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And God said, d“Let there be an expanse1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separate the waters from the waters.” And God made2 the expanse and eseparated the waters that were under the expanse from the waters that were f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3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econd day.

d Job 37:18; Ps. 136:5; Jer. 10:12; 51:15

1 Or a canopy; also verses 7, 8, 14, 15, 17, 20

2 Or fashioned; also verse 16

e Prov. 8:27–29

f Ps. 148:4

3 Or Sky; also verses 9, 14, 15, 17, 20, 26, 28, 30; 2: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6–8.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일정한 순서, 패턴이 등장한다. 

 

사건

#1

선언(서론) : ‘하나님이 이르시되’(3, 6, 9, 11, 14,20, 24)

#2

명령 : ‘~이 되라/있으라’(3, 6, 9, 11, 14, 20, 24)

#3

완성 : ‘~이 되니라/있으니라’(3, 7, 9, 11, 14, 20, 24, 30)

#4

평가 : ‘보시기에 좋았더라’(4, 10, 12, 18, 21, 25, 31)

#5

시간 흐름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째날이니라’(5, 8, 13, 19, 23, 31)

하나님의 명령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창조 능력이 된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된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마치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를 지배하고 위협했던 모든 어두움과 혼돈과 공허가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74-5

 

 

6-7절) 궁창이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라키아’는 expanse, space, atmosphere, vault등으로 번역되었다. 한글로도 대기, 창공등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의 원래 의미는 철로 쳐서 만든 판, 단단한 기초, 하늘의 견고한 둥근 천장이다. 이것의 동사형은 쇠를 망치로 두들겨 늘리며 펴는 행위를 말한다. 이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망치로 두들겨 펼쳐 나가신 것으로 묘사한다. 

이 궁창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그들은 ‘라키아’를 견고한 돔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창공이 바위같이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궁창을 대기, 창공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며 성경을 다시 쓰는 것과 같다. 

 

‘라키아’라는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서 17번 등장한다. 그중 9번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된다.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5번이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마차 보좌의 단단한 연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나머지 3번의 인용에서는 기능에 대한 언급은 없다. 

The word raqiaʿ occurs only seventeen times in the Hebrew Bible, nine of which are in Genesis 1. But five are in Ezekiel 1 and 10, a description of the solid platform of the chariot throne; these Ezekiel references are clear and compelling. In the remaining three occurrences there is no reference to function (Ps. 19:1 and 150:1, where the raqiaʿ is parallel to “heavens” and “sanctuary” respectively, and Dan. 12:3, where it is parallel to the place of the stars). In Genesis 1 the raqiaʿ is named šamayim (niv: “sky”) and separates the waters above from the waters below. This combination suggests that the floodgates that are opened in the šamayim that allow the rain to come at the time of the Flood (7:11; 8:2) are related to the raqiaʿ.4 This connection is confirmed in Psalm 148:4, where the waters are described as being above the šamayim, just as Genesis 1 describes them as above the raqiaʿ.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4 L. I. J. Stadelmann, The Hebrew Conception of the World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70), 46–47.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11.

 

이스라엘의 문헌에서 구름들은 땅의 끝에서 발생한다.(시 135:7) 고대 세계의 사고 속에서 땅 끝은 바로 수평선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하늘의 문들이 있다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뜨고 질 때 수평선을 넘어가는 모습이 바로 하늘의 문을 통과한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신다는 점이다. 모든 본문이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선포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다른 어떤 제3의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는 비슷한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와 비교해 볼때 명백한 차이점이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창조 이야기에서 프타라는 창조의 신은 주요 신들을 창조할 때 이들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함으로 창조했다라고 한다. 반면에 태양신 ‘라’는 자위 행위를 통해서 정액을 입에 넣은 후 이를 뱉어냄으로 창조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프타가 말로 신들을 창조했다는 표현이 성경의 표현과 비슷해보이지만 이는 입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개념이 강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믿음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들로부터 앞수와 티아마트, 몸무로부터 창조가 이루어졌다라고 믿는다. 마르둑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티아맛의 시체를 반으로 쪼개서 상체는 하늘, 하체로는 땅을 만들었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완벽히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씀으로 이루어내신다. 어떤 매개체도 필요치 않았다. 또한 본문에서 물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일 뿐이다. 창조의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물은 단지 재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앞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 것처럼 물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뉜다. 그리고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하늘이라고 번역된 ‘샤마임’을 오직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하늘’은 사람들이 자신들 위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즉 광명체들(14-17절)이 있는 하늘과 새들(20절)이 날아다니는 공중을 모두 포함한다. 

