로 그 핵심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시’, ‘자발적으로’, ‘불평하지 않고’이다.
수도회란 사람을 교육하는 곳이란 의미와 함께 교회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발대이자 정예부대 역할을 하는 엘리트, 종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수도회는 선교와 교육(학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학교가 고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한 것이 대학이다.
전반적으로 수도원에는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의 교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공인되고난후 교회가 부요해졌을때 반대 급부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세속을 떠나 복종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후 서유럽 기독교가 1200년경 최고의 번성기에 이르러 타락하기 시작했을때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여 초대교회처럼 사도적인 청빈을 추구하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당시 루터의 역할도 그러하다. 수도원은 재속 성직자의 규모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수도원이 역동적으로 활동했을 때는 작은 방향타가 거대한 항공모함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 되어 속박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쉼을 얻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섬겨줄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떼제, 라브리, 예수원)
개인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속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부딪치는 소외와 고독의 문제, 박탈감의 문제,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등은 개인의 역량과 역할로만 맡겨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치열하게 이러한 구조를 읽으며 대처해 나가지 못했을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요 5장. 베데스다 연못, 불치병자들을 위한 해결책은 일차적으로 물이 동할때 그들을 그 물에 넣어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베데스다 연못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구원도 개인구원으로 환원시키면 된다. 개인의 책임이고 믿음이 없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상을 제대로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필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야 한다.
수도원은 세상과의 분리, 현실 세계에 대한 무관심, 현실과의 유리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수도원은 한 시대에 바로 명상과 사색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기성교회에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9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하다.
초대교회는 국가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회의 세력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갈등이 불거졌다.
로마가 정복하여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신들을 인정해주면서 그것을 로마화시켜 로마 신화에 포함시켜나가면서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민족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사람의 전체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확장해 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로마에 위협으로 여겨졌고 믿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거나 성서를 압수하고 교회 지자들을 체포하거나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기독교 공인, 교회의 힘에 대한 로마의 인정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며 피정복지의 통치를 그 지역의 본래 지배층의 자율에 맡기고 세금만 걷어가는 방식이었다.
260년경 팔미라 왕국의 분봉왕이었던 제노비아 여왕은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 안디옥 감독으로 사모사타의 바울을 지명하였다. 교회의 감독이 지역의 총독을 맡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은 복잡한 로마의 정치적 지형속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주의 교회의 출발
기독교 공인은 교회에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지만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이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가 제국을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음을 보고 제국안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325년 티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계시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독교의 능력을 체험했고,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했지만 이후의 행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황제로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이교 축전에 참석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국가의 핍박에서 벗어났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이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이후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분열은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닌 교회론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재세례파는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재세례파의 사상은 위정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란 세상과 타협해서 특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라고 보았다.
프랑스에서 피의 혁명이 일어난것과 달리 영국에서 혁명이 없었던 이유는 웨슬리와 메소디스트의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타락하게 된다. (박정희 유신 개헌, 신국부 독재 시절의 교회)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10장.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 니케아 공의회
공의회, 제국 신학의 출발점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후 서방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도나투스파에 의해서, 동방교회는 아리우스파 이단의 출현으로 분열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아리우스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등장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소집은 교회가 아니라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이를 기록한 유세비우는 니케아 공의회를 대단히 큰 기독교의 승리, 박해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고 보았다.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 신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 황제가 제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역사가 학문적인 엄정함을 우구하기보다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배자에게 유리하도록 지배자의 관점과 입장에 함께 하고 뒷받침하도록 쓰여져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로 남아 있는 기록의 효용성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리우스파, 그 길고 긴 논쟁
아리우스는 예수를 이성본질, 즉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인가, 유사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로 나뉘었다. 이오타(i) 하나를 두고 벌어진 어리석은 논쟁 하나가 교회를 찢어 놓았다라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하였다. 유사본질을 강조할 경우 에수의 신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결정을 공의회에서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교회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했으며, 관여한 황제의 결정이 신앙에 기초한 확신이나 엄밀한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기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유세비우스는 이 결정이 정치적인 결정임을 간파하고 황제를 설득하여 아리우스를 복권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되면서 로마(라틴어권), 안디옥(헬라어권), 알렉산드리아(북아프리카), 콘스탄니노플과 예루살렘의 5대 교구체제가 이루어졌다. 동방의 4도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이 경쟁하다가 이슬람의 위협속에 약화되고만다. 8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란ㄴ 위조문서가 로마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니케아 공의회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아들중 둘은 니케아 공의회 결정은 지지하고 하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셋의 충돌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세력을 확보하며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힘을 얻게 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는 동안,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갈릴리인들이라고 비하하는 등의 차별을 가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속에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여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헬라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이교도의 도전에 대응하는 변증신학을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게 많은 핍박과 추방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성이 피폐해지지 않고 도 깊은 영성을 쌓았다.
