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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길을 묻다(최종원, 비아토르)

 

 
 
수도원이 개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함축하는 반면, 수도회는 역동성과 운동성을 포괄한다고 보기에 이 책에서는 ‘수도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부. 탄생
1장. 서론, 오늘 왜 수도회인가?
수도회 탐구 여정의 시작점에서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
마가복음 14:25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수도회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21)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를 염원한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막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수도회 존재의 핵심은 일상과 하나님 나라를 긴장속에 이어주는데 있다. 
 
수도회는 고립을 추구하는가?
수도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은 ‘혼자’라는 뜻의 ‘모노스’와 ‘장소’라는 뜻의 ‘테리온’이 결합된 용어다. 수도사를 나타내는 단어닌 ‘몽크’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풀어 쓰자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다.(22)
 
제국과 천국 사이에 선 나그네
그리스도교는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의 정점에서 탄생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제국에서 또 다른 꿈, 곧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를 꿈꾸는 것은 제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제국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보이는 제국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가치 충돌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핵심 이유였다. (25)
 
제국은 체제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안녕과 번역을 약속한다. 그 체제하에서 문명인과 야만인, 자유민과 노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은 종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화는 민족과 인종,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르쳤다. 나그네와 병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고 나눔늘 실천하는 삶을 그리스도가 가르친 인간관을 수용한 결과다. 그리스도교가 제기하는 인권과 평등의 가치는 노예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던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박애 정신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천이었다.(27)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제국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거주 외국인(resident alien)’으로,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일을 하늘나라의 '식민지 건설’로 표현했다. 바울의 식민지 유비를 빌리자면 거주 외국인들을 시온의 신을 알지 못하는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이 식민지는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문화의 섬이었으며, 거주 이방인들의 낯선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그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28) 제국의 정복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확산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건설은 철저하게 주변과 경계, 아래에서 형성되어 퍼지는 가치다. 
 
그리스도교가 만들어가는 식민지는 제국의 영토 안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더 높은 윤리와 도덕의 가치를 보여줄 책임을 지닌다…. 이 식민지에는 두가지 극단의 위험이 존재한다. 하나는 제국에 동화되어 식민지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 안에서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분리하여 고립되는 위험이다.(29)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하늘나라와 제국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수도회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도회야말로 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양립하는 현장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거센 저항이었다.(31)
 
오늘의 나와 무관한가?
고독 속에서 연대했던 수도사들의 가치와 지향을 우리 삶 속에 연결해야 한다. 
 
 
2장. 수도회의 탄생_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
4세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과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가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의 명과 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제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앙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결단 없이도 자기 편의와 향후의 기회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삶의 변화 없이 이교도의 가치관을 유지하니 교회의 질적 순도가 점점 떨어졌다. 
 
핍박받던 소수가 이제 주류 중의 주류가 되었다. 항상 제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던 가치 및 문화와 같은 방향에 서게 되었다. 점차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가 동일시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는 박해을 받았지만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수용했을 때 세속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고, 눈먼 교회는 제국의 권력을 나누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42)
 
교회의 두 가지 반응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에는 두가지로 반응했다. 첫째 제도 교회는 공인에 따른 변화를 환영하고 급속히 적응했고 둘째 일부는 그리스도교 공인과 그 이후의 교회 정책을 거부했다. 이 지점이 수도회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두가지 형태의 수도회
은둔 수도회 vs 공주 수도회
1) 은둔 수도회, 앵커라이트(anchorite) 혹은 은둔 수사((hermit)로 불린다. 창시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안토니우스이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마 19:21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35세 되던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래된 요새에 가서 20년을 은둔하며 살았다. 
 
2) 공주 수도회는 공동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케노비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코이노스’와 ‘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오스’의 합성어이다. 그들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사 공동체에서 산다. 창시자 파코미우스는 로마의 군인으로 전쟁중에 자신을 돌봐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섬김에 감화를 받고 작은 수도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나그네를 섬기는 돌봄 공동체로 순종을 어떤 가치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유럽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인 베네딕트 수도회에 영향을 준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수도사 개인의 내적 완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애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 수도회가 신적 음성을 듣기 위해 내면에 집중하며 완전을 갈망했다면, 파코미우스로 대표되는 공주 수도회는 타자 돌보기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긴장을 줄 공동체
 
 
3장. 수도사의 일상_기도와 노동, 하나님의 일이 되다
일상과 영성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기도와 노동
수도원에서는 여덟 차례 공동체 기도를 드린다(성무일도). 시 119편 164절과 62절. 
 
수도원의 기도는 읽기와 침묵으로 뒷받침된다. 독서를 통한 기도는 텍스트를 사색하여 몸과 영혼에 아로새기는 방법이며 침묵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67)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의 육체노동은, 수도사가 순종과 고행의 삶을 실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려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68)
 
또 다른 종류의 노동
야외 육체노동은 줄어들었지만 필경사들의 노동은 과중했다. 그 노동으로 생성된 책이라는 물성은 당대와 후속 세대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73)
 
유럽을 만든 회랑 안의 일상
삶이 물질로 환원되고 종교마저 내 유익을 위한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그 너머의 초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균형을 찾아갈 때 삶은 좀 더 내밀해지고 덜 흔들리게 될 것이다. 
 
 
2부. 역사
4장. 유럽을 만들다_아일랜드 수도회, 베테딕토회
무너진 제국과 수도회
초기 수도회주의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고 세속적 번영에 반동하는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났다.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 476년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손에 함락. 
 
아일랜드, 성인과 학자들의 섬
켈트 수도회를 특징 짓는 단어 : 금욕, 학문, 선교
- 고전 교육에 회의적이고 명상과 기도에서 성경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동방의 사막 수도사들과는 달리 켈트 수도사들은 학문과 교육에 열정이 넘쳤다.(84)
 
노섬브리아 궁정교사로 임명받은 앨퀸은 교약 교육의 기초로 3학(문법, 수사, 논리)과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을 정했다. 이시기 카롤링거 서체가 채택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들의 문화적 토대인 게르만의 가치위에 그리스도교를 융화하여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했다.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
켈트 수도회가 문명이 없는 황량한 산과 섬에 문명의 싹을 틔우고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면, 베네딕토 수도회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라 부르는 고전 문명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헤서 출발했다. 
베네딕토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가 50세가 지났을 무렵인 529년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설립했다. 베네딕토회 규칙의 가장 큰 장점은 금욕적인 닫힌 세계와 열린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감이었다.  기도, 노동, 학습을 강조했다. 견습 수도사 생활을 마친후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청빈’, 독신으로 사는 ‘정결’, 수도회의 규칙에 순종하는 ‘순명’을 약속하는 수도 서약을 한다.(95)
 
중심을 흔드는 주변부 공동체
수도회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세속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공동체, 주변부에서 중심을 파고들어 흔드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도회의 존재의미이자 목적이었다. 
 
 
5장. 유럽을 깨우다_클뤼니 개혁운동과 시토 수도회
교회의 암흑기
수도회는 본질적으로 세속과 의 긴장 속에 형성하는 대조 공동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클뤼니 개혁과 뒷모습
중세 성직자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이지만 동시에 세속 군주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가직이기도 했다. 
 
클뤼내 개혁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매매 금지, 세제 혼인 금지, 세속 통치자의 성직자 서임 금지문제에 천착했다. 
 
