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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

 

저자는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학입학에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은 능력에 따라 열매를 취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깨기 위한 파격적인 제안이다. 저자는 일류 대학(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를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지원자들을 몇배수 뽑아서 이들 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거치지 말고 제비뽑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운에 맡기는 방식이 능력주의의 폭정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에 오만하지 않게 되고, 탈락한 사람들도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이런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2016년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의 출현을 보면서 능력주의 신화가 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 포퓰리즘의 근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

 

많은 사람들은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그 능력을 만들어내었는지 생각하면, 능력이 성공을 보장하는 사회는 어쩌면 더이상 정의롭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조영태, 서울대 교수)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

능력주의(실력주의, meritocracy)에서 국가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들고, 개인은 열심히 노력하여 자부심을 갖고 그 대가를 향유하게 하는 사회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함녀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2019년 3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 상담가에 의한 입시 부정,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포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에 자신들의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서 입시부정을 저지름. 

 

1. 입시의 윤리

- 뒷문 뚫기(기부금)와 옆문 뚫기(뇌물) / 뒷문은 합법적이며 옆문은 불법이다. 

- 그렇다고 정문이 누구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공정한 것인가? 뒷문, 옆문, 정문 모두 소득에 비례해 열려 있다. 

- 입시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누가 어디에 첫발을 들여놓았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졸인가 고졸인가, 명문대와 비명문대)

 

2. 능력 지표 따내기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명문대라는 간판, ‘능력의 지표’를 주기를 원했다. 

 

 

CHAPTER 1. 승자와 패자

1.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첫번째 진단.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

두번째 진단.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

 

2.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세계화 프로젝트는 공공선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였고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내리게 했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3.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평등하게 배분했다.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하면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

지난 수십년간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노력과 재능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4. 능력주의 윤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바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5. 굴욕의 정치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6.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7. 포퓰리즘의 준동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린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는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직원 채용에 있어서 효율성과 공정성

1. 왜 능력이 중요한가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나름이라고 생각한다. 

-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2. 우주적 능력주의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며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이처럼 성서 신학은 인간의 능력을 한껏 강조한다.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다(욥기). 반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3. 구원과 자기 구제 

구원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행함으로 얻는 것인가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선행으로 얻는다면 이는 권선징악의 틀에는 맞지만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긴다.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본다면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5세기 펠라기우스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와 개인 책임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로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대했다. 하지만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은 능력주의를 불러들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칼빈은 구원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이며 예정되어있다고 보았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내가 선택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칼빈주의는 근명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고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빈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이상 제어할 수 없었다. 칼빈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은총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4.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앞서 구원의 문제를 성공의 문제로 생각해보자. 성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한 것인가 통제 밖의 요인들이 작용한 것인가? 

일과 노력은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열띤 구원의 증표 탐색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중대성을 갖게 되었다. 자수성가론과 능력주의의 승리는 오늘날 세속 위주 경향의 결과라고 여기기 쉽다. 

능력주의의 승리주의적 측면은 신없는 섭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섭리론은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한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전 9:11-12)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섭리론적인 관념은 오만한 목소리(금융위기 이후의  보너스)와 징벌의 목소리(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9년 아이티 지진, 9.11 테러, 2011년 일본 대지진을 신의 징벌로 풀이)로 나타난다.

 

5.  부와 건강

최근 수십년간 미국 기독교가 전한 ‘번영의 복음’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한국의 기복신앙) 

번영의 복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윤리를 지지한다.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개념은 일이 잘 되어갈대는 기꺼워할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꺽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대통령들은(아이젠하워, 트럼프)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섭리론)’라고 주장했다. 

 

6.  자유주의적 섭리론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허리케인이 죄의 대가’라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7.  역사의 옳은 편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라는 표현을 여러번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두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일에 대한 예측은 고약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 없다. 

 

8.  도덕 세계의 궤적

‘도덕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마틴 루터 킹)

능력과 은총 사이의 균형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청고도들에서부터 번영 복음 전도자들까지, 성취의 윤리학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유혹이었고 언제나 보다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우리는 성공을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로 본다. 이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주지만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1990년이후 갈수록 학생들의 능력주의적 신념(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이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명문대 경쟁율이 높아지면서 점점 능력주의적 신념이 강해졌다.(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반대), 치열한 입시 경쟁은 이런 신념을 강화한다.

 

2. 시장과 능력

* 시장에 대한 논증

1) 효용성 담론 : 시장이 GDP를 늘리고 일반적 복지를 극대화할 동기를 부여한다고 주장

2) 자유담론 : 시장이 교환하는 재화의 가치를 두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

3) 능력주의 담론 :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준다고 여겨졌다. 

 

공정성과 생산성에 이어서 사람들이 오직 노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룰것이다. 

 

이런 능력주의로의 전환의 문제점 첫째 책임을 강조함으로 복지에 대한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긴다. 둘째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 약속한다. 

 

3. 자기 책임의 담론 

1980년대 복지국가 관련 논쟁은 연대보다는 불우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우함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하느냐에 관심, 

클린턴은 복지가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어려운 형편인 사람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레이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영국의 대처 수상, 독일의 슈뢰더 수상 - 기회와 책임이 함께 가는 방향,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 

 

4.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어야 한다.’