동방 신학의 황금기
아타아시우스는 망명생활을 통해서 동방과 서방을 두루 경험하며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이어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방 교회 모두에 큰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엄정한 논리로서가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처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난을 통해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을 통해 아리우스파를 제압했고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드러난 세속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본질을 지키려는 수도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리우스파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이겨냈다.
서방신학은 스콜라학의 영향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를 학문의 형식을 따라 이론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라면 동방신학은 ‘신학은 삶’이라는 핵심명제를 따랐다.
루터는 신학자를 만드는 세가지 조건을 첫째는 기도, 둘째는 말씀과 묵상, 셋째는 시험 혹은 고난이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교회에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난속에서 투사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
11장.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역사적인 관점에서 주요 신학이 규정되는 역사는 뒤집어 표현하면 교회의 분화, 분열의 역사이다.
나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계기는 ‘얘수와 하나님이 동등하지 않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세가지 사상을 단죄했다.
첫째로 아몰리나리우스주의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개의 완벽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성서의 어려운 부분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유대교 전통, 즉 유대교의 문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를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을 결합으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리우스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서로 분리함으로 통일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반박이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입지가 강화된 데 따른 불안감으로 인해 제기된 정치적인 성격의 주장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안의 논쟁을 세속 군주에게 들고 나아가 결정을 부탁한,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이단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배척당한 이들로 동방선교에 기여했다.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
칼케돈 공의회는 500여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역대 규모의 공의회로 황제가 소집했다.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분이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타나난다."
이 칼케돈 회의는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하는 부정의 신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공의회가 남긴 유산
교회 공의회의 긍정적인 기여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으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특정하게 정의하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집단들이 떨어져나가게 되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분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2장.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초대교회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시기의 중요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 인식 혹은 역사철학을 정립하여 신의 도성이라는 관념을 제기했기에 주목받는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어 당시 지중해와 소아시아 세계의 주류가되었다. 하지만 소위 정통신학은 당시 세상이 맞닥뜨린 로마의 멸망이란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돌이 양편에서 제기하는 의문앞에서 어떠한 해답도, 영향력도 주지 못했다.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것이 교회의 나아갈 길인지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이 부족했다. 프랑스 혁명, 유럽의 1차 세계대전, 나치의 독일 교회의 예속에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이 지적 여정
아우그스티누스이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이교도였다. 그는 타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이때를 아주 방탕하게 지냈던 때라고 참회록에서 회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했고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다.
그는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 즉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과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결정적으로 ‘톨레레게 톨레레게’(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회심하였다. 이후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 이 삼부작은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공인이후 기독교가 맞닥뜨린 내적인 병폐들과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교회 외적인 문제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이 잘못 적용되어서 모든 문제를 넘어가고 덮어주는 신학적인 문제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낳았다고 보아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았다.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하여 주주 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들을 강조하였다. 반(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간의 원죄와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수용했다.
이러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재현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자신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썼다. 루터는 이를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종교개혁을 루터의 관점이 아니라 에라스무스나 재세례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의식
로마의 멸망은 ‘어떻게 신의 택함을 받은 로마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낳았다. 그는 ‘신국론’을 통해서 제국을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제국 너머의 신국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헬라의 역사관은 순환사관이었다면 히브리의 역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조로부터 완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이 이끌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중요성은 바로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과정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신의 뜻과 목적을 헤아릴 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반대로 천국을 향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추구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이 땅의 부정과 불의, 제도적 구조적 모순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삶을 추구하게 했다.