시토 수도회, 엄격한 수도 생활로의 회귀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가 추구했던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 회복의 핵심이라고 파악하여 베네딕토회 규칙을 문자 그대로 읽어내교, 고립속에서 살아가며, 매우 엄격하게 완전함의 이상을 추구했다. 
클뤼니 수도원이 예배를 수도회의 특징적 중심으로 놓고 전례의 방식과 철학을 발전시켰던 반면,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 규칙이 추구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에 더 치중했다. 
시토 수도회는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세속 후원자들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를 기증받아 공동체를 일구었다. 또한 시토 수도회는 중세 신비주의 영성과 성모 마리아 공경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시대정신을 담아낸 수도회 운동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당대 사회와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가 지닌 고유한 힘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비우는 데서 나온다. 
이 수도회 운동들을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 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6장.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_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스콜라’에는 학교라는 의미와 정예부대라는 의미가 있다. 
서유럽인들의 성지순례는 고해 사제가 부과한 벌을 이행하는 참회의 길, 또 자발적 종교적 헌신을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의 의미가 있었다. 
 
무기를 든 수도사들
‘성전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다. 성전 기사단은 용감한 전사로서 비무장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성전 기사단의 확산과 몰락
성전 기사단은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순례 여정을 만들고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하려는 유럽인을 위해 땅을 매입해주고 송금을 대신하고 필요한 비용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땅을 매입해 개간하고 정착할 수 있는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전 기사단의 문어발식 확장은 비판을 받게 되고 해산을 요구받게 된다. 이는 교황권과 세속권의 갈등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프랑스 국왕의 시도였다.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 구호 기사단
구호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 형제회’이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환자를 구호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위한 무력은 정당한가?
군사 수도회는 기사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투에서 부상한 이들을 치료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군사 수도회의 역할과 지위를 옹호했다. 그는 무장한 수도사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보았다. 
수도회가 국가나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보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종교의 이름으로 제국이 제기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주의, 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 같은 수도사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7장. 세속화에 급진적으로 맞서다_탁발 수도회
사도적 청빈의 거대한 바람
13세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칠성사와 화체설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성직자 중심주의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제도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교회 본연의 길을 잃었다고 판단될 때면 항상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등장하여 제도 교회를 정화시켜왔다. 
 
이들(발도파와 탁발 수도회)은 사도적 청빈 즉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을 추구했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타인의 은총과 신뢰를 얻으며 살았다.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의 발도가 주도한 운동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교 없이 설교하는 이들은 제도 교회와의 갈등을 일으켰고 1184년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형제가된 수도사
탁발 수도회는 수도회의 재산을 만들지 않았고 그 대신 대중들의 자비에 의존하는 탁발을 생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기존 수도회는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폐쇄 공동체에 가까왔다. 탁발 수도회는그 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13세기 프린치스코회와 도미티코회의 등장)
 
프란치스코회와 청빈의 딜레마
프란치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전쟁중 부상으로 투병하며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마 10장의 설교를 들으며 감화를 받아 절대적 빈곤의 실천을 선택했다. 탁발 수도사들이 빈곤의 가치, 무소유의 가치를 강조하면 할수록 수도회에 더 많은 기부와 헌납이 이루어졌다. 이에 수도원 운영을 위한 재정을 가지는 문제로 인해서 온건파 ‘콘벤투알’과 급진파 ‘영성파’로 분열되었다. 
사도적 청빈의 궁극은 물질의 소유뿐 아니라 물질을 엄어서서 이 땅의 권력과 힘까지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포기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도미티코회, 설교와 학문의 전문성
프란치스코회가 청빈이라는 사도적 삶의 실천을 강조한 반면, 도미티코회는 사도적 삶의 또 다른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강조했다. 
도미니코회는 당시 이단인 카타리파와의 논쟁과 설교를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카톨릭 대중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중세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이끈 수도회로 악명을 쌓았으며 이와 별개로 설교법, 웅변술, 교수법으로 중세말 대학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 상태에 대한 급진적 제고
교권의 전성기에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둥장한 탁발 수도회는 견고하게 구조화된 성직주의에 불만을 가진 대중이 추구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고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탁발 수도회는 화폐경제의 활성화와 신흥 도시의 등장이라는 원시 자본주의 속에서 그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 그리스도교가 선택해야할 방향이라며 급진적으로 이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제국 한가운데서 제국의 가치 논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가치로 살며, 이 땅에 천국의 식민지를 확장해가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 
 
 
8장. 닫힌 공간에서 피어난 영성_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공동체
여성, 이브와 마리아 사이
수녀원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서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독립성이 중요한 가치이다. 동시에 수녀원의 탄생은 악의 근원을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는 여성 혐오의 부산물이었다. 
 
여성 혐오와 차별로 기획된 공간
여성에 대한 남성의 깊은 불신은 하와의 불순종 범죄로 이 땅에 악이 들어왔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남성 중심 교회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얕잡아 봤다.
 
명예남성인가? 여성성의 대표인가?
빙엔의 히데가르트와 아시시의 클라라는 각각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현한 인물이자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목소리를 낸 인물로서 대표성을 지닐 만 하다. 
 
억압과 돌파
여성의 목소리에 위기 의식을 느낀 교회는 수녀원에 엄격한 고립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부정적인 힘 때문에 남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고 구원을 위협하기 때문이며 당시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에서 확산되는 여성들의 종교 활동때문이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종교성에 대한 여성의 대안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신비 체험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판단하는 종교재판에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남성 성직자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에게 불안을 느꼈고 이에 그들의 경험을 마법술과 동일시했다. 1487년 도미티코회 수도사인 야콥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라머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악명 높은 마녀사냥 교범이다. 
 
모순과 역설의 공간
중세 여성에 대한 담론은 악의 통로가 된 ‘이브’로서의 여성과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구원의 통로가 된 ‘아베’마리아로 나뉘어 있었다. 수녀원은 이브 곧 하와가 속죄를 통해 아베 마리아의 길을 걷길 기대하는 공간이었다. 
제한이 있고 자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의 힘의 원천이었다. 
 
 
9장. 종교개혁, 수도원을 없애다_수도원 폐쇄와 새로운 물결들
수도원을 나온 수도사들
마르틴 루터가 교황에 반기를 들며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결과, 카톨릭 유럽이 분열되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치 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개신교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이에 수도회주의 부정과 수도회 해산이 일어났다. 
 
개신교 개혁가들은 수도회가 지향하는 정신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수도원해산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여 수도원 재산을 국가가 몰수했다. 개신교 지역의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그리스도교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루터의 수도회주의 비판
수도회와 종교개혁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가치 회복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면, 수도회 경험이 루터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루터는 수도회주의가 지닌 근본적 결점을 현실 도피라고 지적했다. 
 
카톨릭 수도회주의가 소멸하면서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는데 이제 교회 내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사처럼 소명받은 삶을 살아야 했다. 
수도원이 추구하던 기도하고 노동하는 일의 가치가 개신교 지역에서는 일상의 소명으로 이어져서 일이 곧 기도가 되었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수도원의 가치를 담벼락 너머 세속의 일상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산은 카톨릭과 결별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세속 군주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과의 결별을 끌어낸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크랜머가 주도했다. 수도원이 보유하던 엄청난 부를 국유화하고 교회의 정치적 복종을 이끌어 내려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대조 공동체가 영원히 상실되었다. 
 