 

유일하게 둘째날의 창조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7’을 맞추기 위해서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좋았더라는 표현은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에 7번 등장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비가 적셔야 하는 땅은 3일째 되는 날에 창조되는데 궁창위의 물과 땅의 물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둘째날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생략된 것으로 본다. 이후 셋째날에는 두번에 걸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728x90

And God said, c“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And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And God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first day.

c 2 Cor. 4: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3–5.

 

 

 

3절) 빛의 창조

본문의 빛은 ‘욜’이라는 단어이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이 빛을 낮(욤)이라 칭하셨다. 이 단어는 이후에 날이라는 단어와 같다. 여기서 빛을 낮이라고 부르신 것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을 창조하셨다라고도 볼 수 있다. 왕관이 왕을 상징하고, 요람이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것처럼 빛이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빛의 기간,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의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첫번째 행하신 것이 바로 시간을 창조하심으로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시간의 진행이 있게 하신 것이다. 

Day one concerns something much more significant, something much more elemental to the functioning of the cosmos and to our experience of the cosmos. On day one, God created time.44 This is the first of the functions God will use to bring order to the chaos of the cosmos: the orderly and regular sequence of time.

44 W. Vogels, “The Cultic and Civil Calendars of the Fourth Day of Creation (Gen 1,14b)” SJOT 11 (1997): 178–79, comes to similar conclusions, though he draws different conclusions from it.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79.

 

 

4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좋음은 미적인 또한 도덕적인, 영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시 34:8; 100:5; 렘 33:11; 나 1:7; 벧전 2:3)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구별되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는데 이는 창조의 첫 세날 동안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나눔은 구별과 정화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을 나뉘게 하셨고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다. 이 나눔의 역사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고 그 창조물 자신의 정체성을 주는 것이다. 

 

5절)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바로 그 본성, 정체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창조주 자신이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그것의 목적에 따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결국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왕따, 그림자) 

본문의 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욤은 24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큰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 2:4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날은 창조의 7일을 하루로 보고 있다. 1장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1:5,8,13,19,23,31)은 욤을 하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24시간으로 볼 것이냐하는 것에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1)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것은 넷째날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날의 개념은 넷째날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창조의 1-3일의 날을 24시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2장의 창조기사는 1장과 달리 더이상 날짜 별로 창조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3) 창 2:19이하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는데 하루에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 동물의 이름을 지은후 하나님은 아듬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나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이를 여섯째날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현실적인 하루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창조 기간이 7일인 것으로 창세기 1장은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6/7의 패턴을 통해 피조 세계의 창조와 구조의 완전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를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제의적인 차원에서 7일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6/7패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세기 1:1은 7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은 14개의 단어(7×2)로 구성되어 있다.31) 창조의 시작을 7단어로 묘사했는데, 창조의 절정은 제7일에 이루어지며, 제7일은 35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7×5=35).

31) 계시록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새창조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7은 창세기를 모델로 삼은 것으 로 보인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

 

여기에 사용된 욤이라는 단어는 의미론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낮 시간, 2) 24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 3) 특별한 날들(그의 죽음의 날), 4) 여러 날 혹은 일 년, 5) 욤에 정관사가 붙어서 오늘을 의미, 6) 그 앞에 전치사가 붙거나 지시대명사가 덧붙여져서 ‘그날에’혹은 ‘~할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In the semantic range of yom we must include (1) the daylight hours, (2) a twenty-four-hour day, (3) special days (e.g., day of his death), and (4) a plural use that can refer to a few days or even a year.47 Furthermore, (5) the definite article can be added to yom to make it mean “today,” or (6) a preposition can be tacked on the front and a demonstrative pronoun associated with it to say “in that day” or simply “when.” The important point to be made here is that these categories cannot be merged carelessly. It is not unusual for an interpreter to claim something like, “The word day can mean an extended, indefinite period of time,” and then follow up with a series of supporting references. The problem is that invariably most if not all of those references will be examples of category 6. Unfortunately, one cannot pull the word yom out of that setting and still retain the meaning it has in that setting.

47 Adapted from HALOT, 2:399–400.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81.

 

