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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oncerning a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bbeing gathered together to him, we ask you, brothers,1 not to be quickly shaken in mind or calarmed, either dby a spirit or a espoken word, or ea letter seeming to be from us, to the effect that fthe day of the Lord has come.
a See 1 Thess. 2:19
b [Matt. 24:31; 1 Thess. 4:15–17]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3, 15
c Matt. 24:6; Mark 13:7
d [1 John 4:1]
e ver. 15; [1 Thess. 5:2]
e ver. 15; [1 Thess. 5:2]
f See 1 Cor. 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1–2.
 
본문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주의 재림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마 24장으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다양한 사건들을 다룬다면 본 장에서는 그 초점을 좁혀서 재림 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절) 그는 데로니가 교인들을 '형제들아 (아델포)' 라는 정 깊은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한 호칭은 데살로니가전후서 두 서신에서만 무려 20회나 견된다(살전 1:4; 2:1.9.14.17 ; 3:7; 4:1.13 ; 5:1.4.12.14, 25 ; 살후 1:3; 2:1,13,15; 3:1.6.13). 이러한 칭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 사이의 적 유대감을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하여 책망는 말을 하든, 격려하는 , 요청하는 을 하든 바울은 들에게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 않고 주님 안에 대등 제애로써 말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 '아델포이' 는 표현을 연이어 쓰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우리가 ~ 구하는 것은’은 ‘에로토멘’으로 ‘요청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로타오’의 직설법 현재 표현이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내세워 명령형의 표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도리어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다.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강림하심’에 해당하는 ‘파루시아’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황제 등의 통치자가 지방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황제의 방문을 받은 주민들은 그의 방문을 환호하면서 모여들어 축하 행렬을 베풀었다. 이 독특한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24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17회가 주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마 24:27; 고전 15:23; 살전 2:19; 4:15; 약 5:7), 17회중 7회가 살전, 후에 집중되어 있다.(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2:8,9) 그만큼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이땅에 강림하실 때에 천사들은 택함 받은 성도들을 그 앞에 모을 것이다. 본문에서 ‘모임’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고게스’의 원형 ‘에피쉬나고게’는 신약에 2번 사용되는데 본절에서는 함께 모이는 행위의 의미로 또한번은 히 10:25에서 예배를 위해 신자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나중에, 위에, 추가로’의 ‘에피’라는 접두어와 ‘회당, 집회소’라는 의미의 ‘시나고게’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회당에 함께 모인 모임을 의미하는것이다. 마 24:31에 이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는 재림의 날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순식간에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1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처럼 당시 성도들은 주의 강림과 그 앞에 모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aul discusses Christ’s coming (Gk. parousia), his return in glory at the end of the age to save the elect and punish the wicked, and our being gathered together (Gk. episynagōgē) to him (see Matt. 24:31 with the related verb episynagō; cf. also 1 Thess. 4:16–17). The idea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lready come (2 Thess. 2:2) may have made the Thessalonians fear that Jesus’ coming and the gathering of his people to him were no longer legitimate or realistic expectat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7.
 
2절) 본절은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혹되었는지를 다루는데 영이나 말, 위조된 편지를 통해서 주의 날이 이미 임했다는 이야기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 세가지를 표현하면서 바울은 ‘메데, ~하지 말라’라는 부정어와 ‘디아,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를 통해서 미혹의 근원지를 밝힌다.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토스’, ‘프뉴마’는 성령이든 악령이든 인간의 지정의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살전 5:23). 본문에서 ‘프뉴마, 영’의 역할은 다가올 일을 예언하는 영으로 묘사되었는데, 예언 가운데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말미암은 경우도 종종있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이 받았다고 하는 ‘영’을 빌어서 주의 날을 예언했을 것이다. 
'말'에 해당하는 ‘로구’는 ‘로고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고 본문에서는 소통을 의미하는 메시지를 의미한다. 당시 여러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이나 바울에게 직접 들었다라는 거짓말로 교인들에게 여러 말들을 전했던 것이다.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는 의도적으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이 위조된 편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고 누가 써는지 모르는 편지를 마치 바울이 쓴 편지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이 이미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메시지를 직접 쓴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해서 거짓된 주의 날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고 사람들은 이것이 바울의 일행이 이야기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더욱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흔들리고 두려워한 이유는 본문의 ‘이르렀다’로 번역된 ‘에네스테겐’은 현재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에니스테미’의 완료형으로 이미 도래했다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해진 잘못된 정보는 바로 주의 날이 이미 도래했기에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의미없다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들을 요동하고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The Thessalonians were shaken into mindless panic and were alarmed or frightened by the false claim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lready come. Though the source of the confusion was unknown to Paul, he suggests a number of possibilities: a spirit. An alleged prophetic word. a spoken word. A word of teaching or a sermon. a letter seeming to be from us. Paul seems to have suspected that a letter forged in his name was circulating (3:17). the day of the Lord. See notes on Amos 5:18–20; 1 Thess. 5:2–3. Although some believe that the Thessalonians were thinking in terms of a complex of events that would lead to the second coming, Paul seems to assume here, as elsewhere (1 Cor. 1:8; Phil. 1:10; 1 Thess. 5:1–4; 2 Thess. 1:7–10), that the arrival of the day of the Lord and the second coming occur at the same time, as aspects of a single event. has come. The Thessalonians have fallen victim to the implausible notion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come, presumably because some source they regard as authoritative has claimed this.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at the idea was part of a developed heres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7.
 
주의 날, 주님의 심판의 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핵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부활로 이미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당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었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미 그 나라가 임했기에 지금 너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의미 없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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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rwhen he comes on sthat day tto be glorified in his saints, and to be marveled at among all who have believed, because our utestimony to you vwas believed. 11 To this end we walways pray for you, that our God may xmake you worthy of his calling and may fulfill every resolve for good and every ywork of faith by his power, 12 so that the name of our Lord Jesus zmay be glorified in you, and you in him, according to the grace of our God and the Lord Jesus Christ.