전위를 차지한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카톨릭 수도회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을 포함하여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삼았다. 예수회는 은둔하거나 정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격적인 방식의 선교가 핵심이었다. 
 
제3의 길, 재세례파
메노파, 아미시파, 후터파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재세례파 공동체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와 갈등관계를 보였다. 카톨릭 국가에서 유아세례는 종교적인 행사인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호적 신고였다. 재세례파는 교회를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구원자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기로 할 때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모든 종류의 폭력 거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들이 복음서에서 끄집어 올린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었다. 
 
진화한 수도회주의
개신교가 수도사직을 폐지한 것을 단선적으로 읽기보다는 수도회 정신이 카톨릭의 예수회, 개신교의 만인사제주의, 재세례파 운동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지닌다. 
 
 
10장. 이성이 종교가 된 시대_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로 가는 여정
프랑스 혁명(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클뤼니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 탈종교화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성의 해체를 도모한 사건
수도원 개혁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요구 : 수도원 토지문제, 존립 목적에 부합하는 수도원만 유지, 각 국가내 수도회의 주도권을 교황이 더이상 가질 수 없었다. 
 
혁명과 수도회 폐쇄
프랑스는 1789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했고 교회는 면세 특권과 십일조 마저 상실했다. 
1790년 성직자 공민헌장 :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고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오던 구제사업의 책임을 떠맡았다. 이때부터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등 호적 업무가 교회에서 국가로 이관되었다. 
침묵과 기도, 신비로 대표되며 1500년 이상 이어온 수도회 정신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이성, 혁명의 종교
프랑스 혁명 기간에 수도원에서 400만권 이상의 책이 불탔다. 책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파괴함으로써 과거 문화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의 의지대로 재구성하고 하는 시도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고 전통적 종교성은 이성과 합리의 시대, 인권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로 평가절하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세속화의 길을 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럽 역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수도회에 가해진 도전도 거셌다. 청빈, 순결, 순명이 대표하는 수도회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가치에 압도되었다. 종신 수도 서약은 시대에 뒤처진 인권 유린으로 매도되었다. 혁명이 몰아낸 것은 구체제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2천년 가까이 쌓아 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통도 혁명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길을 잃은 근대, 인간을 잃은 종교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전해진 것은 우월한 유럽의 가치였다. 그들이 실천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애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정한 인종주의였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우생학이 등장한 후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인간의 우월을 가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 그로 인한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확산 앞에서 모든 것은 물질로 환원되었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힘을 주창했다. 그는 놀이의 자발성, 상상력, 순수성, 비일상성이 건전한 창조성을 낳는 힘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놀이를 무가치하게 보는 관점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기보다 기계화된 세계의 부품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는 '일과 생산은 시대의 이상이 되고 나아가 우상이 되었다'라고 했다. 
비생산적인 기도와 침묵의 삶이 주는 가치, 성찰과 기도의 삶을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며 수도원을 파괴한 근대가 제거해 버린 것은, 어쩌면 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찰하는 힘이었다. 
 
 
11장. 잿더미에서 찾는 희망의 조각들_떼제와 라브리 공동체
저항하는 부조리 인간
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할 사건이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이므로 불안이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였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 긍정과 성찰 없는 진보의 폭주 앞에서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교회는 실존하는 고통에 참여할 능동적 의지를 상실한 채 추상적인 본질에 천착했다. 
제도 교회는 현실을 읽어내고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한 채 천상의 진비와 추상의 본질에만 매달렸다.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선교회는 유신론적 가치를 매개로 신존의 고민을 풀어나가려는 시도에 가깝다. 
 
화해와 떼제 공동체
프랑스 개신교인 로제 수사가 떼제에 정착, 1940년 시작된 이 공동체는 유대인 난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전후 기부를 거절하고 자급자족을 실천하며 수도회 밖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매일의 공동체 기도를 통해, 생활에서는 예배와 침묵을 통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스도인 간의 화해, 젊은 세대를 향한 복음 전도, 그리스도교 내에서의 창조성 촉진.
 
프란시스 쉐퍼와 스위스 라브리
라브리는 프랑스어로 피난처이다. 실존의 물음을 풀어가는 일에서 떼제 공동체가 주정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라브리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이다. 
 
라브리의 지향점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다. 라브리의 존재 목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가 인격적이고 무한하며 실재하는 절대자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는데 있다. 
쉐퍼는 그리스도교와 일상의 삶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합리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라브리는 시대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질문이 달라지고 고민이 중층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쉐퍼의 답변은 단순하고 도식화되어 있다. 단순함 속에 의외의 힘이 있지만 단순할수록 자칫하면 전투적이 된다. 세상 문화는 야만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치없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다. 
 
한계와 의미
그리스도교는 힘이 아니라 갈망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본원적 가치를 향한 갈망 말이다.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수도회 영성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맞춘 인물은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이다. 
수도회주의는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가치로 돌아가자는 복고적이거나 반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조각을 찾자는 것이다. 
 
 
3부. 유산
12장. 예것을 익혀 새것을 깨닫다_베내딕토회 규칙의 현재적 의미
왜 오늘 베네딕토회 규칙인가?
베네딕토회 규칙은 독창적인 문서라기 보다는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가지 수도 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유연성, 개방성, 탄력성
 
공동체 만들기
베네딕토는 허물과 결점이 명백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영성이 구현될 수 있다고 이해했다. 베네딕터회는 기도와 노동, 공부, 식사와 휴식, 수면시간등을 균형있게 배치했다. 
 
듣기 위한 침묵
상대적인 침묵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자 말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는 성찰이다. 
침묵의 목적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듣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침묵과 대조를 이룬다.(눅 22:61-62)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남이시기도 하다. 기록된 말씀 못지 않게 비언어적 텍스트, 침묵의 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침묵으로 완성되었다. 
 
청빈의 의미
베네딕토회가 말하는 청빈이란 개인의 재산권 대신 공동의 소유권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청빈의 핵심은 삶의 방향성이다. 순결과 복종 역시도 우리 인간이 가진 말초적인 육신의 욕망과 힘에 대한 재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무모하게 시도하는 장소다. 이성과 합리, 이 땅의 구조를 넘는 불가능에의 요구를 실천하는 장소다.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교회가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때에 체험하는 신비다. 가난이란 물질이 주는 영향력을 포기하는 저항이다. 
 
복종, 부름받은 대가
복종은 결국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참다운 복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란 값없는 은혜를 남용하는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제자되기란 값없는 은혜를 향유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삶이다. 
자본과 소비 중심의 세계에서 단순한 삶, 소박한 삶을 사는 것도 복종의 한 모습이다. 
 
환대, 수도회 정신의 정수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타락한 세속을 멀리하는 공동체와 세속에서 찾아오는 낯선 나그네를 기꺼이 맞아주는 공동체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라는 것은 긴장을 유발한다. 
 
오늘에도 적용가능한가
현대의 소비주의, 욕망의 무한 긍정, 성취 지향의 문화에서 청빈, 순결, 복종, 환대가 가능할까 싶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가난과 차별이 여전하고 타자에 대한 편견이 지속되는 세상,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로 탄식하고 신음하는 지구 앞에 정의와 평화를 책임감있게 공유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짊어지고 풀어갈 과제다. 
 
