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What causes quarrels and what causes fights among you? Is it not this, that your passions1 are yat war within you?2 You desire and do not have, so you murder. You covet and cannot obtain, so you fight and quarrel.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 You ask and do not receive, because you ask zwrongly, to spend it on your passions.

1 Greek pleasures; also verse 3

y Rom. 7:23; 1 Pet. 2:11

2 Greek in your members

z [1 John 5: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1–3.

 

4:1-12절의 내용은 앞선 다툼(3:14)로 인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표현이다. 

 

1절) 우리들 중에 다툼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중에 싸우는 정욕이 아니냐? 

앞선 3장의 마지막은 위로부터 온 지혜를 따르는 이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로 의의 열매를 가져온다라고 말했다. 이제 4장은 이 화평과 대조를 이루는 이들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다툼과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야고보는 이를 자기 중심적인 욕망으로 분석한다. 여기 등장하는 정욕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헤도네’라는 단어로 여기에서 ‘hedonosm’, ‘쾌락주의’라는 단어가 나왔다. 본문에서 싸우는이라고 표현된 ‘스트라테우오’라는 단어는 전쟁을 치르다라는 표현으로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다툼이나 싸움의 파괴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이다. 

 

1절이 표현은 앞선 3:13절의 표현과 유사하다. 질문을 통해서 주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툼이나 싸움은 의견 충돌, 말싸움에서 나아가 물리적인 충돌까지를 포함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러한 싸움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복음의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과 관용을 크게 외쳐도 세상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바라보고 우리를 평가하고 복음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다툼의 원인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정욕(passions)은 헬라어 헤도네(hēdonē)의 번역인데, 단순히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죄 많고 방종한 즐거움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이 단어에서 hedonism(쾌락주의)이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늘 이러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다(눅 8:14; 딛 3:3; 벧후 2:13). 여기에서 야고보가 이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카비4서 1:25–26의 내용을 통해 입증된다. “정욕(헤도네)에는 모든 감정들의 가장 큰 복합체인 사악한 경향이 존재한다. 영혼의 관점에서 그것은 자랑, 탐욕, 명예욕, 경쟁심, 악의요, 몸의 관점에서 그것은 무분별한 폭식과 대식과 같은 식욕이다.” 야고보는 이 목록에 시기(4:2)와 경쟁심(3:16)을 추가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7–208.

 

2-3절) 네가 간절히 원하여도(욕심을 부려도) 갖지 못하여 살인한다. 너는 탐내어도 얻지 못하여서 싸우고 다툰다. 

네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얻지 못한다. 네가 너의 정욕을 위해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네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에피티메오’ 열망하다. 음욕을 품다, 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16번 사용되었고 이것의 명사형이 ‘에피티미아’로  원함, 강렬한 열망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40번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 열망은 여러 방향으로 드러난다. 이는 성적 욕망, 물질적인 즐거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함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우리가 관심을 보이는 방향에 따라서 우리는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한다. 결국 모든 의지의 결정은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으로 열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Desires can find their expression in every direction: sexual lust, material enjoyment, coveting another’s possessions (cf. Rom 1:24; Gal 5:16–21; 1 Tim 6:9; Titus 3:3). By directing our attention, they can bring us completely under their domination. The recognition expressed in Rom 6:12—that those who allow themselves to be driven by their desires are already under the reign of sin—recurs freq. in the Pauline writings (Eph 2:3; 2 Tim 3:6; Titus 3:3). Desires are deceitful and can enslave us (Eph 4:22). When that happens, the “heart,” i.e., the center of one’s whole personality, comes under their control (cf. Rom 1:24). As a result, all decisions of the will, and even the best and highest impulses and powers of a person, are determined by these desires. Only the life that is turned to the will of God, subject to him, and determined by him presents the opp. picture (Rom 6:12–14; Eph 4:22–24; Titus 2:12–14).

cf. confer (compare)

freq. frequent(ly)

i.e. id est (that is)

cf. confer (compare)

opp. opposite, (in) opposition (to)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243.

 

그래서 우리의 죄, 즉 살인이나 시기와 다툼의 원인은 우리의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열망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성적인 욕망, 물질적인 욕망, 권력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좌절은 우리를 더 갈급하게 하여 죄를 짓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나아가 우리의 욕망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하는데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서 구함에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의 욕망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마 7:7을 통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구함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개인의 정욕을 위해 구하는 것은 응답받을 수 없고 도리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다. 

 

  • 다음은 RSV의 번역이다.

  • 너희는 원하지만 얻지 못한다. 그래서 살인한다.

  • 또한 너희는 시기하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다투고 싸움을 벌인다(NEB, NASB, GNB도 참조, 개역개정도 이 구조를 따름-역자 주).

  • 이 구조에 따르면, 좌절된 욕심이 폭력을 초래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 헬라 세계에서 흔한 도덕적 권면 형태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이 구조가 더 타당성이 있다. 존슨(L.T.Johnson)20에 의해 충분하게 설명된 이 구조 형태는 ‘질투’(프토노스, phthonos)와 ‘시기’(젤로스, zēlos), 그리고 그와 연관된 감정이 어떻게 다툼과 싸움, 살인과 같은 적대적인 행위를 일으키는지 그 방식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형태를 설명하는 데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열 두 족장의 유언에 나오는 시므온(Simeon)의 유언에는 ‘질투(프토노스)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유언의 중심 주제는 질투가 어떻게 시므온을 사로잡아 형제 요셉을 살해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시므온은 자녀들에게 “질투가 인간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여 자기가 질투하는 대상을 파괴하도록 부추긴다”고 경고한다.

  • 주후 2세기의 도덕가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카이사르가 사람들을 ‘전쟁과 싸움’(폴레모이와 마카이)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지만, ‘질투’(프토노스)로부터는 해방시킬 수 없음을 본 후 질투와 폭력 간의 유기적 관계를 지적한다.21 또 신약성경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의 결정이 ‘질투’(프토노스)때문이었다고 기록하며(막 15:10), 초기 교회에서 자행된 박해가 ‘질투’와 ‘시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한다(행 5:17; 13:45; 빌 3:6). 야고보의 가르침은 이러한 잘 알려진 형태(pattern)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프토노스(전승에서는 이 단어가 훨씬 더 선호된다) 대신에 어근 젤로스의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지만, 두 단어는 서로 교체 사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마카비1서 8:18; 시므온의 유언 1:6; 4:5), 젤로스도 이러한 전승에 자주 발견된다. 야고보가 이 패턴을 이용하고 있다면, ‘살인’과 ‘다툼과 싸움’이 앞에서 서술한 시기와 질투, 탐욕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RSV가 이런 관계를 잘 보존하고 있다.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NASB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20 “James 3:13–4:10”, NovT 25, 1983, 327–347.

  • 21 Discourses, III. 13.9.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9–2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