예를 들어 외출을 준비하는 중에 아내가 ‘1분만 기달려’라고 했을 때 그때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60초 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업시간을 50분으로 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정확하게 종을 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이라는 표현이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문맥속에서 확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첫째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은 무엇일까? 천체(해와 달과  별)은 넷째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첫째날의 빛은 천체들의 빛과는 무관한 빛으로 보기도 한다.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편 104:2은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고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5에서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1:4에서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것은 이 빛을 하나님의 임재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또 다른 가능성은 창세기 1:1에서 이미 만들어진 천체가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지구를 향하여 빛을 비취게 하는 것이다. 5절에서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는 것은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빛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또는 빛이 존재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구분이다. 뿐만 아니라 낮과 밤이라고 부른 것은 밝은 상태의 기간과 어두운 상태의 기간을 가리킨다. 결국 첫째 날 창조는 빛의 생성과 더불어 시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날의 빛과 시간의 탄생은 넷째 날에 창조 활동의 기반이 되며, 이를 통해 낮과 밤은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54.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 표현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루의 첫 시작은 아침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유대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녁이 하루의 첫 시작에 해당한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전통적인 유대의 사고방식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창세기 1장의 이러한 묘사 때문에 그와 같은 유대식 사고방식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첫째날의 빛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시간의 창조라고 볼 때 이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고대 근동의 문화속에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문의 하루, 첫째 날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러 발견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욤이 24시간일 수 없다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을 과학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찬양의 시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선포로 읽어내는 이들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해하고 변호하기를 원하는 개념들을 읽어내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구약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본문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당시의 저자나 유대인들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 했다. 예를 들어 21세기의 사람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세계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용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묘사할 때 가장 정확하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대세계에서는 오늘날 과학의 역할을 신화가 담당하고 있었다. 신화적인 접근은 자연 세계의 기능들을 어떤 목적에 따른 결과로 파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천둥번개는 대기의 압력과 대류현상으로 설명되지만 고대에는 신들의 분노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구약의 기록은 고대 문화들 속에서 신화가 감당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감당했다. 즉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한 문학적인 메카니즘을 제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전역에 존재한 거대한 문화적 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현대 우리의 세계관 속에서 기능은 구조의 결과라면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기능은 목적의 결과이다. 

 

어린 아이의 질문 “나는 어디에서 왔어?

생명 탄생의 신비와 성에 대한 지식 전달을 위해서 고뇌하며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는 부모, 아이는 뒤돌아서며 “엄마, 한결이가 그러는데 자기는 서울에서 왔대.” 

 

 

우리는 우주의 물질적인 구조와의 관계속에서 주로 우주를 생각한다 헬라 철학은 우주의 물질적 인 구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계몽주의는 우주의 물질적 인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윈 이후의 시대는 물질적 인 구조가 우주에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 왔다. 래비 재커라이어스는 비슷한 것을 목격하였다. 먼저 이 세계에서 초월성이 제거되었다. 이어서 성경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마지막으로 인류를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고대인들이 창조를 묘사하거나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했을 때, 물질적인 구조나 우주의 형성사같은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기능적인 우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들은 창조를 사물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현실 연속체를 확립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우주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실상은 우주의 모양이나 구조 혹은 그것의 형성사 등에 대한 묘사를 들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은 우주적인 실상을 전달하고 있다. 즉 시간을 통해서 모든사람이 우주를어떻게 경험해 는가 하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종종 사람들이 우주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도록 우주를 설정하셨고 그것이 것을 그 본문은 확증하고 있다.

 

열린 우주(open universe)-영들의 지배(과학적 연구 불가능), 닫힌 우주(closed universe)-순수한 인과관계로 설명-이신론, 통제된 우주(controlled universe)-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주관자로 본다. 그분은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D.A. carson)

An open universe is espoused by animism. The spirits control most things, and the appropriate thing for human beings to do is to appease the spirits so that they may do the things we want. Science is not possible because nothing is regular: the whims of the spirits are unpredictable, and even the sacrifices do not always work. In a closed universe, everything is explained by cause and effect at a purely material level. Science is possible; God is excluded. A modification of this model is espoused by deism. God set the whole thing up and established the principles of operation, but since then he has been rather removed from the scene, while he lets nature take its course. Science is possible, but there is little need to appeal to God, except for the initial act of creation.

The controlled universe reflected in the Bible, however, has God as both its creator and its sustainer/ruler. He creates in an ordered way, and sustains and rules it in an ordered way, so that science is possible; but he is not bound by what he has created, so he is at perfect liberty to do things another way, with the result that miracles are possible.90

90 D. A. Carson, The Gagging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96), 20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00–101.

 

하나님을 과학이 메울 수 없는 간격들만을 채우는 신 일명 간격의 신(God of the gaps)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무관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도, 자연계의 질서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첫째날의 창조가 바로 빛이고, 이 빛의 창조가 무질서한 세계 가운데 시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던지게 된다. 조지오웰의 1984년’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고통에 지배를 받고 있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쾌락에 지배를 받고 있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묵상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 1:9-13 셋째날 땅과 바다, 식물  (0) 2020.06.11
창 1:6-8 둘째날 궁창  (0) 2020.06.09
창 1:1-2 혼돈, 공허, 깊음, 하나님의 영  (0) 2020.06.08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0) 2020.06.05
창세기 서론  (0) 2020.05.28
728x90

In the a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b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

a Job 38:4–7; Ps. 33:6; 136:5; Isa. 42:5; 45:18; John 1:1–3; Acts 14:15; 17:24; Col. 1:16, 17; Heb. 1:10; 11:3; Rev. 4:11

b Jer. 4: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1–2.