 
13장. 전위에 선 저항자들_디트리히 본회퍼와 토마스 머튼
구도자의 길
간디의 평화주의, 흑인 인권문제, 유대인 문제와 같은 인종주의,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등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수도회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독일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8살때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형 둘이 전장에 나갔다가 둘째 형 발터는 사망하고 다른 형은 부상을 안은 채 돌아왔다. 본회퍼는 21살때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가 되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교류하며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유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25세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6년 나치정부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 피레네산맥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부모님 밑에서 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했다. 5살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15살때 아버지마저 악성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18살때 영적 강성을 경험했지만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후 성적으로 방탕하게 지내다가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카톨릭 친구들과 교류하며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핑겐발데, 제국의 한복판에서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 정책에 저항하며 고백교회를 시작해 제국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고백하고 나치의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핑겐발데 신학교에서 ‘신수도회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제자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회복은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것과 공통점이 없으며,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사랍들을 모을 때가 왔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제국교회에 물들지 않은 예배와 성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공동체의 목표는 공동체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배운대로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무력과 공포로 통치하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동시대인들과 후대에 제시해 주었다. 이땅을 뒤덮고 있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했고 제국 내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처럼 핑겐발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를 위해 연대하도록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겟세마네, 제국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1939년 토마스 머튼은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후 수도사의 길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프란체스코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전 친자 관련 소송문제로 거절당했다. 1941년 그는 가장 엄격한 시토회의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향했다. 머튼은 수도회의 생활을 통해 평화, 침묵, 고독 등의 가치를 문장속에 녹여냈다. 1948년 ‘칠층산’은 큰관심을 얻었다. 그는 점점 더 심오한 관상의 삶으로 들어갈수록 세속에서 멀어지고 천상으로 이끌려 가기보다, 자신이 세상과 떨어질 수 없으며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58년 루이빌의 교차로에서 갑자가 자신이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압도되었다. 그에게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몸부림에 동참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욱 현실 세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갔다. 동서 냉전, 베트남전, 미국 내 흑인 인권이나 원주민 문제등 첨예한 대립과 불공정의 문제들을 직시하며 그 속에서 정의를 회복할 길과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경계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진정한 복종과 영적 갈망은 홀로 떨어져 자신의 내면 완성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분열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그 세계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쓰기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지고 선명해졌다. 반전, 인권, 자본주의의 한계 등에 대해 글을 썼다. 
 
변방과 중심, 다시 만나다
핑겐발데 신학교가 폐쇄되고 나치의 감시가 심해져 미국의 친구들이 본회퍼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9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후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참여했고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주전인 1945년 4월 9일 사형당했다. 
 
토머스는 루이빌 경험이후 교회, 국가 권력과 갈등을 겪었다. 1960년대 그가 쓴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에 묶여 출판될 수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복종은 교회나 권위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복종이 침묵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눈감는 행동이 침묵이었다. 그는 영성가의 자리를 넘어 시대의 예언자의 자리에 섰다. 1966년 그는 전쟁, 인종차별, 가난 등의 사회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을 출판했다. 1968년 ‘마르크스주의와 수도훤의 관점’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구조의 혁명을 주장한 반면 수도주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고 주장했다. 
 
전위에 선 저항자들
본회퍼는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함께 신음하는 그리스도를 위해 폭력의 방법을 선택했다. 머튼은 자본주의 제국의 긴장 없는 동행을 비판적으로 읽어가기 위해 마르크스가 사회와 역사, 종교를 읽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본회퍼와 머튼의 삶은 깊은 영성 추구와 급진적인 제자됨의 실천이 결국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수도사의 삶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만드는 삶, 더 이상 이 땅과 분리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14장. 오늘, 수도회를 다시 묻다_신수도회주의 운동
새로운 수도회 요청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어떻게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라는 가치를 개신교에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수도회는 대항문화의 성격을 가졌지만 제도 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도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촉매였다. 그 제도 교회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반드시 필요했다. 
핑겐발데에서 시작된 신수도회주의는 독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국가 주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제국의 주변부를 향했다. 
 
파편화된 사회와 공동체의 도덕
1998년 조너선 윌슨은 ‘파편화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라는 책을 통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책 ‘덕의 상실’을 분석하면서 신수도회주의를 정의하는데 디딤돌을 놓았다. 윌슨은 현대 교회가 문화의 파편화와 계몽주의 프로젝트 실패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보았다. 
매킨타이어는 현대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편화된 사회라고 도발한다. 전통이 사라진 곳엔 야만이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가져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기대어왔던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근대가 약속한 진보 대신 암흑이 깊게 드리웠다. 매킨타이어는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토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의 야만이 쓸고 지나간 부조리한 자리에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공동체를 기대했다. 
제국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를 강제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 가치에 저항하기른 쉽지 않다. 그 야만의 제국은 외부의 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의 삶에 익숙하게 뿌리내렸다. 유럽인들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와 근대화의 이름으로 식민 침탈을 정당화했다. 오랫동안 제국이 약속하는 풍요와 제국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인 폭력을 방관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유럽 문명이 마주한 전대미문의 암흑기에 시민성을 갖추고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 곧 덕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 지역 공동체는 제국이 지배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이에 윌슨은 또다른 베네딕토를 기다리는 일을 새로운 수도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읽었다. 
 
교회와 세속 문화 사이의 긴장이 상실되어,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닮아 갔다. 국가와 교회 모두가 확장을 위한 효율과 통제를 추구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배와 통제의 방식은 전체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비단 나치즘이나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이 아니다. 효율과 효과를 극상의 가치로 놓고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한 근대성의 부정적 특성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곳이 되었고, 성장을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실천의 장이 되었다. 또한 교회는 국가주의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혹은 내밀하게 지지하는 정신적 지지 세력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나치게 친밀하게 얽히면, 제국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고등 종교의 자리는 줄어든다. 
 
공인과 제도화를 경험한 이래 교회는 역사 속에서 늘 세속 문화에 개입해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에 제국의 중심부, 심장을 향한 추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패배적, 도피적, 심지어 급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현실에서 선택해야 할 길은, 교회의 엣 영향력 회복이 아니라 제국과 교회가 긴장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리이다. 그 자의식이 신수도회주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신수도회주의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각하고 자발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의 자취를 따라, 21세기 제국 문화 속에서 같은 자각을 가진 이들이 건설해 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새로운 수도회의 열두가지 표지
셰인 클리어본의 ‘심플웨이’와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가 시작한 ‘룻바하우스’, 심플웨이와 룻바하우스 모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인종과 계급 분열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공동체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버려진 곳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중산층의 혜택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1) 제국의 버려진 곳으로 이동한다.
2) 공동체 구성원 및 가난한 이들과 경제 자원을 공유한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겸손히 복종한다. 
4)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산다. 
5)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6)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동생활을 발전시킨다. 
7) 마태복음 18장을 따라 지역사회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든다. 
8) 교회와 공동체 내의 인종적 분열을 애통해하고, 정의로운 화해를 적극 추구한다. 
9)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돌보고 지역 경제를 지원한다. 
10) 부부와 자녀들 및 독신자들을 지원한다. 
11) 오랜 수련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삶과 공동체 규칙을 익힌다. 
12) 관상 생활을 훈련하는데 헌신한다. 
 
이 12가지 표지의 특징적 범주
첫째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향한다. 제국의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향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연계를 강조한다.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파라처치가 아닌 프로처치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셋째 공동체 규율과 개인의 덕성을 훈련한다. 
 
이 운동은 수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가치에 젖어 있는 제도 교회이 현실을 오랜 과거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한다. 개신교의 열광적이고 분주한 이미지 또는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 전부라고 상정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다른 모습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끈다. 
 
