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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w may bthe God of peace himself csanctify you completely, and may your dwhole e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f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24 gHe who calls you is faithful; hhe will surely do it.
b See Rom. 15:33
c Ex. 31:13; John 17:17
d 2 Pet. 3:14; Jude 1
e Luke 1:46, 47; Heb. 4:12; [1 Cor. 14:14]
f See ch. 2:19
g See 1 Cor. 1:9
h [Phil. 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23–24.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1) 또는 목숨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23–24.
 
23-24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계속되는 바울의 중보기도이다. 
앞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전반부를 마치면서 첫번째 중보기도(3:9-13)을 드렸다. 이제 본 서신의 후반부(4:1-5:24)을 마치면서 다시금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23절) 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은 ‘평강의 하나님’이며 바울은 두가지를 간구하고 있다. 첫번째는 ‘거룩하게 하시고’, 두번째는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이다. 
‘평강’이라는 의미인 ‘에이레네’는 혼돈, 염려, 두려움, 무질서, 싸움이 없는 완전한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여러 성품중 매우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평강의 상태의 원형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완전한 교제를 나누었을 때 가능했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이 평강한 상태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이는 영혼 깊은 곳에 두려움과 불안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 있는, 채워져야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평강의 부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막힌 담을 허심으로 평화, 평강을 다시금 이루셨다.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고는 ‘하기아사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의 원형은 ‘하기아조’로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구별’과 ‘성별’의 개념을 강조하는 동사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악으로부터 구별하여 성화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성화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 4:3)으로 완전한 성화는 구원의 궁극적 지향점이다.(갈 1:4; 엡 1:4-5; 벧전 2:24) 
본문에 온전히로 번역된 ‘홀로텔레이스’는 이곳에 단 한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전체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거룩하게 하시된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완벽하게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ἁγιάζω (hagiazō), 동사.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미래 능동태. ἁγιά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ἡγίασα; 완료 능동태. ἡγίακα; 부정과거 능동태. ἡγιάσθη; 완료 중간태. ἡγίασται. 히브리어 등가: קדשׁ (81).
동사 용법
1. 거룩하게 되다 —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구별, 헌신되거나 도덕적 순결함을 가지다. 관련 주제: 개혁하다; 경외; 거룩함; 정결; 성화하다; 청결한; 바치다; 성화되다; 제의적 거룩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칙; 성화.
요 17:19 ἵνα ὦσιν καὶ αὐτοὶ ἡγιασμένοι ἐν ἀληθείᾳ.
고전 7:14 ἡγίασται γὰρ ὁ ἀνὴρ ὁ ἄπιστος ἐν
딤전 4:5 ἁγιάζεται γὰρ διὰ λόγου θεοῦ καὶ ἐντεύξεως.
히 2:11 ἁγιάζων καὶ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
히 10:10 ἐν ᾧ θελήματι ἡγιασμένοι ἐσμὲν διὰ τῆς
2. 거룩하다 — 하나님께 봉헌되게 하다, 더 구별, 헌신하거나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되어. 관련 주제: 개혁하다; 경외; 거룩함; 정결; 성화하다; 청결한; 바치다; 성화되다; 제의적 거룩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칙; 성화.
요 17:17 ἁγίασον αὐτοὺς ἐν τῇ ἀληθείᾳ·
엡 5:26 ἵνα αὐτὴν ἁγιάσῃ καθαρίσας τῷ λουτρῷ τοῦ
살전 5:23 Αὐτὸς δὲ 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ἁγιάσαι
히 2:11 ἁγιάζων καὶ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
벧전 3:15 κύριον δὲ τὸν Χριστὸν ἁγιάσατε ἐν ταῖς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신학에서 인간을 구분하는데 삼분설과 이분설의 주장이 극렬하게 대치된다. 본문은 인간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중요 구절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본절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었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의 전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간구하는 표현이다.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는 ‘성령, 영, 영혼, 심령, 생기, 바람, 마음, 귀신’등으로 다양하게 378번이나 사용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실체로 영이란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롬 8:16) 본문에서 ‘프뉴마’는 구원받은 인간의 심령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흠없이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은 ‘프쉬케’로 신약에서 102번 이는 ‘목숨, 영혼, 생명, 사람’으로 사용되었다. ‘프뉴마’가 사람 외부의 영적 존재를 나타낼 때 쓰인것과 달리 ‘프쉬케’는 항상 사람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능이 강조되었다면 혼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31:25; 벧전 2:11) 즉 ‘프쉬케’는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정신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다. 