 

 

일부의 학자들은 1절과 2절 사이의 간격이론을 제시한다. 

 

1–6일 동안 이어진 매일의 창조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와요멜 엘로힘 וַיֹּאמֶר אֱלֹהִים)로 시작하여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날이니라” 라는 말 로 항상 끝난다. 이런 패러다임을 염두해 두고 창세기 1장을 보면 첫째 날은 창세기 1:3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 1:2을 보면 첫째 날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지구와 물이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 들이 창세기 1:1을 1–6일 창조에 대한 요약적 선포로 생각했다.6)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말은 1–6일 동안 하나님이 하신 창조 활동 전 체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절에 있는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로 있는 땅과 깊음과 수면이라는 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 때문에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생겨났다. 간격 이론(gap theory)과 하나님과 물질의 공존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간격이론의 제창자는 펨버(G. H. Pember)이다. 그는 그의 책 Earth’ Earliest Ages(1876)에서 소위 ‘간격 이론’(gap theory)을 제창하였다. 그의 주장은 스코필드 레퍼런스 바이블(Scofield Reference Bible 1909)에 의해 복 원(restitution)이론으로 발전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 간격 이론에 의하면, 창세기 1:1과 1:3–31의 창조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큰 간격이 있으며,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은 첫 번째 천지 창조를 완성하였다. 이 때 창 조된 천사들 중 하나였던 사탄이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 망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사탄을 심판하셨다(사 34:11). 하나님의 심판은 지구에도 영향을 미쳤고, 창세기 1:2은 그로 인한 지 구의 혼돈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간격 이론에 의하면, 창세기 1:3–31은 하나 님이 파괴된 지구를 복원하는 과정이며 재창조이다.

창세기 1:2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물질이 존 재하였다는 하나님과 물질의 선–공존설(pre–exitence)이다. 카슈토는 창세 기 1:1을 창세기 1:3–31의 창조에 대한 선포라고 하면서도, 창세기 1:2의 땅 은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할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혼돈 상태의 물질이며 창조 과정을 통해 지구가 된다고 한다.8) 헤르만 군켈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군켈은 창세기 1:1을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군켈은 창세기 1:1과 창세기 1:2에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군켈에 의하면, 그 이유는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 하지만, 창세기 1:2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원시 상태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켈은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오경의 P자료를 만들었던 그룹들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는 말을 첨가하였다 고 한다.9) 이런 본질적인 모순을 지닌 2절의 표현이 생긴 이유는 포로기 시대 에 P자료를 첨가하여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의 편집을 완성한 제사장 그룹이 무로부터 창조(creation ex nihilo)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군켈은 주장한다.10)

6) Hermann Gunkel, Genesis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97), 103.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103–108. Erence E. Fretheim, The Book of Genesis, NIB vol. 1 (Nashville: Abingdon, 1994), 342.

7)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39.

8)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Jerusalem: The Magnes Press, 1961), 19–23.

9) P는 문서설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문서설은 모세 오경에 4개의 주요 자료인 J, E, D, P가 있다 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에 의하면, P는 제사장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던 자료로서 유다 왕 국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만들어져 창세기에 삽입되었다.

10) Hermann Gunkel, Genesis, 103–10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9–4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라는 표현은 형체가 없고 비어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렘 4:23에 등장한다. 

(렘 4:23, 개정)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그 땅이 멸망당하여 혼돈하고 공허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아직 땅에 피조물이 없고 질서가 부여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땅이 혼돈하고” 라는 말은 창조된 땅은 아직 생명체가살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며, “공허하다” 는 말은 땅위에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19) 창세기 1:2의 ‘토후’ת̇הוּ(혼돈)와 ‘보후’בֹהוּ(공허)와 의미상 가장 유사한 예문을 예레미야 4:23–26에서 볼수 있다.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24 내 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 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예레미야4:23에서 그 땅이 멸망당하여 혼돈하고 공허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23절 후반부와 24절 그리고 26절에서 땅의 혼돈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한다. 땅 의 혼돈한 상태란 하늘에 빛이 없고 높고 낮은 산들이 진동하며 황무지가 된 것이다. 25절은 땅의 공허함을 설명한다. 공허는 사람이 없고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에서 말하고 있는 지구의 혼 돈과 공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차이가 있다면 예레미야 4:23–26의 땅의 혼돈과 공허는 사막과 같은 상태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창세기 1:2의 혼돈과 공허는 땅 위에 물과 어둠만 가득한 상태이 다.