대안이냐는 질문에 대해
제국이 정해 놓은 틀과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파격한 형태의 저항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도사가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수도사의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표면적으로는 수도사 제도를 없앤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성, 타자를 향한 배제 대신 환대, 폭력과 갈등 속에서의 평화 추구, 지구 공동체의 환경에 대한 책임은 물질 만능과 무한 경쟁의 사회속에 개개인 모두가 성찰하며 살펴야할 주제들이다. 
 
 
나가는 말
수도원은 제국의 가치와 삶에 대한 저항이다. 제국의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너머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다르게 살기, 거슬러 살기는 오늘날 가장 어렵고 거대한 저항이다. 소비가 미덕이고 자본이 가장 강력한 종교가된 시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그 구조에 저항하는 건 웬만한 작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도사가 보여주는 삶의 키워드는 주변성을 유지하며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는 것이다. 제국의 중심부를 향하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주변으로 가는 삶 말이다. 
주변에서 생성되어 마침내 중심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불어난 것, 그것이 수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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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 초대교회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1. 체제 밖을 지향한 공동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구현하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특히 목회자나 기독교의 리더들은 성서의 메시지(텍스트)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컨텍스트)과 연결시켜 해석해 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 역사는 기독교의 교리의 형성과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1. 초대교회를 통해 한국 교회를 고민하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결코 그 시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순간도 현실교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 초대교회의 기록들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도전들 앞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교회사를 신학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게 되면 한계가 있고 또한 교회사의 시대구분이 다분히 서구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역사, 인식과 의식의 지평 확대

역사 서술에서 객관이란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객관은 사료를 다루고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1장. 교회의 시작점에 대한 논의-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론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

첫째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신앙고백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오늘 교회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다. 

 

  1. 가톨릭 교회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예수 탄생의 날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 그래서 사제가 행하는 성찬이 중요하다. 화체설이란 사제가 성찬식에서 성체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술취한 사제를 가장 두려워했던 포도주 생산 농민들) 이런 논리의 결과로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베푸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가 깨뜨린 것이 바로 이 논리인데 구원이 교회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교회를 중시했고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겼다. 

 

  1. 자유주의 - 인간 예수와 교조화된 그리스도

이들의 기본 입장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최소한 예수를 도덕선생, 율법학자 혹은 선지자로 긍정적으로 그렸다. 20세기 초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했다. 현대화된 예수가 아닌 1세기 당시의 실제 예수를 찾아가려는 시도로 우리가 성서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한 인물일 것으로 보았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미지 혹은 종교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회의 출발은 유대교와 그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된 1세기말에서 2세기 초 정도로 본다. 

 

  1. 복음주의 - 예수 승천후 이루어진 교회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를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사두개파 혹은 바리새파처럼 유대교 내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알려졌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죄의 해결을 위해서 유대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린다. 예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구약에서 지시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다. 이제 이땅에 교회를 두심으로 천상사역과 연결점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볼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이 함께 함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이를 깨닫지 못하여 다 도망갔었다. 하니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등장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주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시작이다. 

 

2장.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1. 구약의 세계에서 초대교회의 세계로

신약의 역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를 서술할 때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구약 시대와 신-구약 중간사 시대, 그리고 에수 탄생 시점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초대 기독교외의 역사를 공부하는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 중간사 시대는 인도의 석가모니(기원전 624년경)부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플라톤(기원전 429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와 중국의 공자(기원전 551년), 맹자(기원전 372년)등에 이르는 세계사의 성현들이 탄생한 시기이디고 하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기원전 586년)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서 귀환한 유대인들을 통해 성벽과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 중간기의 시기는 열방들 속에서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시기이고 결국 유대 역사가 끝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드로스의 통치를 거쳐서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의 통치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마카비 왕조의 유대 민족 운동이 일어난다. 이후 기원전 63년에는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100여년후 멸망하게 된다. 

구약의 주요 활동배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던 우르와 페르시아만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약의 초대교회는 이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지 않고 유럽으로 서진했다. 왜 성령께서는 바울을 구약의 문화권이 아닌 새로운 문화권으로 부르셨을까? 그리고 그 성장을 촉발시킨 배경은 무엇인가?

 

  1. 중간사 시대 - 동서양의 만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동진하여 페르시아와 일전을 치르면서 동방지역의 헬라화를 성취하였다. 이 시기가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을 이룬 첫 시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오면서 헬라화의 압박(헬라문화와 헬라어 사용 강요)이 심해진다. 이에 항거해 마카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같은 중간기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세분화되면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이후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63년경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주류인 헬레니즘과 소수에 불과하던 헤브리이즘이 만나게 되었고 이 과정이 복음의 수용을 가능케한 토양의 준비인 것이다. 

 

  1. 헬레니즘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확산 지역이 구약과 예수의 활동범위를 훌쩍 넘어선 전혀 다른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당시 예배때는 전통 히브리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구사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들은 헬라 문화속에서 유대 문화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문화충돌은 불가피했다. 헬라문화는 문화족 인종주의(타자를 전통, 문화, 종교, 언어, 역사적인 기준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였다면 유대인들은 혈통적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화되기 쉬웠던 반면, 헬라인들이 유대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1. 칠십인 역, 기독교 확산의 언어적 토대

성서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통해서 종교적 일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70인역’ 성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칠십인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별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칠십인역은 헬라 문화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헬라의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헬라인들이 이를 통해 유대 신앙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불리웠다. 

상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에수와 그 열두 제자들이 구약의 세계를 벗어나 신약의 세계인 헬라 문화권인 지중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기 전부터 흩어진 유대인들과 칠십인역을 통해서 사전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에 유대 사상 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에도 정통한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서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세계의 범주를 넘어선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큰 그림속에서 로마를 바라본 것이다. 

 

  1. 로마와 초대교회

로마는 인근을 정복하면 조약을 체결하여 해당 국가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두고 단지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로마의 법과 행정,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로마가 이런 간접 지배를 기본적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이유는 당시 이미 헬라 문화가 전 지역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예배를 드렸다. 중세교회가 라틴 문화권이라면 초대교회는 헬라 문화권이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 메시야 사상에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와 로마 문화의 토양위에서 확산시켜 나갔다. 그 복음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헬라 철학과 로마법의 영향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복음의 완성과 확산을 위해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됨으로 기독교가 퍼져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졌다. 이러한 준비가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의 전파는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3장.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 유대교와 기독교

  1. 유대교와 기독교 분화의 흐름

칠십인역으로 인해 기독교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서 동시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종교로서 유대교가 기독교에 우선권 혹은 정통성은 넘겨주게 되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유대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 즉 구원의 역사를 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대민족의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의 배타성이 가려 놓은 신의 존재와 신에 관한 인식에 존재하던 차별의 장막을 거두어 해방시켰다. 