이후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신의 의지에서 인간 이성(헤겔)으로 대체되었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신의 뜻에 맡겨 버리는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자 적극적인 해석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You are what you love: Why everybody worships something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가장 적절한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원하고 욕망하고 그것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왜 생각과 원함이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이 습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사랑을 미덕(virtue)라고 하고 미덕은 좋은 도덕적 습관이다. 미덕과 도덕법은 다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미덕과 법은 반비례 관계가 있다. 덕스러운 사람은 외적 법이 덜 필요한 반면 악한 사람은 법이 더 필요하다. 아이가 어릴때 법과 외부적 규올로 훈련시키는데 이것의 목적은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선에 대한 감각을 내면화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라면 나는 어떻게 사랑을 배우는가? 고대 철학자와 인지과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습득한 습관이 우리 의식 아래에 형성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의 첫 번째 지향은 이지적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우리가 습관으로 주입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행동 양식을 형성한다. 우리의 사랑과 원함(want, desire)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유인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비전을 형성한다. 원하고 사랑하는 ‘습관’은 무의식에 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습득하는 습관이 무의식일 뿐만 아니라 습관을 의식하는 과정도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당신의 습관들뿐만 아니라 습관화되는 과정 자체가 무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굶주린 마음은 무엇인가 예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은 곧 우리 자신을 무엇인가에 내어 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의 습관은 우리가 자신을 내어주는 의식과 행동, 일상에 의해 형성, 조준, 습득된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을 헌신한다.(devoting) 당신이 헌신하는 바로 그것 또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실천과 루틴은 예전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예전은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하는 실천들이다. 예전들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은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지루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 안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논리적 사고의 결과로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무의식적인 동기로 소비한다.(예 : 아이폰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을때 인터페이스를 통해 바라보는 내용자체가 아니라 이 아이폰과 관계하고 작동하는 관계 양상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할지 예배할지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많은 예전들은 사실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한다.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물건들(물질, 우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강요한다. 400년 전에 파스칼은 말했다.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의 불행은 오직 한 가지로부터 발생하는데, 그가 한 방에서 조용히 머무를 능력이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지루함은 궁극적인 것을 직면하기 때문에 분주함을 향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기독교 예전들은 인간의 망가진 상황에 정직하다. 생각한 것과 추구하는 것의 괴리에 대해 정직하다. 기독교의 참회, 고백의 예전은 나를 야단치는게 아니라 나를 용납하는 창조주 앞에 정직해질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면에서 은혜가 핵심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
만약 기독교가 진리이고 어거스틴이 옳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미친 듯 찾지만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 절망 가운데 있지만,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시도들 뒤에 우리는 누군가의 메아리를 듣는다.
결국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의 세계관의 패러다임, 지성의 전통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전통이라기 보다는 저자는 어거스틴이 제시한 전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해아래 새 것은 없고, 과거의 전통속에 이 시대를 새롭게할 무언가를 찾아내야한다고 말한다.
호당 선생… 이름부터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런데 어이없게 호당의 의미가 '단것을 좋아하는' 이란다.
본 책에서 저자는 설거지, 잠, 똥, 휴대전화… 운전, 죽음, 식사등의 일상생활에 밀접한 주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이 책의 독특함은 다른 일상 영성을 다루는 책들은 각 주제에 대한 여러가지 학적인 혹은 경험등을 다루는데에 반해서 이 책은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이 주제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마치 저자가 자신의 지적여정을 다루면서 젊은 시절 무협소설에 빠졌었던 경험을 이야기했었는데 일상의 모든 주제들이 호당선생과 관련된 여러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속에서 이야기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각 주제에 대해 깊이 다루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모든 주제에 걸쳐서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이 드러나는 삶의 현장임을 저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바로 그거다! 지금 우리는 자기가 무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니 잠은 경성을 멈추고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맡기겠다는 믿음의 표현인 것이지.”(잠, p.29)
“예언자 스가랴는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경이라 기록될 것이라’(슥 14:20)고 말했단다.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를 타듯 옛 사람들이 말을 탔다고 생각해 보거라. 말방울이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 차가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자동차 경적 역할이었겠지. 본디 제사장의 의복에만 새겨지는 문구인 ‘여호와께 성결’이 말방울에 기록된다는 것은 가장 거룩하기 힘든 운전석이 거룩한 성소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단다.”(운전, pp.202-3)
적정 기술의 정의는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필요 및 문화와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얼마전 지구의 6개의 대륙에 위치한 전파 망원경을 이용해 태양의 65억배에 해당하는 블랙홀의 존재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이 기술을 첨단과학의 영역으로 실제 우리의 삶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래 사진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 하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고 그 과정에 육체적인 고됨과 운반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물이 많았는데 드럼통 모양을 굴리면서 놀이하듯 물을 운반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확보된 시간으로 아이들이 더 많이 학교에 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적정한 기술이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혜신 님의 “당신이 옳다”에서는 적정 심리학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그 적정 심리학의 내용은 바로 공감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 공감, 바로 당신이 옳다라는 이 자세야 말로 전문적인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적인 기술이 없다고 하더라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당신이 옳다라는 자세가 상대방에 행한 행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상대방의 상태속에서 그의 감정에 대해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인정해줄때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온 체중을 실어 공감을 할 것을 요청합니다. 입에 발린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로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때 상대방은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공감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기술이 반영(Mirroring) 입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한 그대로 축소하거나 과장,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대화에서 반영하는 기술을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전에 나의 머리속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비해서 말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상대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공감해줄때 그것이 바로 정혜신 님이 말하는 '당신이 옳다’라는 메시지이고 적정 심리학입니다.
이 시대 고통당하는 이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그들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당신이 옳다’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