r See 1 Thess. 1:10

 

s See 1 Cor. 3:13
t Ps. 89:7 (Gk.); Isa. 49:3; John 17:10
u [1 Cor. 1:6]
v [1 Thess. 2:1, 13; 1 Tim. 3:16]
w Col. 1:9
x [ver. 5]
y 1 Thess. 1:3
z [Isa. 66:5; Acts 13:4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10–12.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10–12.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직역하면 ‘그가 그 날에 강림하실 때에’이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로 정관사가 쓰인 것에서 알수 있듯이 하나님의 작정속에 이미 정해져 있는 바로 그 날이다. 
앞선 내용에서 바로 그 날에 믿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신다. 그 날에 이런 심판과 나뉨이 있을 때에 그분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놀랍게 여기심을 얻으시게 된다. 바로 이 성도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일행의 증거를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영광을 받으시고’라고 번역된 ‘엔독사스데나이’의 원형 ‘엔독사조’는 ‘영화롭게 하다, 찬미하다, 본성이나 속성이 긍정적으로 인식되거나 인정되고 평가받다’라는 의미로 매우 중요한 표현인데 신약에서 본장의 10절과 12절에 단 번 사용된다. 이것은 ‘~하게 하다’라는 접두사 ‘엔’과 ‘영광 돌리다, 찬양하다’라는 의미의 ‘독사조’라는 표현의 합성어이다. 
재림시의 성도들의 어떤 모습이 주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도들의 구속이 완성될 것인데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의 모습이 그리스도께 영광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고 그래야만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주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다우마스데나이’는 비범하고 기이한 일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다우마조’의 부정사 수동태이다.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전에는 감추어졌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경탄해 마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면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그 날에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들은 그 모습에 경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한글 번역은 해당 부분을 괄호 처리하고 있다. 원문상에는 괄호가 없다. 본문은 앞선 ‘믿는 자’를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재림 때에 놀랍게 여기게 되는 모든 믿는 자들 속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본문을 삽입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증거를 믿은 너희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 놀라움에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NIV는 이를 'This includes you, because you believed our testimony to you.’, 이 믿는 자들은 너희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증거를 너희가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바울의 증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핍박과 환난,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현재 환난을 극복하고도 남을만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1:10 Having dealt with the punishment threatening those who refuse to acknowledge God and who disobey the gospel of the Lord Jesus, among whom are numbered the persecutors of the Thessalonian community, Paul returns to the theme of v. 7b, the parousia of Christ, with ὅταν ἔλθῃ (“when he comes”). Paul does so because the day of the Lord’s coming will be the day of judgment when sentence will be passed and executed against the opponents of God and God’s people. V. 10 emphasizes the identification of the Christian community with the coming Lord on the day of judgment and salvation without elaborating on the reward to be received by the followers of Christ for their faithfulness. Just as Paul is elusive about the nature of the vengeance to be inflicted by the Lord Jesus, he is also elusive about the nature of the reward to be bestowed.
Both of the two parallel infinitival purpose clauses, ἐνδοξασθῆναι ἐν τοῖς ἁγίοις αὐτοῦ (“to be glorified in the presence of his saints”) and θαυμασθῆναι ἐν πᾶσιν τοῖς πιστεύσασιν (“to be wondered at in the presence of all those who have believed”), are probably derived from OT texts. Here they are used to express the purpose of the Lord’s coming on the day of judgment, a purpose differing radically depending on whether one is a member of the faithful people of the Lord or an enemy of God.
The first clause was almost certainly constructed from the LXX version of Ps. 88:6 (89:7), which speaks of God ἐνδοξαζόμενος ἐν βουλῇ ἁγίων (“being glorified in the council of the saints”), since the combination of the rare compound form ἐνδοξάζεσθαι and ἁγίος only occurs here and in 2 Thes. 1:10 of the Christian Bible. Originally in Ps. 88:6 the βουλὴ ἁγίων referred to the angelic council (or at an even earlier stage to the gods of the nations around Israel, who are called the sons of God in Ps. 82:6f.). Like the people of Qumran, who referred to themselves, along with the angels, as the holy ones, Paul uses ἅγιοι (“holy ones” or “saints”) of both Christians and angels (cf. 1 Thes. 3:13; 1 Cor. 1:2). Here it denotes the people of God rather than the angels, as the corresponding term, τοῖς πιστεύσασιν (“those who have believed”), in the second part of the verse reveals.
Aus (Comfort, 99) urges that the infinitives ἐνδοξασθῆναι and θαυμασθῆναι in v. 10 be given causal translations like “to show Himself [sic] glorious” and “to show Himself [sic] wonderful/marvelous.” He bases this on the fact that the LXX often understands “δοξάζεσθαι in light of the Hebrew niphal construction not as a true passive but simply as intransitive or causative.” This would make good sense in the context. However, since Aus fails to explain how Paul’s Greek-speaking Thessalonian converts would have known to understand the two infinitives in a causal sense, this suggestion must be rejected.
The compound form ἐνδοξάζεσθαι, found only here in the NT, means “to be glorified or honored,” but a proper understanding of it in v. 10 depends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prepositional phrase ἐν τοῖς ἁγίοις αὐτοῦ. The preposition ἐν (“in”) can be viewed as instrumental, giving the meaning “by or through his saints”; as causal, leading to the translation “because of his saints” (so Frame, 237); or as locative, in the sense that the glory of Christ will be mirrored in the lives of his saints (so Morris, 207) or in the sense that his glorification will occur “in the presence of his saints.” This last sense agrees with the meaning of ἐν in Ps. 88:6 (LXX), but more importantly it counterbalances the physical exclusion of the persecutors of the Thessalonian community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his mighty glory when he comes (v. 9) by making clear that the Lord will be present in the midst of the community of his saints and that they will share in his glory. This interpretation seems to leave unanswered the question of who will glorify Christ, but it should not be forgotten that one important theme in the eschatological thought of Paul and other early Christians was that the enemies of Christ would ultimately be forced to honor or glorify him (cf. Phil. 2:10f.). If this thought lies behind v. 10, it makes the glorification of Christ in the midst of his saints by their persecutors an ironic reversal in which the Thessalonians will be vindicated by their very enemies. Although this interpretation would make good sense of v. 10, it reads rather more into the passage than can be determined from what is actually written.
The second purpose clause of v. 10 may have been derived from the LXX text of Ps. 67:36 (68:35), where θαυμαστὸς ὁ θεὸς ἐν τοῖς ἁγίοις αὐτοῦ (“God will be marveled at in the presence of his saints”) appears, or perhaps from the LXX of Ps. 88:6 (89:5) through a compression and paraphrasing of the synonymous parallelism of the text, which includes a reference to τὰ θαυμάσια (“the wondrous deeds”) of the Lord and to the ἐκκλησίᾳ ἁγίων (“congregation of the saints”). Whatever may be the case in this matter, this second purpose clause must be understood in the same general way as the first one. Just as v. 9 has a wider group in mind than the persecutors of the Thessalonians, so πᾶσιν τοῖς πιστεύσασιν (“all those who have believed”) in v. 10 includes all Christians who come to faith in Christ. The aorist tense of the participle πιστεύσασιν is somewhat surprising. The present tense would seem more appropriate, but the participle probably has in view the actual coming to faith of Christians, which is antecedent to the coming of Christ as Lord.
The ὅτι clause that follows is a parenthetical remark evoked by the reference to faith in the preceding phrase. Best (266) observes that it is “the kind of thing which takes place so easily in dictation or in the revision of the copy.” For example, 1 Cor. 1:6 provides a close parallel when Paul interjects the words καθὼς τὸ μαρτύρ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 ἐβεβαιώθη ἐν ὑμῖν (“just as the testimony of Christ was established among you”) into his opening thanksgiving. But with Aus (Comfort, 101f.) we can go further than this. If 2 Thessalonians were a carefully composed pseudonymous letter based on 1 Thessalonians, as is increasingly maintained, such an awkward parenthesis would be inexplicable, a point that has not received sufficient attention from those denying Pauline authorship.
The interruption of the flow of v. 10 by the insertion of this parenthetical remark about the origins of the Thessalonians’ faith was probably intended to personalize the preceding statements to the situation of the Thessalonians. μαρτύριον (“testimony”) broadly takes in the whole preaching and teaching activity of Paul and his colleagues. It is followed by the subjective genitive ἡμῶν (“our”) in correspondence with such Pauline expressions as “our gospel” (cf. 1 Thes. 1:5; 2 Cor. 4:3) and “my gospel” (cf. Rom. 2:16; 16:25). The content of the testimony directed toward the Thessalonians concerned Christ, as 1 Cor. 1:6 indicates, and was the basis of their faith. By this parenthetical remark Paul connects his readers with the saints, those who have believed in Christ, in whose presence Christ will stand on the day of judgment as their redeemer (cf. 1 Thes. 1:10) and vindicator.
The final words of the verse, ἐν τῇ ἡμέρᾳ ἐκείνῃ (“on that day”), clearly referring to the coming day of the Lord (cf. 1 Thes. 5:2 and Is. 2:10f., 19f.), are separated from the rest of the temporal clause by the parenthetical clause and are unnecessary for the thought of the text. This suggests that Paul was working with pre-formed material into which he inserted his personalizing comment. This possibility is made the more likely by several other factors. (1) Vv. 7b–10 exhibit an inordinately high number of references to a variety of LXX texts without any formal citations. The common denominator between most of the references is the theme of divine judgment, showing that a conscious attempt was made to formulate a statement about divine judgment based on the OT. (2) A sudden change occurs in vv. 7b–10 as the second person pronouns and verbs predominating in vv. 3–7a and vv. 11f. cease except for Paul’s parenthetical remark in v. 10 where he personalizes the depiction of the judgment in vv. 7b–10 for the readers. (3) The reference to those not knowing God and not obeying the gospel in v. 9 introduces a new and unexpected description of the Thessalonians’ persecutors. (4) The repeated use of synonymous parallelism in vv. 7b–10 is not typical of Paul’s normal epistolary style. This evidence argues forcefully that the material in vv. 7b–10 existed prior to its inclusion in 2 Thessalonians 1 (cf. Best, 266f.), though it is not possible to determine in what form it originally existed or whether it originated with Paul. Paul introduced this material into 2 Thessalonians because it addressed one of the major questions troubling the recipients of his letter in their time of persecution and affliction, namely, the question of God’s justice. In conjunction with vv. 5–7a it is intended to indicate the character of God’s righteous judgment for the Thessalonian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29–232.
 