종교라는 관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예언자적 전통, 경전의 존재, 창조와 타락, 종말론의 관념등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 그리고 이후에 미쉬나라고 하는 유대의 재판 기록과 그것을 해석한 탈무드 등의 율법 해석서들을 주요 경전으로 신봉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신봉하며,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 유대주의의 형성과 발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관통하여 기원후 70년, 즉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까지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귀환한 이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그들이 정통으로 서게 되었다. 이들을 귀환 이후 제2성전을 재건하고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의 혼합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특하게 정형화된 형태의 종교를 확립해 나갔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화를 강요하였고 독립한 유대는 업격한 유대주의를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깊은 골과 상처가 생겼다. 초기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등의 분파가 있었지만 기원후 70년의 유대전쟁과 그 후의 박해를 거치면서 유대주의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시점을 랍비 유대교의 출현으로 보는데 이들의 특징은 책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전들이 집대성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기보다는 유대교 여러 종파중의 하나였다. 유대교로 발전하는 바리새파와 정체성을 달리하던 나사렛파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행 24장이나 28장을 보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역초기 자신이 가는 도시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다. 이는 초대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이 학식있는 유대인이있기에 무슨말을 하는지 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회당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자 결국 그를 배척하게 된다. 

 

  1. 기독교, 유대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인인 헬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앞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 결과가 폐쇄주의와 배타성이었다. 유대교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면서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하였다. 기독교가 단순히 유대교의 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편 종교 혹은 세계 종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궁극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더불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점은 율법의 종교에서 약속의 종교로 나아간 것이다. 

베드로는 선택받은 백성이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라고 가르친다. … 고등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중심성의 극복에 있다. 보편 종교가 되는 것은 그 시대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가능하다. 그 시대 속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할 때 성장하고 꽃을 피워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성장한 시기는 유대교의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 유대 인종, 유대혈통주의와 선민주의를 벗어나서 세계 시민주의를 외쳤을 때이다. 

 

  1. 교회의 갱신- 자기 중심성의 극복

오늘 날 기독교가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바리새파 운동도 처음에는 헬라문화에서 오염된 유대인의 신앙을 개혁하는 개혁운동이었다. 하지만 바리새파운동이 그 역동성을 상실했을때 이데올로기로 박제화되어 수구적이고 폐쇄적이 된 것이다. 

12세기의 스콜라학 - 13세기 대학의 모태가 됨 하지만 이 스콜라학은 16세기 스콜라주의로 이데올로기화 되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대상이 된다. 

신앙의 본질, 삶의 본질에 천착하여 나온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다. 이런 신앙의 정화 운동이었던 바리새 운동이 역동성을 상실했을 때 조직으로 바뀌고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종교를 수용하는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가치는 교리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단순히 유대교가 메시야 예수를 부정했기 때문에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다. 보편적 가치, 신의 인간을 향한 본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유대교의 자멸을 낳은 것이었으며, 반면에 인간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기독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초기 기르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 혹은 헬라인과 유대인과 다른 제 3의 인종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정체성은 헬라인의 문명과 야만의 구분, 유대인의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인종의 벽, 계급의 벽, 문화의 벽, 성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경계를 세우고 나누는 이들이 아니라 넘어서는 이들이었다. 

 

 

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1. 페허 위에서 돌아보는 초대교회의 성장

초대교회는 그 성장기와 박해기가 중첩된다.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상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되었다. 

 

  1. 교회, 대안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제시하다. 

초대 교회는 당시 로마의 전통종교가 주지 못했던 것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고 둘째로 기독교회가 내세우고 실천한 인권과 평등사상이며 셋째로 로마인의 인식과 비교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내세관이다. 

당시 노예나 하인, 여성이나 아이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복음과 예수가 가르쳐준 인간관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로 치면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빌레몬서에서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주인에게 오네시모를 잘 맞아 줄 것을 바울은 권면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고 비난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앞서간 인식이요 행동이었다.(3세기 로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교황으로 선출)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때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여성을 위하고 보호하는 모습에 두번 놀랐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사상 속에서 역사란 동일한 과정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신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졌다. 이들은 역사란 신의 의지가 역사에 실현되며 역사는 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박해의 순간에 하늘나라의 복락을 고대하며 그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1. 로마의 박해 이유와 양상들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기독교회 안에는 순교자들과 변증가들이 출현했다. 순교자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로마의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변증가들은 기독교 신앙의 편에 서서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서 외친 자들이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제로 이를 ‘피에타스’라 불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겼는데 이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풍습을 가졌다고 여겼으며 근친상간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오해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도리어 로마인들의 눈에는 무신론으로 여겨졌다. 

박해 앞에서 순교자들의 의연한 죽음은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큰 용기를 주었다.(폴리갑) 

 

  1. 박해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과제

박해로 인해 교회가 정화되고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는 배교한 자들을 교회가 다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말로 증거되기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보였다. 

“순교자가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5장.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 교회

  1. 라틴 교회, 헬라 문명을 넘어서다. 

라틴은 본래 이탈리아 남부 라티움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세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가 나왔다. 

초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언어는 헬라어였다.  초대 교회의 발전에서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주교구 교회가 로마, 콘트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로마를 제외한 네지역이 동방이다. 

 

  1. 북아프리카, 라틴 신학의 중심에 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의 이주 정책으로 아주 밑바닥부터 라틴 문화가 이식된 지역이다. 

도나투스파 운동(경제적 분노와 종교적 열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1. 테르툴리아누스 -라틴 교회의 빛과 그림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율법이 들어오게 된다. 서방 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회가 결정하여 수용한 전통도 궁극적 권위로 동등하게 인정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뿌리를 형성한 인물로 교회의 정의, 역할, 권위에 대해 다룰때에 철저하게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에서 주장을 이끌어냈다. 그는 라틴어로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남겼는데 이후 몬타누스 이단 운동에 빠져서 성인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로마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발전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지배자의 대중의 언어가 동일한 라틴어였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때 빠르게 문화화 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라틴화에는 두가지 작업이 수반되었는데 먼저는 헬라어로 정착된 신학 개념과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직 진화 단계에 있었던 신학을 라틴어를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증거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동방 신학은 헬라 철학의 바탕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서방신학은 로마법에 기대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속화(엄격한 금욕주의 주장)와 마르키온 주의(마니교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세례는 이 땅에서 살면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박해를 견디는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식을 넘어서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결단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고안하여 처음 사용하였다. 관계성의 층면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1. 라틴 신학, 공로주의의 길을 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대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법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가 공로주의로 가는 카톨릭 신학의 길을 열었다. 

 

 

6장.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 교회

  1.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동양에 관한 인식과 규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헬레니즘은 서구 역사의 뿌리가 아니다. 도리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와 같은 아시아권 문화와 융합했다. 

이처럼 역사 해석에 있어서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텍스트 지상주의에 매몰되기 쉽다. 모든 신학이나 사상은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컨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무리하게 다른 컨텍스트에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견해를 기초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환원주의이다. 

 

  1. 언어의 전환이 만들어 낸 다른 전통들

헬레니즘 철학과 헬라어라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유하던 문화의 틀이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사고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스테리온(mysterious)과 세크라멘툼(sacramentum) : 신비를 나타내는 헬라어와 라틴어. 신비와 비밀. 신비를 풀려고 해도 쉽사리 풀 수 없는 것. 신비스러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 반면, 비밀은 풀어 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등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 세크라멘툼은 군인이 훈련소에 들어가 선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민간인이 선서를 통해 군인으로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의 변화와 정체성을 법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결단이 내포된 법률적 자격이나 정체성의 변화로 받아들였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죄가 용서되며 성령이 임하는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탐구하며 그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교회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인 선포로 본다면,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가 더 깊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본다. 

