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Finally, my brothers,1krejoice in the Lord. l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is no trouble to me and is safe for you. 
Look out for mthe dogs, look out for nthe evildoers, look out for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For owe are the circumcision, pwho worship qby the Spirit of God2and rglory in Christ Jesus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sthough I myself have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also. If anyone else thinks he has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I have more: t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uof the people of Israel, vof the tribe of Benjamin, ua Hebrew of Hebrews; as to the law, wa Pharisee; xas to zeal, ya persecutor of the church; zas to righteousness under the law,3blameless.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3, 17
kch. 4:4; 1 Thess. 5:16
l[2 Pet. 1:12]
mPs. 22:16, 20; Isa. 56:10, 11; Rev. 22:15; [Gal. 5:15]
n[2 Cor. 11:13]
oSee Rom. 2:29
p[John 4:23]
q[Gal. 5:25; Jude 20]
2Some manuscripts God in spirit
rRom. 15:17; [Gal. 6:14]
s2 Cor. 11:18
tSee Gen. 17:12
u2 Cor. 11:22
vRom. 11:1
u2 Cor. 11:22
wActs 23:6; 26:5
xActs 22:3, 4; Gal. 1:13, 14
ySee Acts 8:3
z[ver. 9]
3Greek in the law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6.

이 구절에서 4:4로 곧장 가면 의미가 매우 잘 통합니다. 그러나 3:1에서 3:2로의 연결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3:2–21(또는 4:3)은 끼어 들어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앞서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이 감옥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여러 날을 두고 이 편지를 구술해 가는 중 빌립보교회에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표증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온전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서도 일치와 화평과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는 1:27의 권면을 일단 중단하고 그 유대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설명하는 내용을 구술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3장입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4:1부터 구술한 것 같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7–118.

1절) 마지막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이 내용은 이후 4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무엇인지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표현인지 이후 2절부터 등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로 3:18에서도 밝혔듯이 이를 여러번 반복했던 것이다. 
3:2–21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를 발하는데, 3:18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미 그것을 여러 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똑같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나에게 수고로운 일이 아니요, 여러분들에게는 안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번 했던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에 대한 경고를 다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확실하게, 안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양떼의 올바른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거듭 경고하는 것이 사도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3:1절 전반부까지 구술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다시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3:2 후반부터 3:21(또는 4:3)까지 새로운 내용을 구술하여 덧붙이고, 4:1(또는 4:4)에 가서 원래의 주제로 복귀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3:1(전반부)에서 문단이 끊어지고, 3:1(후반부)에서 새 문단이 시작되어 3:2이하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8–119.

형제들아라는 표현은 3:1, 13, 17; 4:1에 등장한다. 

2-3절)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복음의 적대자들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조하고 있다. 
적대자들(유대주의자들) :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이들이다. 이들을 삼갈 것을 명령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진정한 할례파)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본문의 개들이라는 표현은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조롱, 욕에 해당하는 말로 유대인들이 정결예법에 벗어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구약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율법의 선한 행실을 찬양하는 이들을 향해서 행악자들이라고 말하며 할례(페리토메)를 강조하는 이들을 향해서 몸을 상해하는 자들(텐 카타도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유다주의자들의 자랑의 상징이 그들의 멸망의 징표로 드러난 것이다. 
육체의 할례를 높이는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이다.(요 4:23-24)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빌 1:26) 육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Dogswas not only a general term of derision in the ancient world, it was particularly a word used by some Jews in reference to Gentiles, who were considered ritually unclean. With biting irony, Paul says that the Judaizers, not the Gentiles, deserve that label. Paul’s irony continues as he labels those who extol good works of the law as evildoersand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This last phrase (Gk. tēn katatomēn) is a play on words with circumcision (Gk. peritomē). The Judaizers’ supposed badge of pride turns out to be the sign of their destruction. On Jewish views of circumcision, see note on Acts 15:1.
In contrast to those promoting physical circumcision (v. 2), the true people of God (the circumcision) are those who worship by the Spirit of God(cf. John 4:23–24). They glory in Christ Jesus(cf. Phil. 1:26)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that is, as Calvin put it, in “everything that is outside of Christ”). This verse mentions all three members of the Trinity: “God” (the Father), “Christ Jesus” (the Son), and “the Spirit of God” (the Holy Spiri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중요시했는데 바울은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됨의 징표인 할례를 몸을 상해하는 일, 즉 살점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비하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하는 할례가 그저 몸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sarx; flesh)을 가끔 “몸”(soma; body)과 함께 인간의 외형, 즉 살 덩어리를 지칭하기 위해 쓰기도 합니다만, 더 많은 경우에서 “육신”이나 “몸”에 특수하고 깊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씁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바울의 중요한 신학 용어들 중에 속합니다. “몸”은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 전체와의 연대성 속에서 제한성(결핍성)을 가지고 사는 인간을 특히 그 외형적인 관점에서 지칭할 때 쓰는 인간론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현재는 제한성을 가지고 죄와 죽음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쳐질 수도 있으며(롬 12:1), 종말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영적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빌 3:20–21, 고전 15:42–44). 이 “몸”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내재 자원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좇아 자신의 구원(의, 안녕, 행복)을 확보하려 할 때, 바울은 그런 인간을 “육신”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 언어에서의 “몸”은 인간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뜻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인 개념인 반면, “육신”은 자신을 신뢰하며(자신의 우상화)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기 주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개념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0–121.