19)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A Linguistic Investigation, JSOTSupp 83 (Sheffield: JSOT Press, 1989), 17–43. Tsumura는 ‘토후’ 와 ‘보후’ 는 혼돈과 관련이 없고 지구가 텅빈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Norman Habel, “Geophany: The Earth Story in Genesis 1,” The Earth Story in Genesis, eds. Norman C. Habel & Shirley Wurst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38–4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46–47.

 

‘토후’라는 말은 마땅히 거기에 존재해야할 추상적인 그 무엇, 예를 들면 가치, 목적, 진리, 이익과 고결등등이 결여된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라’가 본래 치료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은 아직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해준다. 

학자들은 깊음(테홈)이라는 단어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설화에 해당하는 ‘에무나 엘리쉬’에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 신화에 의하면 바벨론의 마르둑은 혼돈의 여신 티아맛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했다. 이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도 ‘깊음’이라고 표현된 혼돈의 여신 티아맛을 이겨야만 했다고 믿는다. 여기서 테홈과 티아맛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깊음 사이에 갈등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깊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따르기 때문이다.

(창 7:11, 개정)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 8:2, 개정)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시 33:7, 개정)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시 104:6, 개정)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는 말을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 에뉴마 엘리쉬를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 다.20) 이들은 깊음의 히브리어 표현 ‘테홈’תְה֑וֹם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다의 신인 티아매트(Tiamat)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21) 티아매트는 어머니 신이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자식 신들을 죽이려다 폭풍의 신인 마르둑(Marduk)에 의해 살해 당한다. 그 때 마르둑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티아매트 위에 강력한 바람을 내 뿜으며 공격한다.22) 티아매트가 마르둑을 삼키려고 입을 쩍 벌리자 마르둑은 티아매트의 입속으로 번개를 쏘아 죽여 버린다. 주석가들 중에는 바다의 신 티아매트 위에 강풍으로 공격하는 마르둑의 이미지와 깊음 위 에 있는 하나님의 바람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 화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23)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티 아매트와 창세기 1:2의 ‘테홈’תְה֑וֹם사이에 극복할수없는 차이점이 있다.

창세기 1:2의 테홈은 티아매트와 달리 결코 인격적인 존재나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도 테홈은 시적인 표현에서 의인화되기 는 하지만, 결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에뉴마 엘리쉬에서 티아매트는 악의 신으로서 신들의 적과 원수로 그려지고 있고, 신들과 전쟁을 치루고 있다. 하 지만, 창세기 1장의 배경에서 테홈은 결코 악의 신도 아니며 신들과 전쟁을 치 루지도 않는다. 테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 조된 지구를 덮고 있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24) 창세기 1:2과 메소포타미아 신 화 사이에 어원적 문화적 유사점이 있을지라도 위에서 지적한 근본적인 차이 점들 때문에 창세기 1:2의 표현이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25)

2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Grand Rapids: Eerdmans, 1990), 111.

21)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158–159. Tsumura는 테홈תְהוֹם과 티아매트의 어원론적 유사성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George L. Klein, “Reading Genesis 1,”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29–30.

22) ANET, 60–72.

23) Hermann Gunkel, The Legends of Genesis: The Biblical Saga and History (New York: Schocken, 1974), 146–149. G. von Rad, Genesis, 49.

24)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45–65.

25) W. G. Lambert, “A New Look at the Babylonian Background of Genesis,”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16 (1965): 29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47–48.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은 이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본문의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는 바람(출 14:21), 호흡(창 6:13), 영(삼상 10:10)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 운행하다라는 동사 ‘라합’은 창 1:2과 신 32:11에 등장한다. 신 32:11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하여 간 일을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는 방식에 비유한다. 즉 독수리가 날기를 배우는 새끼 독수리 위에서 ‘공중을 맴도는’ 광경을 묘사하며 이 동사, 라합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지구에 강림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기다리고 있는 지구가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때에 등장하는 루아흐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해했다. 

 

 

There is no reason to postulate that a long time elapsed between Gen. 1:1 and 1:2, during which time the earth became desolate and empty. Critical scholars argue that the word “deep” (Hb. tehom) is a remnant of Mesopotamian mythology from the creation account called Enuma Elish. Marduk, in fashioning the universe, had also to vanquish Tiamat, a goddess of chaos. These scholars believe that the Hebrew God had to conquer the chaos deity Tiamat in the form of the “deep” (notice the similarity of   p 50  the two words tehom and “Tiamat”). There are many linguistic reasons, however, for doubting a direct identification between the two. In any event, there is no conflict in Genesis or in the rest of the Bible between God and the deep, since the deep readily does God’s bidding (cf. 7:11; 8:2; Ps. 33:7; 104: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49–50.