결혼이 완성되는 순간은? 성혼 선포, 예물교환, 혼인신고, 초야를 치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사의 언어에 대한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교회의 역할의 차이를 가져왔다. 서방 교회에서처럼 법률적 관점에서 성사를 규정하면 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서 교회가 정한 의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이 라틴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카톨릭의 체제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즉 교회가 정한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이러한 틀이 깨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성서를 번역하여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성서와 비교 편집함으로써 언어의 변환으로 인해 생긴 오류를 규명하였다. 

 

  1. 동방 교회, 신비를 숙고하다.

일반적으로 헤브라이즘과 신본주의, 헬레니즘과 인본주의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데 사실 헤브라이즘은 철학체계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일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 :  이데아(천상)와 그 그림자인 현실세계 / 신플라톤주의(일자 개념)

 

서방과 동방의 차이 : 삼위일체, 구원에 대한 이해 / 서방은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면 동방은 신비를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성품을 설명할때 동방은 부정의 신학을 통해 신을 설명한다. 신의 성품을 규정하게 되면 신의 속성중 선함이란 무엇인지, 무한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규정해야 한다. 반면 동일한 내용도 부정문으로 표현하면 신의 진정한 성품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모나키(통치 혹은 시작, 원천 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차이(필리오케 논쟁-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라고 바꿀것을 주장) / 성화상에 대한 입장 차이

 

  1.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컨텍스트에서 사용할 때 다르게 이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근대 선교 운동이 일어났을때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를 하자 이미 토착화된 그리스 정교와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기성의 관념을 흔들 만한 낯설고 다른 것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들은 이렇게도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자세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에 댛해서 도그마를 앞세워 단죄하는 자세로는 신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있다. 물론 이런 포용은 자신이 위치해 있는 신학의 기반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 위에 안정되게 서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7장.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1. 교회사 속에서의 이단의 역할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기독교를 정통 교회, 이단, 신비주의의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과거 그 시대에 있다가 사라져서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비고비마다 유사한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오늘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다. 

이단이 무엇인가? 신학적 관점에서 주류 교회나 주류 신학이 가진 신학적 프레임에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보편성이 결여될 문제가 있다. 실천적-사회적 관점에서는 건강한 모습을 띠느냐이다. 그래서 교리적 독특성뿐 아니라 해당 집단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 자명할 때 이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1. 이단 - 신비와 논리 사이

정통과 이단의 관계 : 본래부터 정통이 존재했고 이단이 반기를 든것인가? 아니면 여러가지 견해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궁극적으로 이긴 것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

정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함축적인, 암묵적인 정통이었다. 이단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그 정통이 더 잘 설명될 필요가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통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교회사속에서 이단의 도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것을 확인하고 보존하고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교리화의 과정이었다.  

  • 1985년 예수 세미나(150명의 성서학자들이 참여) : 이들은 사복음서와 도마복음, 5개의 텍스트를 비교하여 이중에 예수의 진정한 말씀은 붉은 구슬, 정확히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것은 핑크 구슬, 예수의 사상 속에 들어 있었을 정도의 말씀을 첨가한 것이라고 보면 회색 구슬, 후대의 완전한 창장물이라고 판단되면 검은 구슬을 넣어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92%의 찬성으로 최고 득표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은 82%의 득표를 얻었다.(p. 185) 

교회에 대해 제기되는 도전에 대해 반이성, 초월성, 신비성만을 강조하여 대응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초월과 신비라는 가치가 제거되는 순간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교회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 교회는 교회의 초월과 신비를 설명하는 교리적인 정밀함이 아닌, 교회다움의 본질로서 거룩을 보여줌으로써 대응해 나가야 한다. 

 

  1. 마르키온파와 몬타누스파의 역사적 위치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했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는 율법과 은총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몬타누스파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 엄격한 신앙적 고행,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사라진 이유는 정경이 마련되고 교회 직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재세례파중에 폴란드 츠비카우의 예언자 조직은 독일의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뮌스터시를 점령하여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고 재림을 예언했다.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이 반대파를 암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등의 과격한 행동을 일삼자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이 뮌스터시를 전복시키고 재세례파를 흩어 버린다. 이후 메노 시몬스라는 지도자가 재세례파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당시 재세례파가 국가의 박해를 받은 주요 원인은 유아세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가교회는 해당 영토에 태어나는 자는 자연히 영아세례를 받음으로서 국가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교회란 누구나 다 태어나자마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다르게 정의한 것이다. 

 

  1. 개혁 -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정통이 모두가 믿어야할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면 이단이나 이설은 내부의 정통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실상 사회와 제도 교회가 흘러가는 관성을 거스르는 급진적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 운동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반응

첫째, 교회는 정경을 정하였다. 

둘째, 믿는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셋째, 교회의 직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제도화, 안정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이는 고착화라는 부수적인 문제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8장.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1.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위치

초대교회의 종교개혁을 이어 주는 중세 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기를 암흑기로 볼 것인가 의미 있는 시기로 볼 것인가? 

보통 수도원을 제도 교회와 비교하여 파라처치라고 표현한다. 이는 수도원 운동을 제도 교회, 주류 교회에 대한 주변부적인,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기성 교회 제도가 사회적 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종교성을 상실했을 때 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하는 역할을 감당했다.(영성과 운동성)

 

  1. 세속화를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

313년 콘스탄니누스의 기독교 공인,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교회 역사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기독교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예수를 믿을 때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안믿는 것이 차별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초기 수도원운동은 강력한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기번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종교로 도피한 불행한 삶”을 선택한 이들로, 부르크하르트는 “도피주의자들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세속화를 심각하게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로 평가했다.(당시의 세례 요한)

  • 공동수도회 : 대중적인 운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든 개개인을 위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는 온정주의 차원에서 시작됨 / 사람들이 모이게 되며 모임의 규칙이 강화됨

  • 독거수도회 : 종교적 엘리트를 추구 

사막 교부들이 은거한 사막이란 지리적으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장소가 아니었다. 사막은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간 상징적인 장소였다. 

은둔 수도사들의 정체성 : 첫째 수도사들은 대개 신학자가 아닌 영성가를 추구했다. 둘째 수도원 운동은 속인 중심의 운동이다. 

 

  1. 서방의 수도원들

베테딕투스회의 회칙의 핵심은 순종과 겸손으로 그 핵심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시’, ‘자발적으로’, ‘불평하지 않고’이다. 

수도회란 사람을 교육하는 곳이란 의미와 함께 교회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발대이자 정예부대 역할을 하는 엘리트, 종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수도회는 선교와 교육(학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학교가 고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한 것이 대학이다. 

전반적으로 수도원에는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의 교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공인되고난후 교회가 부요해졌을때 반대 급부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세속을 떠나 복종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후 서유럽 기독교가 1200년경 최고의 번성기에 이르러 타락하기 시작했을때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여 초대교회처럼 사도적인 청빈을 추구하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당시 루터의 역할도 그러하다. 수도원은 재속 성직자의 규모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수도원이 역동적으로 활동했을 때는 작은 방향타가 거대한 항공모함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 되어 속박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쉼을 얻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섬겨줄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떼제, 라브리, 예수원)

개인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속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부딪치는 소외와 고독의 문제, 박탈감의 문제,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등은 개인의 역량과 역할로만 맡겨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치열하게 이러한 구조를 읽으며 대처해 나가지 못했을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요 5장. 베데스다 연못, 불치병자들을 위한 해결책은 일차적으로 물이 동할때 그들을 그 물에 넣어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베데스다 연못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구원도 개인구원으로 환원시키면 된다. 개인의 책임이고 믿음이 없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상을 제대로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필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야 한다. 

