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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we know that rthe law is good, if one uses it lawfully, understanding this, that the slaw is not laid down for the just but for the lawless and disobedient, for the ungodly and sinners, for the unholy and profane, for those who strike their fathers and mothers, for murderers, 10 the sexually immoral, men who practice homosexuality, enslavers,2 liars, perjurers, and whatever else is contrary to tsound3 doctrine, 11 in accordance with uthe gospel of the glory of vthe blessed God wwith which I have been entrusted.
r Rom. 7:16
s Gal. 5:23
2 That is, those who take someone captive in order to sell him into slavery
t 2 Tim. 4:3; [ch. 6:3; 2 Tim. 1:13; Titus 1:13; 2:2]
3 Or healthy
u [2 Cor. 4:4]
v ch. 6:15
w Titus 1:3; See Rom. 2:16; Gal. 2: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1:8–11.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1)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1) 헬, 건전한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1:8–11.
 
앞선 5-7절에서 바울은 이단을 경계하는 목적을 밝히면서 이단에 빠진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그들은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제 8-11절에서 율법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절) 바울을 율법을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그는 지속적으로 율법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임을 밝힌다. 롬 7:7-12절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7:7–12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며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바울은 이 율법의 기능과 의의에 대해서 디모데와 함께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오이다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오이다’의 현재 완료형으로 과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알아오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율법은 선하다’라고 말한 것에 조건이 붙는다. 그것은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이다. 본문에 ‘적법하게’라고 번역된 ‘노미모스’는 볼절과 딤후 2:5에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율법은 그 제정된 목적, 즉 죄를 깨닫게 하며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보여주는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될 때 선한 것으로 이해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 표현은 ‘노모스’라는 어근에서 나온 표현으로 ‘노모스’는 율법, 법이라는 의미이다. 8절 한 절 안에 ‘노모스’와 ‘노미노스’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딤후 2:5에서는 ‘법대로’ 경기하는 자의 비유속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디모데후서 2:5
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선한’으로 번역된 ‘칼로스’는 좋은, 아름다운, 유익한, 품질이 좋은, 어울리는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이것이 거짓 교사들의 변론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고 적법하게 사용되면 선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καλός -οῦ, ὁ; (kalos), 형용사. 좋은, 아름다운, 착한.  히브리어 등가: טוֹב 1 (36). 장소명에 대한 용례 정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미항.
형용사 용법
1. 좋은 — 바람직한 또는 긍정적인 자질; 특히 특정한 일에 적합한. 의미상 반의어: 나쁜. 관련 주제: 경건; 헌신; 경건; 친절; 선; 미덕/악 목록; 윤리; 황금률.
딤전 3:1 καλοῦ ἔργου
딤전 4:6 Ταῦτα ὑποτιθέμενος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딤전 6:12 ἀγωνίζου τὸν καλὸν ἀγῶνα τῆς πίστεως,
딤전 6:18 πλουτεῖν ἐν ἔργοις καλοῖς,
딛 3:8 ταῦτά ἐστιν καλὰ καὶ ὠφέλιμα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2. 좋은 (도덕적) — 도덕적 탁월성. 관련 주제: 경건; 헌신; 경건; 친절; 선; 미덕/악 목록; 윤리; 황금률.
딛 2:14 καὶ καθαρίσῃ ἑαυτῷ λαὸν περιούσιον, ζηλωτὴν καλῶν
딛 3:8 καλῶν ἔργων
딛 3:14 καλῶν ἔργων
약 3:13 δειξάτω ἐκ τῆς καλῆς ἀναστροφῆς τὰ ἔργα
벧전 2:12 ἔθνεσιν ἔχοντες καλήν, ἵνα,
3. 아름다운 —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지적이나 정서적으로 감탄할 만큼 흥분시키는. 의미상 반의어: 못생긴.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ὡραῖος. 관련 주제: 아름다움.
눅 21:5|| λίθοις καλοῖς καὶ ἀναθήμασιν
행 27:8 τινὰ καλούμενον Καλοὺς Λιμένας
4. 더 나은 (유익한) — 더 현명한 또는 더 유리한 그래서 바람직한.
마 18:8|| καλόν σοί ἐστιν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ζωὴν
막 9:42|| εἰς ἐμέ, καλόν ἐστιν
막 14:21|| καλὸν αὐτῷ εἰ οὐκ ἐγεννήθη ὁ ἄνθρωπος
롬 14:21 καλὸν τὸ μὴ φαγεῖν κρέα μηδὲ πιεῖν
고전 9:15 καλὸν γάρ μοι μᾶλλον ἀποθανεῖν ἤ—τὸ καύχημά
5. 품질의 좋은 — 불순물이 없는; 높고 특별한 순도가 있는.