 

창세기 1:2은 1:1에서 창조된 지구의 상황을 부연 설명하는 상황절이다. 그 상황은 네가지로 설명한다. 

1) 땅이 혼돈하고(토후)

2) 공허하며(보후)

3)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테홈)

4)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루아흐)

 

 

 

 

'성경묵상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 1:9-13 셋째날 땅과 바다, 식물  (0) 2020.06.11
창 1:6-8 둘째날 궁창  (0) 2020.06.09
창 1:3-5 첫째날 빛의 창조(시간의 창조)  (0) 2020.06.08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0) 2020.06.05
창세기 서론  (0) 2020.05.28
728x90

In the a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 Job 38:4–7; Ps. 33:6; 136:5; Isa. 42:5; 45:18; John 1:1–3; Acts 14:15; 17:24; Col. 1:16, 17; Heb. 1:10; 11:3; Rev. 4: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1.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7일간에 걸쳐 진행된다. 앞의 6일동안 하나님을 일하시고 일곱째날은 안식하셨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이를 논증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계획과 완벽한 솜씨로 이 모든 것을 지으셨음을 선언한다. 

1:1-2:3로 이어지는 구조는 간략하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1-2 창조의 배경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선언

1:3-31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하신 일을 묘사한다. 

2:1-3 마지막으로 일곱째날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에 대해 말한다.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은 동일한 형식에 의해서 표현된다. 각각의 날은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라는 표현으로 마무리 된다. 

이후 창조의 기록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사실과 그것들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6일간의 창조 기사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었는데 식물의 창조는 셋째날이다. 식물의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광합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창조는 독특한 구조, 질서를 보여준다. 

 

 

 

 

 

첫째날

넷째날

해, 달, 별

둘째날

궁창(하늘)

다섯째날

새와 물고기

셋째날

땅과 바다, 식물

여섯째날

짐승과 사람

결국 창조의 기사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매우 복잡한 피조세계에 하나님께서 질서를 부여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는 모든 성경 역사의 기초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시편 8; 104; 148편

 

(요 1:1-3, 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전 8:6, 개정)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골 1:15-17, 개정)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3, 개정)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요일 1:5-7, 개정)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절) 태초에(in the beginning, 베레쉬트)는 천지 창조의 시점을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성경의 이 첫 선언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주권과 능력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한다. 

1절의 해석은 2절과의 관계속에서 이를 종속절로 볼 것이냐 독립절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 

1.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a formless void.… (nrsv)

2. When God began to create heaven and earth—the earth being unformed and void … God said.… (njps)

3.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Now] The earth was.… (niv, kjv, nasb, nlt)

The nrsv rendering treats verse 1 as a dependent clause that finds its main clause in verse 2. The njps considers the clause of verse 1 as dependent on a main clause in verse 3, with verse 2 being parenthetical. The third option, the traditional rendering, understands verse 1 as an independent clause, which either refers to creative activity that preceded the seven-day sequence7 or provides a literary introduction to the events of the seven days.8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jps New Jewish Publication Society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kjv King James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lt New Living Translat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jps New Jewish Publication Society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7 This would result in this sense: First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resulting in a formless and void situation; this was then rectified by creating light, etc., over a seven-day period.

8 This would result in a summary/title for the chapter: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Now let me explain how he went about it. The earth was formless, etc., then God created light.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9.

 

2절과의 연결로 해석할 때 우리는 1절을 NRS영어 성경처럼 번역할 수 있다.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시초에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문화와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이자 문화의 한계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성경이 씌여진 히브리적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베레쉬트’라는 표현이 어떤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초기의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Certainly Hebrew can use reʾšit to refer to the beginning of something. But there is more to it than that. J. Sailhamer has pointed out the unique function of the term as referring to an initial period or duration rather than to a specific point in time.1 His case is supported most convincingly by passages such as Job 8:7, which speaks of the early part of Job’s life, and Jeremiah 28:1, which refers to the beginning period of Zedekiah’s reign. Often in keeping records of a king’s reign, his first year did not begin with his accession to the throne, but with the first new year’s day of his reign. Historians refer to the partial preliminary year as the accession year. In Hebrew it was referred to as the reʾšit of his reign. This was an initial period of time, not a point in time. This linguistic discussion therefore offers an alternative way of understanding the “beginning,” but how can we know that this was on the mind of the author? None of these other verses are exact syntactical equivalents of Genesis 1:1.2

1 J. Sailhamer, Genesis Unbound (Sisters, Ore.: Multnomah, 1996), 38. Detailed discussion may be found in Sailhamer’s “Genesis,” a contribution to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ed. F. E. Gaebelein (Grand Rapids: Zondervan, 1990), 2:20–23, and a summary by B. Arnold in the article on reʾšit in NIDOTTE, 3:1025–26.