 

수도원은 세상과의 분리, 현실 세계에 대한 무관심, 현실과의 유리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수도원은 한 시대에 바로 명상과 사색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기성교회에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9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1.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하다.

초대교회는 국가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회의 세력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갈등이 불거졌다. 

로마가 정복하여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신들을 인정해주면서 그것을 로마화시켜 로마 신화에 포함시켜나가면서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민족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사람의 전체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확장해 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로마에 위협으로 여겨졌고 믿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거나 성서를 압수하고 교회 지자들을 체포하거나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1. 기독교 공인, 교회의 힘에 대한 로마의 인정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며 피정복지의 통치를 그 지역의 본래 지배층의 자율에 맡기고 세금만 걷어가는 방식이었다. 

260년경 팔미라 왕국의 분봉왕이었던 제노비아 여왕은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 안디옥 감독으로 사모사타의 바울을 지명하였다. 교회의 감독이 지역의 총독을 맡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은 복잡한 로마의 정치적 지형속에서 이루어졌다. 

 

  1. 국가주의 교회의 출발

기독교 공인은 교회에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지만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이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가 제국을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음을 보고 제국안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325년 티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계시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독교의 능력을 체험했고,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했지만 이후의 행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황제로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이교 축전에 참석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국가의 핍박에서 벗어났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이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이후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분열은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닌 교회론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재세례파는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재세례파의 사상은 위정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1.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란 세상과 타협해서 특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라고 보았다. 

프랑스에서 피의 혁명이 일어난것과 달리 영국에서 혁명이 없었던 이유는 웨슬리와 메소디스트의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타락하게 된다. (박정희 유신 개헌, 신국부 독재 시절의 교회)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10장.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 니케아 공의회

  1. 공의회, 제국 신학의 출발점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후 서방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도나투스파에 의해서, 동방교회는 아리우스파 이단의 출현으로 분열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아리우스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등장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소집은 교회가 아니라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이를 기록한 유세비우는 니케아 공의회를 대단히 큰 기독교의 승리, 박해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고 보았다.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 신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 황제가 제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역사가 학문적인 엄정함을 우구하기보다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배자에게 유리하도록 지배자의 관점과 입장에 함께 하고 뒷받침하도록 쓰여져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로 남아 있는 기록의 효용성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1. 아리우스파, 그 길고 긴 논쟁

아리우스는 예수를 이성본질, 즉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인가, 유사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로 나뉘었다. 이오타(i) 하나를 두고 벌어진 어리석은 논쟁 하나가 교회를 찢어 놓았다라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하였다. 유사본질을 강조할 경우 에수의 신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결정을 공의회에서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교회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했으며, 관여한 황제의 결정이 신앙에 기초한 확신이나 엄밀한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기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유세비우스는 이 결정이 정치적인 결정임을 간파하고 황제를 설득하여 아리우스를 복권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되면서 로마(라틴어권), 안디옥(헬라어권), 알렉산드리아(북아프리카), 콘스탄니노플과 예루살렘의 5대 교구체제가 이루어졌다. 동방의 4도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이 경쟁하다가 이슬람의 위협속에 약화되고만다. 8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란ㄴ 위조문서가 로마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1. 니케아 공의회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아들중 둘은 니케아 공의회 결정은 지지하고 하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셋의 충돌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세력을 확보하며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힘을 얻게 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는 동안,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갈릴리인들이라고 비하하는 등의 차별을 가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속에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여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헬라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이교도의 도전에 대응하는 변증신학을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게 많은 핍박과 추방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성이 피폐해지지 않고 도 깊은 영성을 쌓았다. 

 

  1. 동방 신학의 황금기

아타아시우스는 망명생활을 통해서 동방과 서방을 두루 경험하며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이어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방 교회 모두에 큰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엄정한 논리로서가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처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난을 통해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을 통해 아리우스파를 제압했고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드러난 세속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본질을 지키려는 수도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리우스파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이겨냈다. 

서방신학은 스콜라학의 영향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를 학문의 형식을 따라 이론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라면 동방신학은 ‘신학은 삶’이라는 핵심명제를 따랐다. 

루터는 신학자를 만드는 세가지 조건을 첫째는 기도, 둘째는 말씀과 묵상, 셋째는 시험 혹은 고난이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교회에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난속에서 투사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 

 

11장.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1.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역사적인 관점에서 주요 신학이 규정되는 역사는 뒤집어 표현하면 교회의 분화, 분열의 역사이다. 

나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계기는 ‘얘수와 하나님이 동등하지 않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1.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세가지 사상을 단죄했다. 

첫째로 아몰리나리우스주의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개의 완벽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성서의 어려운 부분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유대교 전통, 즉 유대교의 문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를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을 결합으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리우스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서로 분리함으로 통일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반박이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입지가 강화된 데 따른 불안감으로 인해 제기된 정치적인 성격의 주장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안의 논쟁을 세속 군주에게 들고 나아가 결정을 부탁한,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이단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배척당한 이들로 동방선교에 기여했다. 

 

  1.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

칼케돈 공의회는 500여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역대 규모의 공의회로 황제가 소집했다.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분이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타나난다."

이 칼케돈 회의는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하는 부정의 신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1. 공의회가 남긴 유산

교회 공의회의 긍정적인 기여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으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특정하게 정의하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집단들이 떨어져나가게 되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분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2장.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1.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초대교회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시기의 중요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 인식 혹은 역사철학을 정립하여 신의 도성이라는 관념을 제기했기에 주목받는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어 당시 지중해와 소아시아 세계의 주류가되었다. 하지만 소위 정통신학은 당시 세상이 맞닥뜨린 로마의 멸망이란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돌이 양편에서 제기하는 의문앞에서 어떠한 해답도, 영향력도 주지 못했다.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것이 교회의 나아갈 길인지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이 부족했다. 프랑스 혁명, 유럽의 1차 세계대전, 나치의 독일 교회의 예속에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1. 아우구스티누스이 지적 여정

아우그스티누스이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이교도였다. 그는 타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이때를 아주 방탕하게 지냈던 때라고 참회록에서 회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했고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다. 

그는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 즉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과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결정적으로 ‘톨레레게 톨레레게’(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회심하였다. 이후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1.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 이 삼부작은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공인이후 기독교가 맞닥뜨린 내적인 병폐들과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교회 외적인 문제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이 잘못 적용되어서 모든 문제를 넘어가고 덮어주는 신학적인 문제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낳았다고 보아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았다.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하여 주주 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들을 강조하였다. 반(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간의 원죄와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수용했다. 

이러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재현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자신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썼다. 루터는 이를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종교개혁을 루터의 관점이 아니라 에라스무스나 재세례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1.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의식

로마의 멸망은 ‘어떻게 신의 택함을 받은 로마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낳았다. 그는 ‘신국론’을 통해서 제국을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제국 너머의 신국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헬라의 역사관은 순환사관이었다면 히브리의 역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조로부터 완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이 이끌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중요성은 바로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과정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신의 뜻과 목적을 헤아릴 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반대로 천국을 향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추구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이 땅의 부정과 불의, 제도적 구조적 모순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삶을 추구하게 했다. 

이후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신의 의지에서 인간 이성(헤겔)으로 대체되었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신의 뜻에 맡겨 버리는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자 적극적인 해석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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