11-12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첫번째 중보기도이다. 우리(바울, 실라,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항상 기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중보기도의 초점은 다가올 영광의 날에 맞춰져 있었다. 
 
11절) 기도의 첫번째 내용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이다. 본문의 내용은 ‘히나’ 가정법으로 시작된다. 기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내용이 두 절에 걸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부르심’은 하나님이 성자의 구속을 기초로하여 성령을 통해 죄인들을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무조건적인 부름이지만 분명한 목적을 가진 부르심이다. 의로움과 영화로움(롬 8:30),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이르게하심(살전 2:12)이 바로 그 목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처음 부르실 때 우리의 상태는 부르심의 목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갈 1:13-15) 이는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 우리 자신이 그에 부합하고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그렇게 여기심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부름은 ‘클레시스’로 ‘어떤 것에 참여하거나 출석하거나 관여하도록 하는 권위가 있는 부름’을 의미한다.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불러주셨고 우리를 합당한 자로 여겨주셨기에 우리가 그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그 영광스러움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이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두번째 내용으로 모든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표면적 주체는 일차적으로 믿는 자들, 성도들이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이면적, 근본적인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루게 하시고’로 번역된 ‘플레로세’의 원형 ‘플레로오’는 본래 그릇에 물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문에서는 ‘목적한 바를 완전하게 성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취를 ‘엔 뒤나메이’, 능력으로 이루신다. 
‘선’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직후부터 그 마음속에 소원으로 주신 것이다.(엡 2:10)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던 성도는(엡 2:3)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심령으로 그 선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게 된다. ‘믿음의 역사’는 앞선 살전 1:3에도 등장하는데 그를 부르시고 구원을 완성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의 실생활 속의 모든 외적 행위를 말한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속에 모든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때에 가능한 것이다. 
 
12절)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세번째 내용이다. 앞서 10절에서 그 날에 주님의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라고 말한 바울은 이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영광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그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중보기도 네번째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역시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영광이 서로 상대방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5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분이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고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삶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능력으로 예수의 재림시에 영광을 받게 될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오직 그 날에 나타나는 영광이 인간의 공로를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고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한 종말에 대한 인식, 종말 신앙을 가짐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라고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은혜를 힘입으면서 동시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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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indeed God considers it hjust ito repay with affliction those who afflict you, and to grant jrelief to you who are afflicted as well as to us, when kthe Lord Jesus is revealed from heaven lwith his mighty angels min flaming fire, inflicting vengeance on those nwho do not know God and on those who odo not obey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They will suffer the punishment of peternal destruction, qaway from2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e glory of his might,
h [Rev. 6:10]
i [Ex. 23:22; Joel 3:4, 7]
j [Rev. 6:11; 11:18; 14:13]
k See Luke 17:30
l See Jude 14
m Isa. 66:15, 16; Matt. 25:41; 1 Cor. 3:13; Heb. 10:27; 12:29; 2 Pet. 3:7; [Mal. 4:1]
n See Gal. 4:8
o Rom. 2:8
p [Phil. 3:19; 1 Thess. 5:3]
q Isa. 2:10, 19, 21; [ch. 2:8]
2 Or destruction that comes from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6–9.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6–9.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을 통해서 환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심
 
6절)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하나님
본절에서 '환난을 받게하는’이라는 표현은 ‘들리부신’은 ‘들리보’의 현재 분사 능동태 표현이다. ‘들리보’는 원래 포도를 짓눌러 즙을 짜내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신약에서는 사람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압박한다는 의미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성도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환난으로 갚으실 것이다. 
 