마 13:45 ζητοῦντι καλοὺς μαργαρίτας·
6. 어울리는 — 어떤 사람이나 경우와 조화를 이루거나 적절한. 관련 주제: 맞다.
마 15:26|| Οὐκ ἔστιν καλὸν λαβεῖν τὸν ἄρτον τῶν
마 17:4|| Κύριε, καλόν ἐστιν ἡμᾶς ὧδε εἶναι·
막 7:27|| οὐ γὰρ καλόν ἐστιν λαβεῖν τὸν ἄρτον
막 9:5|| Ῥαββί, καλόν ἐστιν ἡμᾶς ὧδε εἶναι,
눅 9:33|| Ἐπιστάτα, καλόν ἐστιν ἡμᾶς ὧδε εἶναι,
명사 용법
1. 좋은 (도덕적 개념) — 도덕적 탁월함이나 우수성 의미상 반의어: 악 (본질). 관련 주제: 경건; 헌신; 경건; 친절; 선; 미덕/악 목록; 윤리; 황금률.
롬 7:18 τὸ δὲ κατεργάζεσθαι τὸ καλὸν
고후 13:7 τὸ καλὸν
갈 4:18 καλὸν δὲ ζηλοῦσθαι ἐν καλῷ πάντοτε, καὶ
살전 5:21 τὸ καλὸν κατέχετε,
약 4:17 εἰδότι οὖν καλὸν ποιεῖν καὶ μὴ ποιοῦντι,
여러 용어 명사로 사용
1. 좋은 행동 — 친절한 행동 혹은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여러 다른 행위.
마 26:10|| ἔργον γὰρ καλὸν ἠργάσατο εἰς ἐμέ·
칠십인역 참조 구절
창 1:4; 창 2:9; 창 12:14; 창 29:17; 창 39:6; 수 21:45; 대하 14:2; 잠 3:4; 잠 17:26; 슥 1:13; 사 1:17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8 Paul’s reason for warning against the false teachers in Ephesus was that they had misunderstood the intent and use of God’s law. In speaking of the law, Paul was not merely referring to the Ten Commandments or to the law of Moses. He was speaking of the principle of making legal demands, and he argued that legal demands are good if a person knows rightly how to make those demands. The law itself is intrinsically noble and honorable, but its teachers must use it according to its spirit and intention.
What is the right use of the law? Theologians have summarized three uses of the law. First, the Bible resembles a locked door to restrain individuals from trespassing onto the wrong territory (Rom 7:7; Ps 19:13). Second, the law resembles a mirror to reveal sin and lead us to Christ (Rom 3:19–20; Gal 3:24). Third, the law serves as a rule and guide to point out the works that please God (Rom 13:8–10). The errorists whom Paul was addressing did not know they needed restraint, a mirror for their sins, or a guide in life. They used the law as a launchpad to turn out spellbinding tales about ancestors and thereby robbed the law of its convicting power. If these teachers had used the law as a means of leading their hearers to Jesus, that would have been fine with Paul.10 In saying that the law was not made for “the righteous,” Paul was describing believers as the righteous. Committed believers do not need the law to propel them to holy living. They have pleasure in God’s law and have entered the sphere in which the promptings of the Holy Spirit spur them to obedience (Gal 5:22–24).
10 A similar view of expressing the right use of the law, but stated in different words, appears in H. A. Virkler, Hermeneutics: Principles and Process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Grand Rapids: Baker, 1981), 143. Virkler outlines four uses of the law that include showing human beings the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restraining evil, bringing individuals to Christ, and providing a guideline for godly living.
E. P. Sanders in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 began a revolution in Pauline studies by denying that Paul held a legalistic perception of Judaism. According to Sanders, it is incorrect to picture first-century Judaism as encouraging a works-type of righteousness. Rather, according to Sanders, both Judaism and Paul felt that obedience to the law was not required to enter into God’s covenant but was necessary for maintaining participation in the covenant. Aware of Sanders’s emphases, R. Sloan has said that the law cannot save because it “now operates within the power sphere of sin and death and, thus weakened, has not the power to save” (“Paul and the Law: Why the Law Cannot Save,” NT 33, no. 1 [1991]: 54). Sloan feels that both in the Jews and in the unconverted, Paul felt the power of evil operated through their devotion to keeping the law so that they were incapable of actually seeing Jesus as the Messiah. Sloan’s views reflect an understanding of Sanders’s insights but also show an appreciation for consistency in Paul’s thinking.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70–71.