2 Distinguishing syntactical features in Gen. 1:1 include the use of the preposition without the definite article; the sequence of a verbal form following reʾšit rather than a nominal form; and the masoretic use of a disjunctive accent to separate this first word from what follows. For discussion of these technical points, see the commentaries, especially G. J. Wenham, Genesis 1–15 (WBC; Dallas: Word, 1987), and V.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8.

 

우리는 6일간의 창조의 기사의 내용이 1장 1절의 선포에 대한 부연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존재한다라고 보기도 한다. 이 간격이론은 1절의 창조가 사탄의 반역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고 이후에 2절의 타락한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재창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1절이 창조에 대한 선언이며 이후에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부연 설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에서 각 단원들을 제시할 때 요약적인 진술(톨레도트)을 소재하는 문학적인 양식을 선호한다는 것과 2:1에서 6일 동안의 창조기사가 “천지”가 다 이루어졌다는 말로 끝맺는 것을 통해서 지지를 받는다. 

  A further case can be made that the syntax of verse 2 favors the treatment of verse 1 as an independent clause. Turning to the traditional translation, we still must ask whether anything happens in verse 1. Does it refer to some creative activity that preceded the seven days (in which something that can be designated heaven and earth were created), or does it introduce and summarize the activity of the seven days (during which heaven and earth were created)? There are two evidences that I believe offer support for the second option. (1) The book of Genesis typically operates literarily by introducing sections with a summary statement. Thus, for example, beginning in 2:4 and ten additional times throughout the book, a toledot statement introduces a section (see introduction). (2) Even more persuasive is that the account of the six days closes with the comment that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completed (2:1).13

Thus, Genesis uses literary introductions, and the six days accomplished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t can therefore be concluded that the text is not suggesting that anything was actually created in 1:1; rather, the verse is a literary introduction, a summary of what follows. The “initial period” indicated by the word bereʾšit is not described in verse 1 but in chapter 1.

13 This inclusio was first pointed out to me by one of my students, Marco Castillo.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70.

 

다음으로 히브리어 원문은 창조했다라는 의미를 가진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구약 성경에 48번 등장하는데 오로지 하나님만을 주어로 취하며 특징적인 신적 활동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며 다양한 목적어를 취한다. 그 가운데 사람, 예루살렘, 바람, 불, 구름, 멸망, 재해 흑암과 같은 형상들, 의, 순결, 찬양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도 포함된다. 성경의 창조는 분명히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를 말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바라’라는 동사의 관심은 물질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할과 기능을 부여하심으로 우주를 작동하게 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옷을 만들었다’라고 말할 때 어떤 직물을 만들어 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design)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에서도 신들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의 관심은 물질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하는데 있었다.(에누마 엘리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는 ‘엘로힘’으로 장엄의 복수 표현이다. 창조하다라는 동사가 단수형인데 주어는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존재로 능력의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첫 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728x90

창세기는 말그대로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다. 모세 오경의 첫번째 책으로 성경의 문학 양식에 대한 구분으로 볼때 율법서(토라)의 첫번째 책이다. 성경의 처음 다섯권의 책이 성경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이 다섯권중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가 모세오경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1-11장은 아브라함 이전의 원역사이고 12-50장의 기록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 역사이다. 원역사에 해당하는 1-11장의 내용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다. 창조-타락-구속의 성경 전체의 이야기의 큰 틀을 제공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족보, 계보(톨레돗)는 매우 중요하다.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2:4; 5:1 with slight variant;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이 구절들은 마치 돋보기의 역할을 한다. 전체의 그림속에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의 족보들

 

 

본문의 ‘톨레돗’은 영어 표현으로는 모두 generations라고 번역되는데 한그 ㄹ성경에서는 내력, 계보, 족보라고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아담의 계보

 

족보의 메인 라인은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진다. 이외의 부차적인 족보들은 전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창세기의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창조, 타락,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기에 좋도록 창조하셨지만 선악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결국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이어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도 인간의 죄에 의해서 나빠지게 된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구원의 소망을 주신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핵심 주제들(Key Themes)

1. The Lord God, being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having created the earth to be his dwelling place, commissions human beings as his priestly vice-regents or representatives so that they might fill the earth and caringly govern the other creatures (1:1–2:25).

2. Abandoning their priestly and royal duties, the human couple rebel against God and betray him by acting on the serpent’s suggestions; their willful disobedience radically affects human nature and the harmonious order of creation (3:1–24; 6:5–6).