 
‘몸’은 ‘소마’로 142번 ‘인간의 몸, 육체, 시체’를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소마’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영혼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영혼이 떠난 ‘소마’는 단지 ‘시체’에 불과하다.(유 1:9) 영혼이 떠난 육체가 시체에 불과한 것처럼, 육체를 떠난 영혼 또한 온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 성도로 하여금 흠없게 보전되도록 하시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흠없게’로 번역된 ‘아멤프토스’는 물질의 표면에 흠집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 책망할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2:10) 혹자들은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사람의 신체가 흠있는 상태로 죽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부활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몸이 불에 탔든, 야수에게 찢겼든, 완전히 썩었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다시는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키신다.(고전 15:42-44, 52-54) 여기서 바울은 성도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책망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두가지 간구는 한가지로 성도의 삶이 하나님앞에서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테레데이에’러 원형은 ‘테레오’로 ‘지키다, 보전하다, 간직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특정한 상태, 위치, 행위를 유지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흠이 없는 상태로 유지할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이것이 인간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이루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Paul’s first wish for his readers is for God to ἁγιάσαι ὑμᾶς ὁλοτελεῖς (“sanctify you completely”). The sanctification of the Thessalonians was already the last main theme in the earlier wish-prayer of 3:11–13, which, when taken with the present wish-prayer, thus forms a bracket around the parenetic material in 4:1–5:22, which has as one of its principal goals that of aiding the Thessalonians in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In fact the thought of v. 23 is clearly modeled on 3:13. 5:23 recognizes that only God can bring about complete sanctification (with Frame, 210 I understand the predicate adjective ὁλοτελεῖς, which I have translated as though it were an adverb, quantitatively not qualitatively). This is God’s will for the Thessalonians according to 4:3, but as this text suggests they are involved in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by virtue of what they do or do not do. For this reason we must interpret the aorist optative ἁγιάσαι as embracing the whole process. Aorists used this way are common in prayers (see BDF §337.4). The living of sanctified or holy lives is directed toward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day of God’s judgment when believers will stand before God (3:13).
The second wish of the prayer repeats and expands on the first: καὶ ὁλόκληρον ὑμῶν τὸ πνεῦμα καὶ ἡ ψυχὴ καὶ τὸ σῶμα ἀμέμπτως ἐν τῇ παρουσίᾳ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ηρηθείη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complete, without blame, at the parousia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wording of this clause is problematic. The aorist passive optative verb τηρηθείη (“may it be kept”) has both a predicate adjective, ὁλόκληρον (“complete”), virtually identical in meaning with ὁλοτελής of the previous clause, and a predicate adverb, ἀμέμπτως (“without blame”), which has to be translated as though it were a predicate adjective. The meaning of the verb and the predicate words is not in doubt. Paul clearly wants his converts to be found complete and without fault in every aspect of their existence at the time of the public manifestation of their Lord.
The most debated problem of the verse involves the juxtaposition of “spirit and soul and body,” which appears to presuppose a tripartite view of human nature not found elsewhere in Paul, or for that matter in the rest of the NT. Jewett (Paul’s Anthropological Terms, 175–183; see also Thessalonian Correspondence, 107f.) argues that this trichotomy derived from Gnostic or Gnostic-like anthropology, taken up by enthusiasts who sought to distinguish between the divinely given spirit and the corrupt human body and soul. He further claims that Paul sought to correct this understanding by his emphasis on wholeness or unity in the human being. Several objections may be made to this view. To begin with we have no evidence for a developed Gnostic anthropology this early. More significantly, if Paul had faced the difficulty envisioned by Jewett, it seems doubtful that a wish-prayer was either an appropriate or an adequate place to attempt to correct such a problem.
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obert W. Funk.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05–206.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거룩함을 이루고 흠없이 보전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삶에서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성화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미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에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너희를 부르시는 이’로 표현한다. ‘부르시는’에 해당하는 ‘칼론’은 ‘칼레오’의 현재능동태분사로 계속적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께서 신앙에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성화의 여정을 완주하도록 계속해서 부르고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부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미쁘시니’에 해당하는 ‘피스토스’는 ‘믿음직한, 신실한’의 의미이다. 인간은 조변석개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딤후 2:!3; 민 23:19) 
또한 ‘이루시리라’로 번역된 ‘포이에세이’는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의 미래능동태로 능력의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앞장서셔서 일하시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본문은 직접적으로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는다. 모리스는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실 때 ‘합의된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브루스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백성의 영적 삶에서 시작하신 ‘성화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도의 성화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를 성도의 의지와 노력과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러한 기쁘신 뜻을 위하여 성도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말하자면 성화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성도들에게 불어넣으시고 이로하여금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함에 이루고자 분투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그 성화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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