‘갚으시고’로 번역된 ‘안타포두나이’의 원형은 ‘안타포디도미’로 ‘~에 대하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안티’와 ‘되돌려주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포디도미’의 합성어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을 있는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보응하시며 선한 행실에 대해서도 갚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상과 벌로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의로 보응하신다는 믿음은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7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의 핵심이다. 
‘안식으로’에 해당하는 ‘아네신’의 원형 ‘아네시스’는 ‘~를 향하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나’와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히에미’의 합성어로 늦추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 팽팽했던 활줄이 느슨해진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바울이 말하는 ‘아네시스’, 안식은 이 세상의 혹독한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마음 졸임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날마다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있는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그 안식을 ‘우리와 함께’ 갚으신다고 말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로 표현된 바울과 실라, 디모데 역시 환난 가운데 안식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시니’ 이 표현은 원어에서는 6정 상반절에 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대한 묘사이다. 본문에서 ‘나타나다’라는 의미의 ‘아포칼륍세이’의 원형 ‘아포칼립시스’는 ‘~로부터’를 의미하는 ‘아포’와 ‘덥다, 가리다’라는 의미의 ‘칼립토’의 합성어로 본래 덥개를 벗기는 것,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명백히 보이는 것을 나타내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계시로 번역된다.(고전 14:6; 갈 1:12; 엡 3:3) 이는 신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개념이다. 주님의 재림은 승천 이후 사람들 눈에 감추어졌던 예수께서 신적이고 초월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은 그분의 재림시에 나타날 두가지 모습을 묘사한다. 첫번째는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내려오시는 것이다. 천사들 자체가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보다는 천사들은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두번째는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불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을 상징한다.(단 7:9-10)
다니엘 7:9–10
9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예수께서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표현은 그분의 재림이 심판 집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준다. 
 
8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형벌의 대상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전자는 이방인, 후자는 유대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한 모두 불신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복음에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기에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고 있는가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형벌은 통제되지 않는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처벌하시는 분이시다. 
 
9절) 본문의 이런 자들은 앞서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원문을 보면 분리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가 두번 사용되었다. 이는 재림시 형벌을 당하는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의 얼굴’에 해당하는 ‘프로소푸 투 퀴리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되었던 것처럼(창 4:10-1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고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 또한 ‘그의 힘의 영광’은 하나님나라의 충만한 영광을 상징한다. 이는 재림 이후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의미하는데 이런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영광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받으리로다’로 번역된 ‘티수신’은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유일하게 쓰인 동사이다. 원형은 ‘티노’로 ‘치르다, 지불하다’의 의미이다. 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의 표현으로 주님의 재림시에 이 형벌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이 현 시대에 처벌 받지 않고 도리어 더 형통해 보이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주께서 불꽃 가운데 재림하심으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 형통에 즐거워하고 있는 악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현재 당하는 고난에 좌절하거나 낙망할 필요가 없다. 
 
영원한에 해당하는 ‘아이오니온’은 ‘끝이 없다’라는 의미이고 멸망에 해당하는 ‘올레드론’의 원형 ‘올레드로스’는 ‘파멸, 멸망’을 의미한다. 말그대로 파멸, 형벌이 끝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당하는 이들은 그 존재가 영원히 소멸하여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 없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매튜 헨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항상 죽어가고 있을 것이나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최후의 형벌은 불멸의 영혼에게 가한 형벌이기 때문에 영속적인 모습을 띠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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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fevidence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at you may be gconsidered worthy of the kingdom of God, for which you are also suffering
f [Phil. 1:28]
g [Acts 14:22]; See Luke 20:3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5.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5.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면서 앞선 인사말 후에 본론 첫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표로서의 성도의 환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 문제가 그만큼 시급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5절) 원어 자체에는 ‘이는’이 없다. 본절에서 말하는 것은 앞선 4절의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나타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박해와 환난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는 표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마땅히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본문에서 ‘표’로 번역된 ‘엔데이그마’는 증거라는 뜻으로 진실이 규명되거나 반증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사실 문제를 규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이 이것이 산성인지 염기성인지를 알기 위해서 페톨프탈레인 용액을 떨어뜨리거나 리트머스 시험지에 집어넣어 변화되는 색깔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공의로운’에 해당하는 ‘디카이아스’의 원형 ‘디카이오스’는 편벽됨이나 그릇됨이 전혀 없이 옳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심는대로 거두시는 분이시다.(갈 6:7) 
 
 
성도의 고난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인가? 하나님의 공의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형벌의 심판으로 임하게 된다. 고난이야말로 믿는 자들이 이 세상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마치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모래바람과 목마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과 같다. 성도가 고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알고 이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성도들에게는 보상과 구원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성도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 인내하고 믿음을 지킴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다’라는 표현인 ‘카단시오데나이’의 원형 ‘카탁시오오’는 법적 용어로 ‘적합하다고 간주하다. 합당하다고 여기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신적 수동태 표현으로, 합당히 여기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예수님의 재림시에 완성될 곳이다. 고난을 이긴 성도야말로 최후 심판 이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로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받다’라는 ‘파스케테’는 ‘파스코’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변치 않는 진리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나라’는 앞선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도의 고난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야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위해서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영광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분을 대적하는 세상속에서 그분을 믿는, 그분을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신앙때문에 일어날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으며,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다. 
- 히 12:3-11 
 
본문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말하고 있다.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
2)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당하고 경험하고 있는 박해와 환난
3) 박해와 환난 가운데 그들의 인내와 믿음
 