3. God graciously announces that the woman’s offspring will redeem humanity from the serpent’s tyranny. Genesis then traces a unique family line, highlighting how its members enjoy a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 and are a source of blessing to a world that lies under the curse of God (3:15; 4:25; 5:2; 6:8–9; 11:10–26; 12:1–3; 17:4–6; 22:16–18; 26:3–4, 24; 27:27–29; 28:14; 30:27–30; 39:5; 49:22–26).

4. As a result of the man’s disobedience, his unique relationship with the ground degenerates, resulting in hard toil and even famine. While Genesis graphically illustrates the effects of this broken relationship, it also portrays the special family line as bringing relief from such hardship (3:17–19; 5:29; 9:20; 26:12–33; 41:1–57; 47:13–26; 50:19–21).

5. While the woman’s punishment centers on pain in bearing children (3:16), women play an essential role in continuing the unique family line; with God’s help even barrenness is overcome (11:30; 21:1–7; 25:21; 29:31–30:24; 38:1–30).

6. The corruption of human nature causes families to be torn apart as brotherly affection is replaced by resentment and hatred (4:1–16; 13:5–8; 25:22–23, 29–34; 27:41–45; 37:2–35). Although Genesis highlights the reality of family strife, the members of the family line have the potential to be agents of reconciliation (13:8–11; 33:1–11; 45:1–28; 50:15–21).

  p 42  7. Whereas exile from Eden and dispersion throughout the earth are used by God to punish the wicked (3:22–24; 4:12–16; 11:9), the promise of land is a sign of divine favor (12:1–2, 7; 13:14–17; 15:7–21; 26:2–3; 28:13–14; 50:24).

8. Although God is prepared to destroy almost the whole of humanity because of its corruption (6:7, 11–12; 18:17–33), he still desires that the earth should be populated by persons who are righteous (1:28; 8:17; 9:1, 7; 15:1–5; 17:2; 22:17; 26:4; 28:3; 35:11; 48: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41–42.

 

성경의 모든 기록들, 특히 창세기를 읽을 때 각각의 사건들을 독립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전체의 그림속에서 그 사건의 위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전체 그림의 중심에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창세기 전체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족보가 있다. 이 족보는 원시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창 3:15절로부터 시작해서, 그 계보에 등장하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성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아담-셋-의인 노아-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족장들의 이야기들 만으로는 전체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없다. 

창세기의 족보의 라인은 항상 장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에서는 장자권을 동생에게 판다. 르우벤의 실수로 장자권은 요셉에게로 넘어갔다. 우리는 요셉의 꿈을 통해서 왕의 계보가 그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야곱은 그가 죽기 전에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한다.(창 48:13-19) 하지만 요셉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왕권은 그의 형인 유다로 이어지게 된다.(창 49:8-12) 결국 왕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지만 기계적으로 장자들에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에서 나오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왕을 세우실 때 에브라임지파는 거부당한다.(시 78:67-72)

 

 

창세기의 역사성 

창세기는 역사적 기록인가? 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창세기는 당시 고대 근동의 역사,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의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애굽을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지를 알려주고자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이야기체, 산문으로 기록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창조의 기록, 창 1:1-2:3의 기록은 왕의 즉위식을 기록하는 것과 같은 찬양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시 136:4-7)

 

창세기의 기록 목적, 특히 천지 창조의 이야기가 목적하는 바는 과학적인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내 광야의 유목민 공동체가 출애굽하여 애굽의 우상들이 자신들의 신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조상으로 소개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도덕적인 판단을 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동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창세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현대 과학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창조와 진화의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창세기는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제공해준다. 

 

성경은, 창세기는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대답해주지 않는다. 창세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며 창세기의 세계관이 과학 연구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을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세기가 역사와 현대 과학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 무엇을(Who, What)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언제, 어떻게(When, How)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모세의 저작 목적에 따라서 창세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는 창세기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세기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영광스러운 정점에 이른다 곧 창세기는 나중에 보다 영광스럽게 마무리될 이야기의 첫째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다음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최초의 인류가 지은 죄는 모든 것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들을 없애 버리려고 시도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몽을 지니고 사는 인간이 모든 인류와 유대 관계에 놓여 있는 것, 인간이 피조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세계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해야 하는 것 등은 모두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다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윤리적인 가르침도 도덕적인 순결을 요구한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규정들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베푸신다. 신앙인은 공동체와 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원래 의도하시는 것을 인정한다 나아가 창세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 세계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준다. 곧 대표의 원리다. 아담은 인류와 세상을 대표한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아담이 대표하는 인류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 대표의 원리는 기독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구속 사역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사람들과 나머지 피조 세계 대표하는 것이다.

 

창세기 시대의 근동(B.C. 2000년 경)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