-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주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5.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자격이 있다(You deserve)’(레이건->클린턴 2배->오바마 3배)

 

6. 포퓰리즘의 반격 

트럼프의 위대함의 비전은 능력주의적 기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표결)

 

* 능력주의의 폭정

1)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꺽는다. 

2) 대학 학위가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위한 기본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3) 사회적 정서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7.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불평등의 심화(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50퍼센트보다 많이 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빈말로 들리고 불만을 낳는다. 첫째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살마도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만, 둘째 능력주의적 약속은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 절망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질문에 대한 순위(미국-독일-프랑스)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미국보다 중국이 세대간 이동성의 정도가 높다. 중궁이 성공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8. 보는 것과 믿는 것

미국보다 더 평등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유럽인은 사회적 상승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미국인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왜 그럴까? 두 경우 모두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했다.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 학력에 대한 공격

 

1. 무기가 된 대학 간판 

대학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빌 클린턴 :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오바마 : 더 많은 교육이 해답

이러한 주장은 포퓰리즘의 반격(브렉시트,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학력을 강조하는 주장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미국 성인의 2/3)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다라고 말해줌으로써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3. 최고의 인재들 

오바마는 엘리트(아이비 리그 출신, 대학원 학위자들)을 내각에 중용했다. 이렇게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부를 이끈다는 것은 비교적 좋아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라고 부른 것들을 소위 엘리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뛰어난 학력, 전문성에도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베트남 전쟁의 늪,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

- 워싱턴은 월스트리트를 구하고 메인스트리트(미국인의 일상생활)을 저버렸다. 

 

4.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5.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6.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학력주의는 미국과 영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바꿔놓았다. 정부에 비대졸자가 거의 없는 상황은 능력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최근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팔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7. 학력 간 균열

2016년 미국의 대선에서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였다. 

20세기 좌파 정당이 저학력자들, 우파 정당들이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면 이제 능력주의 시대에 이런 패턴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역전되었다(토마 피케티). 

한때 노동자들을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피케틴ㄴ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거침없는 학력주의는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 정당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하며, 대학 학위가 있고 없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도록 하고 있다. 

 

8. 기술관료적 담론

오바마는 기술관료 정치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를 연관시켰다. 

기술 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결정권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설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9.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러운 상승(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폭스 뉴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

 

10. 기후변화 논란

기후 변화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지구온난화는 자연적인 환경 변화 때문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대부분의 공화당원은 그렇다라고,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두 당의 고학력자들 간 의견차는 53퍼센트 였는데 저학력자들끼리는 단지 19%의 차이를 보였다. 

기후 변화를 놓고 정당간 나뉜 입장은 사실과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관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과학을 알게 되면 기후변화에 대한 옥신각신이 사라질거라는 가정은 오류다. 우리가 사실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정책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술관료적 신념은 정치적 설득의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CHAPTER 5. 성공의 윤리

 

1.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귀족 사회 vs 능력주의 사회

내가 부자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부와 특권을 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그러면 귀족제 사회가 정답일 것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 인식할 것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2.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

 

3.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학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들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능력주의 ->세습귀족제, 한국적으로는 세습중산층사회)

 

4.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유리함(풍부한 관심, 자원, 인맥)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인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려 한다. 

 

5.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재능의 도덕적 지위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다. 또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르브론 제임스-농구 재능, 그 재능이 인정받는 사회)

하지만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진다. 

 

6.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성공 = 재능 + 노력

수고와 노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금메달, 노벨상)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을 갖는다. 

 

7.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1) 자유시장 자유주의(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마거릿 대처)

하이에크는 능력과 가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능력은 각자가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다. 그러나 가치는 단지 소비자가 이런 저런 상품에 얼마칸큼의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에 대한 척도일 뿐이다. 

 

2) 복지국가 자유주의(존 롤스)

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주는 체제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정의론, 롤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성공한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빚이 있다.

 

8.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소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된다’고 본다. 

 

9. 시장과 능력

맨큐는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는 사람은 그 큰 기여에 비례하는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자격이 있다”라고 했다. 

 

10.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11.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자격(desert)은 주체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지만, 권리인정(entitlement)은 일정한 경쟁 규칙을 준수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어떻게 규칙을 정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단 알 수 없다. 

롤스는 반능력주의론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롤스는 부자들이 이 부는 내가 쌓은 것이다. 도덕적 자격에 따라 내것이다라며 재분배 목적의 징세에 항의하는 일을 차단하고 싶었다. 

 

12. 성공에 대한 태도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눌 마음이 들 것이다. 

 

13. 운수와 선택

'행운 평등주의는 행운의 주인공이 행운의 결과로 얻은 것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불운한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공적 부조의 대상자들에게 굴욕을 안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가 스스로의 탓이 아님을 입증해야만 한다. 공적 부조의 자격 요건을 갖추려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의 희생자란 걸 제시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선별급식, 기본소득, 재난지원금 지급)

행운 평등주의는 노력과 선택에 따른 불평등을 옹호한다. 