1:5 The interpretation of this verse is pivotal for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whole letter. Unfortunately it resists easy explanation. Uncertainty exists concerning the connection of ἔνδειγμα τῆς δικαίας κρίσεως τοῦ θεοῦ (“evidence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with its immediate context and the significance of the term ἔνδειγμα (“evidence” or “sign”). Since ἔνδειγμα can be either nominative or accusative, we must either supply ὅ ἐστιν or take ἔνδειγμα as an accusative in apposition. In either case the question arises as to what constitutes the evidence of God’s righteous judgment. There are three possible answers: (1) It is the Thessalonian Christians’ endurance and faith; (2) it is the persecution and affliction that they experience; or (3) it is their endurance and faith in the face of persecution and affliction.
The most common explanation among English-language commentators views the “evidence” as the perseverance of the Thessalonians in spite of persecution and affliction (see, e.g., Frame, 226; Morris, 198; Bruce, 149; Best, 254f. pushes this interpretation further by claiming that even Paul’s boasting is included in the sign). Common to this understanding of the “evidence” is the belief that Phil. 1:28, where ἔνδειγμα (“sign” or “proof”) occurs, offers a basis for explaining 2 Thes. 1:5. According to Phil. 1:28 the fact that the Philippians were not intimidated by those who opposed them was a sign (ἔνδειγμα) of destruction to their opponents but for them it was a sign of their salvation from God. Thus for the Thessalonians the evidence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consisted in their endurance of oppression. Their perseverance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God’s help. Best (255), along with most others holding this view, sees a reference to the eschatological judgment of God, but Marshall (173) urges that the judgment in mind was a process taking place at the time the letter was written.
This whole line of explanation, whether the judgment is seen as a present process or a future one, fails on two scores. First, the grammar does not require us to assume that the “evidence” is the endurance and faithfulness of the Thessalonians in their persecution and affliction. In fact it is more natural to relate it to the words “in all your persecution and the affliction that you suffer” because of the word order in the sentence. The validity of this observation is confirmed by v. 5’s focus only on the suffering of the Thessalonians, not on their perseverance; furthermore, in vv. 6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s based on the application of the lex talionis to the oppressors, while those who are afflicted are granted relief without emphasis on their endurance (see von Dobschütz, 242). (I shall explore the way in which the suffering of the Thessalonians is understood as evidence for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n a moment.)
Second, reference to Phil. 1:28 is of dubious value since the meaning of the sign differs between that text and 2 Thes. 1:5. In the former the sign is proof of salvation for Christians and destruction for their adversaries, while in 2 Thes. 1:5 the sign concerns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Bassler (“Enigmatic Sign,” 499) rightly points out that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s not nearly so obviously connected with the endurance of the Thessalonians in the face of persecution as is the Philippians’ salvation with their fearless adherence to the faith. Put slightly differently, it is difficult to conceive in what way the Thessalonians’ perseverance presages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without introducing extraneous ideas into the text such as the notion that God has granted the Thessalonians the ability to persevere and remain faithful (see Rigaux, 620).
This observation effectively rules out the first and third possibilities described above for the identification of the “evidence” of God’s righteous judgment. It also points to the second, namely, that the persecution and affliction that the Thessalonians experienced was the evidence referred to by Paul.
The view that the evidence involved the actual persecution and the affliction of the Thessalonians has the support of a number of scholars (e.g., von Dobschütz, 242; Dibelius, 26; Rigaux, 620; Marxsen, 68; Bassler, “Enigmatic Sign,” 500f.). But generally this position has suffered from the inability of those who hold it to explain how tribulation and suffering provide direct evidence for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any better than those maintaining the third position described above.
Bassler (op. cit., 501–506), building on the work of Wichmann (Leidenstheologie), has convincingly shown that v. 5 sh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a theology of suffering that began to emerge prior to and during the first century AD (cf. Aus, Comfort, 71–75). Four element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theology of suffering, as such texts as Pss. Sol. 13:9–10, 2 Macc. 6:12–16, and 2 Bar. 13:3–10; 78:5 (see also 48:48–50 and 52:5–7) demonstrate (cf. Heb. 12:3–11, which also has strong affinities with a theology of suffering). First, a powerful sense of God’s retributive justice existed; second, present suffering by the pious was explained as chastisement (or atonement) that would make them worthy of future glory; third, the present untroubled position of the godless and their future affliction by God were seen as the reverse of the experience of the pious; and fourth, the present suffering of the elect was accepted as evidence of God’s election and justice. The affinities of 2 Thes. 1:5 and its context with the primary features of the emerging theology of suffering are striking, as Bassler has pointed out. First, vv. 6 and 8f. emphasize the retributive justice of God; second, v. 5 stresses that the suffering of the Thessalonians was intended to make them worthy of the future blessing described as the dominion of God; third, vv. 6f. present a reversal of fortunes when those who afflict others will themselves be repaid by God with affliction and those who are currently afflicted will be granted rest; and fourth, vv. 3f. reveal that the evidence for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s the actual suffering of the Thessalonians that has the effect of making them worthy of God’s dominion (cf. Heb. 12:3–11).
Bassler (“Enigmatic Sign,” 507–509) demonstrates that this interpretation has an important consequence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 between 1:5–12 and 2:1–12. Taking up a suggestion of R. Aus (Comfort, 36), she maintains that 1:5–12 “deal[s] directly with the issue [of persecution] that raised the Day-of-the-Lord question” in 2:1–12 (508). Bassler reconstructs the connection in the following manner. For some reason the community assumed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come (or the author thought that they did; 2:2), but their experience of persecution directly contradicted this, calling into question God’s justice since the oppression of the elect should not have persisted after the day of the Lord had arrived. The author of the letter used ideas drawn from the theology of suffering to argue that the persecution of the readers was actually evidence for God’s justice in that it was making them worthy to share in the dominion of God in the future and at the same time he maintained that those who oppressed them would be subject to divine retribution at the time of the parousia (1:6, 8f.; 2:9–12).
Although Bassler’s views concerning the day of the Lord require refinement (see my comments on 2:1), the strength of her interpretation is that it makes better sense of 1:4f. than any other explanation of these problematic verses, and attempts to clarify the inner connection between the affliction of the Thessalonians and the problem created by various claims among them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rrived. Thus, as suggested above, the correct understanding of vv. 4f. enables us to interpret more precisely the main thrust of the letter.
The evidence spoken of by Paul involves τῆς δικαίας κρίσεως τοῦ θεοῦ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is can only be a reference to future judgment associated with the day of the Lord. Paul does not bring the judgment into the present on account of his belief in the imminence of the parousia of Christ (cf. 1 Cor. 4:5). The mention of the future retributive justice of God in v. 6 and the compensatory justice of God in v. 7 confirms this interpretation. The prospect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n the near future was integral in maintaining the faith and commitment of new Christians when they encountered opposition from those around them and in the face of the behavioral demands of their new religion.
The clause εἰς τὸ καταξιωθῆναι ὑμᾶ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 (“that you may be considered worthy of the dominion of God” [on the use of “dominion” for βασιλεία see comments on 1 Thes. 2:12]) may express either purpose or result. Best (255) relates it directly to the preceding phrase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It seems much more probable, however, that it refers back to the persecution and affliction mentioned in v. 4. The idea of being considered worthy of the dominion of God is difficult to understand either as the purpose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or as its result without reference to the behavior or experience of the Thessalonians (cf. 1 Thes. 2:12). Also the phrase “the dominion of God” is qualified by the words ὑπὲρ ἧς καὶ πάσχετε (“for which also you suffer”). This directs the reader back to the words “in all your persecutions and afflictions that you bear.” If the εἰς τό clause refers back to the persecution and affliction mentioned in v. 4, then it should be taken as a result clause.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readers to suffer in order to be considered worthy of God’s dominion, but the writer certainly wished to comfort them with the fact that as a result of their experience of affliction they were considered worthy of it by God (cf. Aus, Comfort, 60).
“The dominion of God” here, as is generally the case in Paul’s letters, alludes to the sphere in which the future salvation of God will be experienced, and, as on a number of occasions, its use is connected with the behavioral or experiential side of the Christian faith (cf. 1 Thes. 2:12; 1 Cor. 6:9f.; Gal. 5:21). The Thessalonians’ suffering resulted from their desire to share in the dominion of God, and hence Paul seeks to reassure them that their suffering will be rewarded (v. 7), while those who inflict suffering on them will in turn suffer (vv. 6, 8f.).
2 Bar. Syriac Apocalypse of Baruch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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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giving
bWe ought always to give thanks to God for you, brothers,1 as is right, because your faith is growing abundantly, and the love of every one of you for one another is increasing. Therefore cwe ourselves boast about you din the churches of God for your steadfastness and faith ein all your persecutions and in the afflictions that you are enduring.
b ch. 2:13; See Eph. 5:20; 1 Thess. 1:2, 3
1 Or brothers and sisters. In New Testament usage, depending on the context, the plural Greek word adelphoi (translated “brothers”) may refer either to brothers or to brothers and sisters
c [2 Cor. 7:14]; See 1 Thess. 2:19
d [1 Thess. 1:8]; See 1 Cor. 7:17
e [Mark 10:30]; See 1 Thess. 2: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3–4.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3–4.
 