레 21:5과 왕상 18:28을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을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깍지 말것을 명령한 바 있다. 
The Greek word for circumcision is peritomē(= “to cut around”); katatomē, used here, denotes “cutting to pieces,” hence “mutilate.” This wordplay, especially the emphatic For it is we who are the circumcision(v. 3), makes it certain this is the primary issue between Paul and them. This is the most “cutting” epithet of all, the ultimate derogation of circumcision, since the cognate verb occurs in Leviticus 21:5 (LXX) prohibiting priests (who serve God) from cutting their flesh as pagan priests did (cf. 1 Kings 18:28).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Westmont, IL: IVP Academic, 1999), 133.

4-6절) 바울은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데 만약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것 같으면 나는 더욱 신뢰할 것이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 내용으로는 바울은 
  1.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2.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3.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4.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5.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6.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유다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반대는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특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봤을때 바울은 완벽한 자격(육체를 신뢰할 만한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벽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자신이 어느 지파의 소속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면서도 아람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가장 엄격한 종교적 분파인 바리새인(행 26:5) 출신이었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이러한 열심은 비느하스나 엘리야의 따라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면을 볼때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전혀 의가 아니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표현했다. 
Paul’s opposition to the Judaizers was not because he himself in any way lacked a Jewish “pedigree.” When it came to the things of the flesh—the whole system of life that held sway before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giving of the Spirit—Paul had perfect credentials. He was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in accord with OT law (Lev. 12:3). He was an ethnic Israelite and knew the tribe from which he came. Hebrew of Hebrewsprobably indicates his descent from Jewish ancestors, and many think it also means that he spoke Aramaic (the national language of Israel in his day), even though he came from Greek-speaking Tarsus. He was from the strictest religious sect—the Pharisees (Acts 26:5). His zealwas such that he had even been a persecutor of the church. He probably had thought of himself as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Phinehas (Num. 25:11) and Elijah (1 Kings 19:10, 14) in his zeal. If anyone could be said to be blamelessin following the law, it was Paul. But before God it was no righteousness at all, for though Paul thought he was pleasing God, in persecuting the church he had shown himself to be the “foremost” of sinners (1 Tim. 1: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바울이 자신의 베냐민 지파 소속을 특별히 내세우는 이유는 베냐민이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아내 라헬로부터 난 두 아들 중 하나였으며,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조로 갈릴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조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지속했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첫 왕을 배출하였으며(자신의 이름이 그 왕의 이름을 따른 사울이었음), 전쟁 때 영웅적으로 싸운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매우 자랑스러운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 부모들 사이에서 난 히브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은 헬라파 유대인(Hellenistes)과 구별해서 쓰인 용어입니다. 후자는 로마 제국 등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헬라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들을 지칭한 반면, “히브리인”(Hebraios)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히브리”어(실제로는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행 6:1–6 참조). 당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민 1세대로서 아람어를 모어로 쓰며 아람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출석하는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남부) 다소 출신이지만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가정의 출신이었음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을 두 부류를 구분할 때는 사용 언어가 주된 기준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분은 문화적 차이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자신을 히브리인 부모로부터 출생한 히브리인이라고 내세우는 데는 자신이 헬라 문화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관점에서 자신의 출생이 가져다준 자랑거리들을 열거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개인적 성취들을 덧붙여 열거합니다. 그것들은 세 가지입니다. 곧 “율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리새인이요, 열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교회의 핍박자요, 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흠이 없는 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주의는 출애굽기 19장 5, 6절에 반영된 이상(理想), 곧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들의 왕국이어야 한다는 이상을 성취하려는 중산층 평신도 성결운동이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위한 정결법들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었지만, 그 법들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불결로부터 분리, 곧 정결과 성별을(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의 기원)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주의는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자신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려 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열성”(zelos; zeal)은 단순히 심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열성을 보이는 것이 비느하스 전통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인들이 그곳의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한 열성(개역 성경: 질투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이 열성이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거두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민 25장). 구약 성경은 이러한 비느하스의 열성을 속죄 제사로 그리고 의의 행위로 기념합니다(시 106:31). 주전 168년에는 모딘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마카비 형제들)이 유대교를 말살하려는 시리아의 통치자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들은 비느하스의 열성을 재현하려 하였고, 또 주후 1세기 중반에 당시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투사들도 비느하스의 열성을 본받고자 했기에 열성당(zealots)이라 불리었던 것입니다.
이 전통에서 “열성”(zelos)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범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잔해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더 열성적인, 유대교의 정통과 순결을 위해서는 폭력을 불사한 맹렬파로서 비느하스, 마카비 운동, 바울 당시 세력을 얻어 갔던 열성당과 같은 신학적 전통에 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바리새적 헌신과 유대교에 대한 전투적 열성은 바울을 유대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온전한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출생의 특권들과 자신의 개인적 경건의 성취들을 종합하여, 특히 후자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결론하는 것입니다. 과거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삶을 율법이 요구하는 또는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의의 관점에서 보면 “흠 없는 자”였다고 말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이 말로 자신들의 특권과 율법 지킴을 자랑하며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지켜 온전한 의인이 되라고 선동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여 과거 자신의 삶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운, 온전한 의의 삶이었다고 결론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3–1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