 

14. 재능 계산하기

천부적 재능은 비록 도덕적 자격이 되지 못한다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찬양을 불러들인다. 

 

15. 능력주의의 등장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 버렸다.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1. 능력주의 쿠데타 

하버드의 장학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SAT는 이후 미국 전국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다. 

19세기 터너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이동성의 도구는 바로 교육이었다. 

공립학교의 역할 : 민주사회 구성원으로 육성 기능 &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

 

2.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능력주의는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 하고,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코넌트는 더 유동적인 사회를 원하지 보다 평평한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다.

 

3.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고등교육은 모든 사회경제적 배경의 유능한 학생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학비를 댈 능력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 부가 아니라 능력이 입학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사교육 시장의 호황) 

 

5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 

세습 특권귀족제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주는 방법이 아닌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입지를 마련해 준다. 

기회의 제공자’, ‘사회적 상승 엔진’의 역할을 담당하는 고등 교육은 확대된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제동 기능도 하지 못했다. 

 

6.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 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7.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동문 자녀, 거액 기부금을 낸 자녀에게 우대 조치를 한다. 

 

8.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가드너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특권층은 그들이 배경이락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뭔가가 아니라 능력으로 명문대에 입학했음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경쟁률 높은 인기 대학들은 떠오르는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9.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부모의 역할 강화(미국이나 한국, 극성 부모)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징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으로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10.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특별한 기술이 있든 없든 캄핑(comping)이라 불리는 경쟁 시험을 치르는 학생조직이 일반적이다. 입단율이 낮은 것을 자랑한다. 

 

11 오만과 굴욕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말은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12. 유능력자 제비뽑기 

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들만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이들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합격자를 뽑는 것이다. 

이렇게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하도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찾아줄 것이다. 결국 어찌되었든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며, 탈락한 사람이나 자신이나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천부적 재능, 그리고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네가지 예상되는 반론

1) 학업능력의 저하 : 적절히 1차 관문을 세우느냐. 

2) 다양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추첨은 다양성 확보를 위해 조정 가능하다.

3) 동문 자녀 우대 입학과 기부금 입학은? : 우대 혜택을 없애야 하지만 추첨의 비율을 높여줄수도 있다.

4) 입시가 경쟁이 아니라 추첨이 되면 그 가치는 보다 떨어질테고, 그러면 지금의 명문대가 누리는 명예는 추락하지 않겠는가? :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10대들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온갖 스펙 쌓기 경쟁은 사라질 것이다. 

 

13.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 정부가 노동자 훈련과 재훈련을 위해 쓰는 돈의 액서는 고등교육 관련 지출액수와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적다. 직업 훈련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미국이 고용과 훈련을 모른체 하는 이유중 하나는 고등교육 지원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일 수 있다. 

 

14. 명망의 위계질서 

대부분의 대학들은 근본적인 도덕 및 시민적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 추론과 숙고를 할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기술관료적 스킬과 기술관료적 세계관에 대해 주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인문학의 쇠퇴)

상아탑 밖에서의 시민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 교욱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 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 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15.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ㅇ벗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CHAPTER 7. 일의 존엄성

 

1. 일의 존엄성 하락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2. 절망 끝의 죽음 

미국 노동계급의 마음의 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다.

중년 백인 남성 사이에서 심장마비보다 약물, 알콜, 자살로 숨지는 경우가 많게 나타났다.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배나 많았다. “절망 끝의 죽음이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낸다.

 

3. 분노의 원인 

201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다. 

경제적 진보는 그들의 살림을 더 어렵게 했으며 소수 엘리트에게만 햬택을 주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 머신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작동이 멈춰버렸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4.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경제 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보다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GDP 증대를 통해 이득을 본 이들이 세금을 통해서 이를 실직 노동자들에게 돌리는일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대신 신자우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거의 모든 수익은 최상층에게 돌아갔고 대다수 노동계급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5.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 한다.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다.(헤겔, 뒤르켐)'

 

6. 기여적 정의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임금 정체, 아웃 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완전히 깨졌다. 

 

7.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8. ‘열린 어젠다’의 오만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하고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 보전을 해주는 것을 제안했다. 

카스의 제안은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시장 조성'으로 옮기는 것이다. 

 

9.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오늘날 금융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에 이래 세 배로 늘었다. 하지만 금융활동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지 않다. 금융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을 끌어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을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해치기만 했다. 

 

10.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 투자가인 자신이 그의 비서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투자가는 ‘일자리를 만드는 자’이며 따라서 낮은 세율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폴 라이언). 라이언은 만드는 자(maker)와 가져가는 자(taker)를 구분했다. 그는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소위 가져가는 자가 만드는 자를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 

CNN의 라나 포루하는 오늘날 가장 큰 ‘가져가는 자’는 거액의 불로소득을 노린 투기를 일삼으며 실물경제에는 기여가 전혀 없는 금융업게 종사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이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이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1.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 일반 열람실에 구비되어 있는 책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

 

2. 민주주의와 겸손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된다.’라는 약속말이다. 

소비주의적인 공동선이 우리의 목표라면 시민의 도덕적 연대는 필요없다. 하지만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공평한 기회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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