1-2절의 인사말에 이어서 3-4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으로 인한 감사와 자랑을 하고 있다. 
 
3절) 본문에서 ‘~할지니’로 번역된 ‘오페일로멘’의 원형 ‘오페일로’는 ‘~해야한다, 책임을 행하다, 빚지다’라는 의무로 본래 지불해야만하는 돈을 빚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마 18:28; 눅 7:41) 즉 이 단어는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만하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롬 15:27) 본서 2:13에서 다시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게 항상 감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빚은 누구에 대한 빚, 부채인가? 일차적으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빚이라고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더욱 자라고 사랑이 서로 충성함을 가능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포도열매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농부가 열심히 노력해서 열매를 얻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햇살과 비를 내리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심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의 감사의 이유는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감사의 근거는 믿음과 사랑이다.(살전 3:6)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신앙의 태도(수직적)라면 사랑은 이 믿음이 타인에게 나타나는 수평적 신앙의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을 함께 강조하는데(고전 13:13; 살전 1:3, 5:8) 본절에서는 소망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소망의 자질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된 재림에 대한 잘못된 교훈이 이들에게 올바른 소망의 자세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본문에서 ‘더욱 자라고’라는 표현은 ‘휘페라욱사네이’으로 이것의 원형 ‘휘페라욱사노’는 ‘~을 초과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휘페르’와 ‘자라다, 번성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욱사노’의 합성어로 ‘지나치게 증가하다, 엄청나게 자라다’라는 강한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된 표현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상상한것 이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급속도로 자라간 것이다. 또한 이 표현은 현재 시제 직설법으로 성장이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ESV는 ‘is growing abunduntly’로, NIV는 ‘is growing more and more’로 번역했다.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며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감사할 일이다. 
 
‘풍성함이니’로 번역된 ‘플레오나제이’의 원형 ‘플레오나조’는 남아돌 정도로 풍성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바울은 앞서 살전 3:12에서 이 표현을 이용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풍성함을 중보기도했었는데 이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이 표현 또한 현재직설법으로 지속해서 성도들 서로에 대한 사랑이 풍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4절) 앞선 3절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감사라면, 4절은 박해와 환난중에 인내와 믿음으로 인해서 여러 교회앞에서 이를 자랑한 것이다. 앞선 1:6에서도 
데살로니가전서 1:6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바울은 이를 자랑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쓴지 이제 2-3개월의 시간이 지난후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본문의 박해라는 표현은 ‘디오그모이스’로 그 원형은 ‘디오그모스’인데 이는 원래 사냥개가 사냥감을 뒤쫓는 모습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사냥개가 표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쫓아가는 것처럼 적대자들이 신자들을 괴롭히거나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것, 특히 종교를 파괴하거나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어 ‘환난’이로 번역된 ‘들립세신’의 원형’들립시스’는 포도즙틀로 포도를 짜듯이 ‘부서질 정도의 압박’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울은 박해와 환난, 디오그모이스와 들립세신이라는 동의어를 반복하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자신의 전도 사역이 이러한 환난으로 점철되었는데 자신을 본받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러한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 인내와 믿음을 지킨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4–5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린도후서 11:23–27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 표현은 ‘아네케스테’로 이는 ‘아네코마이’로 ‘스스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불쾌감이나 어려움을 견디다’라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위함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묵묵히 이를 견뎌냈던 것이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참는 것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랑하고 있다. ‘인내’에 해당하는 ‘휘포노네’는 ‘아래에(under)’를 의미하는 ‘휘포’와 ‘머물러 있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무겁게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 아래에서 굳건하게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마지못해 그렇게 한다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견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티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믿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믿음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 더욱 빛을 발한다. 박해와 환난 가운데 변치 않는,  인내하는 믿음을 보여줄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자랑할 만한 믿음인 것이다. 
 