 
9절) 앞서 바울은 '우리는 아노라’라고 말하고 나서 9절을 시작하면서 ‘알것은 이것이니’라고 말한다. 다시금 알고 있는 것,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의 ‘옳은 사람’은 ‘디카이오스’로 바울이 하나님의 칭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을 지칭하는 법정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본문은 이런 칭의적인 차원에서의 의인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의 옳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율법은 필요없다. 반면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먼 불법한 자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율법이 필요한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밝히고 있다.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 불법한 자는 ‘아노모이스’로 이것의 원형인 ‘아노모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율법을 의미하는 ‘노모스’의 합성어로 법을 지키지 않는 자,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아뉘포탁토이스’인데 이것의 원형 ‘아뉘포탁토스’ 역시 부정 접두어 ‘아’와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휘포탓소’의 합성어로 율법에 대해 불순종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앞서 ‘불법한 자’와 비교할때 지적 측면보다 행동적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울은 에베소의 유대주의적 이단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율법 자체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 경건치 아니한 자로 번역된 ‘아세베시’의 원형 ‘아세베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경배하다, 경건하다, 좇다라는 의미를 지닌 ‘세보마이’의 합성어로 경건치 아니한 자,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 혹은 하나님을 좇지 아니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무신론자들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삶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죄인으로 번역된 ‘하마르톨로이스’의 원형 ‘하마르톨로스’로 문자적으로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마르티아’는 죄, 불법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따라서 살지 않는 자들, 자기중심성을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 거룩하지 아니한 자로 변역된 ‘아노시오이스’의 원형 ‘아노시오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거룩한 이라는 의미를 지닌 ‘호시오스’의 합성어로 신약에서 말세의 특징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망령된 자는 ‘베벨로이스’로 이 원형은’베벨로스’인데 이는 가다, 걷다라는 뜻을 지닌 ‘바이노’와 문지방을 뜻하는 ‘벨로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문지방을 건너는 자’라는 의미로 제한없이 아무것에든지 접근한다는 의미로 속되게 행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거룩한 것의 특징을 침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행위이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1-4계명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5-10계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선 내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 본 내용은 십계명의 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어기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로 번역된 ‘파트롤로아이스’의 원형 ‘파트롤로아스’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와 치다, 타작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알로아이오’의 합성어로 타작마당에서 추수하는 농부가 곡식을 내려치듯이 아버지를 심하게 구타하는 자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죽이는 자’는 ‘메트롤로아이스’로 그 원형은 ‘메트롤로아스’인데 어머니를 의미하는 ‘메테르’의 ‘알로아이오’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죽이다라는 의미의 ‘알로이아오’는 출 21:15에 쓰인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5계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살인하는 자’, 살인하는 자로 번역된 ‘안드로포노이스’의 원형 ‘안드로포노스’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네르’와 살인자라는 의미의 ‘포노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십계명의 6계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10절)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음행하는 자로 번역된 ‘포르노이스’의 원형 ‘포르노스’는 영어의 포르노의 어원이 되는 단어로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이들의 혼전 성관계나 기혼자의 혼외 정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포괄한다.예수님께서는 모든 형태의 음란한 생각까지도 간음으로 여기셨다. 당시 이러한 음행은 이교 사회에 공공연하게 퍼져있었고 이교도의 신전(아프로티테)에서는 여사제들을 통한 매춘이 신전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포르네이아’은 음란, 성적 부도덕을 의미한다. 
남색하는 자로 번역된 ‘아르세노코이타이스’의 원형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남자를 의미하는 ‘아르센’과 눕다, 자리잡다를 의미하는 ‘케이마이’의 합성어로 남자들끼리의 직접적인 동성 연애를 지칭한다.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 인신 매매를 하는 자로 번역된 ‘안드라포디스타이스’는 사람을 뜻하는 ‘아네르’와 발을 의미하는 ‘푸스’의 합성어로 걸어가서 잡다라는 뜻과 더불어 노예로 삼다라는 듯을 지닌 ‘안드라포디조’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는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 사람, 다른 사람의 노예를 탈취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는 노예 무역 상인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을 탈취하여 노예로 파는 것은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거짓말하는 자로 번역된 ‘프슈스타이스’는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 단어의 원형 ‘프슈스테스’는 영어의 가짜의, 위장된이란 의미의 접두어로 널리 사용되는 슈도(pseudo)의 어원이 된다.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로 번역된 ‘에피오르코이스’의 원형 ‘에피오르코스’는 ‘~위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에피’와 맹세를 의미하는 명사 ‘호르코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맹세 위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위증하는 자를 뜻한다. 이는 거짓말 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9계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레 19:12). 