본문의 ‘하나님의 여러 교회’는 앞서 살전 1:8의 교회를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8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현상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교회에 퍼져나갔다.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 헬라어 표현은 ‘아우투스 헤마스 엔 휘민 엥카우카스다이’이다. ‘헤마스’는 우리가, ‘아우투스’는 친히라는 의미인데 한글 성경은 ‘엔 휘민’을 번역하지 않았다. 이는 너희를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제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친히 너희에 대해서, 말미암아 자랑하노라’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복음이 능력있게 교회안에 역사함으로 주변의 여러 교회가 이를 본받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현상의 핵심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초반에 세워진 교회로 데살로니가 도시에 세워진 어린 교회였지만 믿음의 성장이 매우 빠른 교회였다. 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박해 가운데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바나바와 함께 세운 교회였다(행 13:13~14:23). 이후 바울은 그곳을 재 방문하여 믿음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행 16:1-6)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정면으로 공격했으며 이방인 출신 성도들도 그 복음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미혹에 넘어갔다. 어렵게 전파된 복음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자 바울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급하게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성장은 여러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성장이 빠른 데살로나가교회에 대해서는 자랑을 아끼지 않았고 성장이 느린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진심어린 걱정과 믿음의 성장을 도우려는 손길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꾸짖고(갈 1:6, 9) 한편으로는 염려하면서(갈 4:11) 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갈 4:19)
우리의 사역이 모두 데살로니가교회 같기를 바라지만 각각의 교회마다, 또한 각각의 개인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기에 어떤 이에게는 칭찬과 감사를, 어떤 이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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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ul, Silvanu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in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 For ver. 1, 2, see 1 Thess. 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1–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1–2.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첫번째 서신에 이어 기록된 두번째 편지이다. 전서와 동일하게 후서에서도 세명의 발신자가 동일하게 등장한다. 
바울은 전서를 기록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했는데 그 때에도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함께 동행했다.(행 18:1, 5) 첫번째 서신 이후 불과 2-3개월 이후에 본 서신이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바로잡고자 후서를 기럭하였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단의 무리들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고 그들중에는 재림이 임박했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며 무위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식으로 인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울은 기도하며 본 서신을 써서 보낸 것이다. 
 
1절) 실제로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발신자 :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
수신자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있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기에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를 1절을 통해서 보자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 교회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나의 주인되신,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에만이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절) 한글 번역에는 ‘헤몬, our’가 번역되지 않았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그를 믿는 백성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롬 8:14)  
당시 1세기에는 로마의 황제를 주, ‘큐리오스’라고 칭하며 숭배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며 그분의 뜻을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구한다.  
은혜(카리스) :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 자녀로 여기시며 용서와 같은 선물을 주시려는 마음,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호의
평강(에이레네, 샬롬) : 전쟁의 중단 또는 부재 하지만 바울은 사람 사이 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 즉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완전한 웰빙을 의미한다. 온전히 카리스, 은혜를 받고 누리는 이가 내면에 누리는 내적인 평화를 지칭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평강은 불가능하다. 죄로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던 이들에게 진정한 샬롬, 에이레네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안에서 인간은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된다.(롬 5:1)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이와 관련해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영적으로 항상 갈증을 느껴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파는 데 몰두하던 자들도(렘 2:13)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에이레네’를 경험하게 되면 더이상 자신을 위해 터진 웅덩이를 파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 완전한 부요함을 누리게 된다.(요 7:35)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와 동일한 문안인사로 후서를 시작하고 있다. 
 
 
1:1–2 The first difference between the salutation of 2 Thessalonians and that of the other letter addressed to the church at Thessalonica is to be found in the qualification of God as πατρὶ ἡμῶν (“our father”). The appellation of God as “our father” is common in the salutations of Paul’s letters and in fact is only lacking in 1 Thessalonians (cf. Rom. 1:7; 1 Cor. 1:3; 2 Cor. 1:2; Gal. 1:3; Phil. 1:2; Col. 1:2; Phm. 3). It reflects Paul’s conception of Christians as forming the family of God in a metaphorical sense and is to be seen alongside those texts where believers are called the children of God (cf. Rom. 8:14–23; Gal. 3:26; 4:4–7).
The greeting of this letter is fuller than that in 1 Thessalonians. But it corresponds to those of every other letter of Paul except Colossians (and possibly Galatians, depending on how the textual evidence is assessed), if ἡμῶν (“our”) in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s part of the original text. The textual evidence is divided fairly evenly on this. Both the presence and the absence of the “our” are explicable in terms of normal rules of textual criticism. A copyist might have added it to conform to the standard greeting of the Pauline letters or omitted it for stylistic reasons since the same wording occurred in the preceding verse. Therefore the precise formula of the original text cannot be decided on with certainty. In any case this is not a significant factor since God has been described already as “our father” in the previous verse.
Trilling (35), who maintains that Paul did not write 2 Thessalonians, claims that the prescript itself provides evidence for his position. He argues that the prescripts of 2 Thessalonians and 1 Thessalonians are more alike than those of any other two Pauline letters and that certain peculiarities of 1 Thessalonians have been preserved in 2 Thessalonians. The unusual features include the naming of three senders (two of whom play no further part in the letter), the naming of the addressees as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not “the church in Thessalonica,” the direct connection of the recipients with God and Christ, and the absence of Paul’s apostolic title. All this for him is a sign of inauthenticity as it reflects borrowing from the first letter in an attempt to create the impression of authenticity. He also believes that the expanded greeting in 2 Thessalonians (v. 2) is awkward because of the mention of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n v. 1. According to Trilling this may show an awareness of the standard greeting of later Pauline letters.
These arguments are questionable. The unusual details of 1 Thes. 1:1 might equally be used to argue for the inauthenticity of the whole of 1 Thessalonians. Moreover, the supposedly striking differences are not as striking as Trilling thinks. In both 1 Cor. 1:1 and Phil. 1:1 Paul associates others with himself in the writing of those letters. In the case of the former, Sosthenes, who is a co-sender with Paul, plays no further role in the letter, and in the case of the latter, Paul does not refer to his apostolic title, perhaps out of deference to his inclusion of Timothy as an sender of the letter. If Paul could address 1 Thessalonians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there is no reason why he could not have done it a second time. With regard to the supposedly expanded greeting of v. 2, it is just as possible that the greeting of 1 Thessalonians should be viewed as attenuated over against the normal one employed by Paul in 2 Thes. 1:2 and most of his other letters. To the extent that the repetition of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s otiose and awkward in the prescript it would have been so as much for an imitator as for Paul himself, and so this proves very little.
Trilling’s treatment of the prescript must be rejected as an unconvincing attempt at substantiating his thesis regarding the inauthentic nature of 2 Thessalonians. If 2 Thessalonians is inauthentic, the prescript does not provide serious evidence for the thesi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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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서론
 
1. 저자와 제목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등장하는 종말론이 다른 것처럼 보이고, 데살로니가 후서의 어조가 더 차갑게 느껴진다라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면밀한 검토를 해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쓴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데살로니가후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어조가 더 차갑다는 것은 상황의 변화로 인해서 좀더 강력하게 그들을 향해 책망을 했기 때문이다. 
 