‘바른’으로 번역된 ‘휘기아이누세’는 건강하게 하다, 건전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휘기아이노’의 분사형으로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른 교훈이란 참되고 바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을 거스르는 죄의 목록을 다루면서 마지막으로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언급하면서 세부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다. 
 
1:9–10 Paul presented a list of vices that begins with three pairs of adjectives and then follows the order of the Ten Commandments. The three pairs of adjectives refer respectively to moral vagabonds who willfully break the law and refuse to obey its authority (“lawbreakers and rebels”), the outwardly disobedient who wantonly disregard God’s will in their lives (“ungodly and sinful”), and the inward scoffers who irreverently trample on God’s name (“unholy and irreligious”). The latter group treated nothing as sacred.
Those who kill their parents (v. 9) had lost all natural affection and violated the Fifth and Sixth Commandments. “Murderers” violated the Sixth Commandment, and “adulterers and perverts”11 violated the Seventh Commandment. “Slave traders” disregarded the Eighth Commandment, and “liars and perjurers” sinned against the Ninth Commandment. Paul’s list spotlighted easily recognizable external sins. He made no specific mention of the Tenth Commandment prohibiting covetousness.
There is implied reference to the Tenth Commandment and all other violations in Paul’s mention of “whatever else is contrary to the sound doctrine.” The word “sound” (hygiainousē) is a medical metaphor that contrasts healthy doctrine with the sickly, unhealthy teaching of the heretics. “Doctrine” (didaskalia) can refer either to proper belief (1 Tim 6:1)—the content of doctrine—or to proper behavior (Titus 2:1)—the result of right belief. In v. 10 the emphasis is on right behavior stemming from correct moral teaching. Kelly points out that Paul’s metaphor expressed his conviction that a morally disordered life is diseased and stands in need of treatment by the law. A life based on the teaching of the gospel is clean and healthy.
11 The term “perverts” is used only once additionally in the NT (1 Cor 6:9). In each instance Paul was warning against male coital homosexuality. In 1 Cor 6:9 the term is translated “homosexual offenders,” and it is paired with a related term “male prostitutes,” which referred to a man or boy who allowed himself to be abused homosexually. The term “homosexual offenders” (“Sodomites” [translation mine]) describes the initiators of a homosexual encounter. The term “male prostitutes” (“Catamites,” [translation mine]) described the recipients of active homosexual behavior. Paul used the term in 1 Tim 1:10 to warn against an active homosexual life-style.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71–72.
 
11절) 11절은 ‘카타’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이는 ‘~을 따라서’를 의미하는 표현인데 이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 피력한 앞선 진술이 복음을 좇아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이 교훈은 율법의 올바른 사용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앞선 8-10절 전체를 받는 것이다. 이 교훈이 학문적인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첫째는 ‘내게 맡기신’ 복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맡기신’으로 번역된 ‘에피스튜덴’은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지닌 ‘피스튜오’의 부정 과거 수동태 표현이다. 이는 신적 수동태 표현으로 바울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복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신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한다(고전 9:17; 갈 2:7; 살전 2:4).  둘째 바울은 복음을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복음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의미와 동시에 그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자체로 영광이 된다. 본절의 독특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복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카리오스’는 복된, 행복한, 행운의라는 의미로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나니’라는 형태로 사용된 표현으로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마카리오스’는 하나님께 적용되어서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인 복되심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자기 충족적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11 Paul presented three facts about the gospel. First, the gospel concerns the glory of the blessed God. The content of the gospel is to set forth and proclaim the glory of God. Second, this gospel comes from “the blessed God.” The term “blessed” pictures God as the source and fountain of all blessedness. Blessedness rests in and proceeds from God. Third, this gospel had been entrusted to Paul. The malicious perversions of truth Paul cited in vv. 9–10 did not proceed from the God of glory, and Paul wanted such heretical teaching to cease.
Paul’s chief concern was that the life-style and testimony of a Christian aid in the spread of the gospel concerning Jesus. The false teachers in Ephesus had given their energies to many enticing replacements for the gospel. That trend had to stop! No program, aim, or emphasis in our lives can be allowed to hinder our full involvement in sharing the gospel of Jesus’ saving power.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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