Although some scholars today have questioned Pauline authorship of 2 Thessalonians, the unanimous testimony of the early church fathers supports Pauline authorship. The main reasons given by those who question Pauline authorship include: (1) The eschatology of 2 Thessalonians is regarded as different from that of 1 Thessalonians. Specifically, the sudden/imminent expectation of Christ’s return in 1 Thessalonians 4:13–5:11 is said to be inconsistent with the requirement in 2 Thessalonians 2:1–12 that specific signs must first take place. (2) The many commonalities between 1 and 2 Thessalonians are alleged to reflect literary dependence, which is regarded as inconsistent with Paul’s authorship of both. (3) Second Thessalonians supposedly has a colder tone than 1 Thessalonians. (4) Second Thessalonians 2:2 and 3:17 are thought to make best sense if written by a pseudonymous author.
A careful evaluation of these objections, however, supports the conclusion that Paul was in fact the writer of 2 Thessalonians. The duplicity entailed in the forgery hypothesis (see 3:17) is hardly credible. In addition, the above objections can be readily refuted: (1) Both letters portray the second coming as an unwelcome and sudden surprise for unbelievers (1 Thess. 5:2–3; 2 Thess. 2:8–12) but an anticipated and welcome event for those who are in Christ (1 Thess. 5:4–8; 2 Thess. 1:6–10; 2:13–17). Moreover, certain events precede the Lord’s return in 1 Thessalonians 5:3 as well as 2 Thessalonians 2:3–4, 9–10, and imminence can be seen both in 1 Thessalonians 4:15–17 and in 2 Thessalonians 1:7, 10; 2:1. A sudden and imminent eschaton was regarded as compatible with signs in Jewish and early Christian writings (e.g., Matthew 24–25). (2) Paul probably wrote 2 Thessalonians shortly after 1 Thessalonians, and may have referred to a copy of it. (3) The idea of a colder tone in 2 Thessalonians is exaggerated (see Literary Features). (4) Second Thessalonians 2:2 and 3:17 probably reflect Paul’s concern that a forged letter may once have exist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3.
 
 
2. 저작 연대
데살로니가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2차 선교여행기간 중 고린도에서 전서를 기록한지 몇개월 이후에 작성했을 것이다. 
바울은 전서를 기록한 이후 얼마되지 않아서 데살로니가의 상황이 급변했다라는 보고를 받았고(살후 3:11) 이를 위해 후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3. 주제
전서와 마찬가지로 후서의 주제는 재림이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배교와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말하고 있다. 이때에 주 예수께서 강림하심으로 불법한 자들을 폐하실 것이다.(2:8) 억눌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의를, 그들을 박해하던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진노를 베푸실 것이다.(1:5-10, 2:9-15) 
 
4. 목적, 계기, 배경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중 일부는 거짓된 편지를 통해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라는 거짓된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로인하여 미혹되어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일하지 않고 게으른 이들을 양산했고 교회는 이로 인해 여러 어려움들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은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이들을 안심시키고, 여러 박해에 직면한 이들을 격려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를 거부하는 일부 교회의 지체들의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서신을 썼다. 
The “reasons” for the letter seem to be two, with perhaps a third one sitting in the wings, as it were. What is not easy to decide from our distance is whether one of these is more important than the other, or whether their order was dictated in this case simply by “new things first.” As for the “occasion” itself, most likely it had to do with the return of Timothy to Paul and Silas in Corinth with “mixed news” about the situation in Thessalonica. On the one hand, the issue of the disruptive-idle turned out to be a matter of much greater consequence than Paul had apparently assumed in writing the first letter; and if our reading of the order and timing of these letters is correct, then this issue was being addressed by letter for the first time in our 1 Thessalonians, the letter Timothy was just then bringing with him on that trip to Thessalonica. Thus with Timothy’s return Paul now needed to deal with it in greater detail and severity than had been done before; and probably it comes at the end so as to be “heard” better by those for whose sake it was written.
On the other hand, the matter of the timing of the “day of the Lord” had become a new issue altogether; and Paul’s own uncertainty as to how this misinformation had been presented as from him in some way (see the commentary on 2:2 and 15) only adds to its complication for later readers of the letter. But because this has happened, we also now become privy to a part of Paul’s eschatological perspective that he would otherwise have had no reason to include in any of his letters.
But almost certainly lying behind the tensions created by these two matters is the increasing severity of the outside persecution that Paul deals with in the “thanksgiving” in 1:5–10. Whereas this material also adds to our larger understanding of his eschatology as such, one should never lose sight of its first purpose—to reassure these beleaguered believers that their persecutors have their own divinely appointed destiny. And therefore, even though such knowledge would not necessarily lessen their present pain, it should have served as comfort to know that God has not forgotten them, while at the same time it reassured them of God’s ultimate justice regarding their persecutors.
All of this is to say, then, that even though this is not the most significant of the Pauline letters in terms of our overall theological and ethical/behavioral insights into his gospel, it is not thereby so irrelevant as to assign it “cinderella” status among his letters. Here is another Pauline moment which as a whole helps us better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final outcome of the gospel itself, while at the same time giving us insight into the “everyday” nature of living Christ in a very pagan culture.
 Gordon D. Fee,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9), 241–242.
 
 
5. 문예적 특징
본서는 일반적인 서신서의 양식을 따른다. 인사말로 시작하여 기도와 축도로 끝난다. 본론은 일련의 주제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에 비하여 흔들리고 거짓된 가르침에 빠져있는 이들을 향해 직설적인 명령을 통해서 책망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전서에 비해서 차가운 어조로 보이는 것이다. 
 
6.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히실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때 불신자들은 정죄를 받고 신지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l:5~10, 2:9~14).
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다(1:10, 12, 2:14).
3)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과 인류의 마지막 반역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2:3~4, 9~12),
4) 불법의 사람은 복음을 거부한 모든 들을 속여서 예수님이 재렴하실 때에 확실히 심판받게 할 것이다(2:3, 6~12).
5)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의 자비심을 이용해선 안 된다 (3:6~15).
 
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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