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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acle of the word of the Lord to Israel by Malachi.1
The Lord’s Love for Israel
a“I have loved you,” says the Lord. bBut you say, “How have you loved us?” “Is not Esau cJacob’s brother?” declares the Lord. “Yet dI have loved Jacob but Esau I have hated. eI have laid waste his hill country and left his heritage to jackals of the desert.” If Edom says, “We are shattered but we will rebuild the ruins,” the Lord of hosts says, “They may build, but I will tear down, and they will be called ‘the wicked country,’ and ‘the people with whom the Lord is angry forever.’ ” fYour own eyes shall see this, and you shall say, “Great is the Lord beyond the border of Israel!” 
1Malachimeans my messenger
aDeut. 7:8; Jer. 31:3
b[ch. 2:14, 17; 3:7, 8, 13]
c[Amos 1:11; Obad. 10]
dCited Rom. 9:13
eIsa. 34:13; Jer. 49:10, 18; Ezek. 35:3, 4; Joel 3:19
fPs. 9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말 1.

여호와의 사랑을 다시 보증하는 것은 당시 회의론이 한창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이 회의론은 말라기의 청중들이 이사야, 학개, 스가랴의 이상이(분명히) 실패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말라기의 임무는 포로 후기 유다가 여호와와의 언약 관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봉신 혹은 종으로 회복된 공동체는 자신들의 영주 혹은 대군주인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요구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논제의 논쟁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이전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게 도전한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신실하셨던 것과 언약 순종에 실패할 때 심판하신 것을 깊이 생각하도록 말라기는 도전한다. 말라기가 최근에 일어난 에돔의 사건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복의 원인이 아니라 조건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원인이시다.1)
첫 번째 예언의 형식은 예언 문학의 재판 언어 유형(trial speech pattern)과 관련된 예언적인 논쟁이다. 논쟁의 말은 말라기를 고소와 맞고소의 형식 속에서 그의 청중과 싸우게 만든다(말라기가 그의 청중들과 실제로 대화를 하는지 혹은 문학 장치로서 가상의 논쟁인지 분명하지 않다). 말라기의 논쟁에 모두 있는 (주인공인 선지자에 의한) 세 부분으로 된 선언공식(the three-part formula of declaration, 1:2a), 부주인공인 예언의 특정한 수신자의 반박(1:2b), 선지자의 반박(1:2c–5)은 쉽게 구별될 수 있다.
1)Collins (1984:214–215)도 같은 의견이다.
 힐앤드류E., 학개·스가랴·말라기, ed. 백승현 and 정희연, trans. 유창걸, 초판., vol. 28, 틴데일 구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391–392.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복식 경기와 같다. 
독신으로 살다가 결혼한 사람의 삶의 변화

1절)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의 계시라. 

본문에 경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맛사’라는 히브리 단어로 예언, 계시, 경고라는 의미이다. 이는 KJV에서는 짐으로, NIV에서는 예언으로,  NLT에서는 메시지로 번역된다. ‘맛사’라는 표현과 여호와의 말씀의 결합은 예언이 드문 시기에 예언의 말씀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말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준다. 

말라기 전체 54절중에 절반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등의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다. 24번이나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는 여호와께서서 하늘의 천군천사들의 지휘관으로서의 강력한 능력을 상징한다. 아래의 리스트를 보면 구약에 사용된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중에 절반정도가 말라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학개, 스가랴, 말라기처럼 포로기 이후 선지서에서 이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당하고 포로기 이후 광대한 제국안에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만군의 주가 되신다는 표현만큼 위로가 되고 강력한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엘리사와 그의 종이 아람 군대에게 둘러싸여 있을때 엘리사의 기도(왕하 6:17)이나 예수님의 기도(마 26:53)에도 이러한 불말과 불병거, 12군단 더 되는 천사등의 표현을 볼 수 있다.  

- The Lord of Hosts: Frequency and Use in the OT
Why does the title “Lord of hosts” appear more frequently in Malachi than in any other OT book, and in the time of prophetic books more than during other time periods? In the period of Isaiah, the northern kingdom was overrun and destroyed and the southern kingdom almost destroyed by the “hosts” (armies) of Assyria. God’s people had so few troops that the Assyrian King Sennacherib could mockingly challenge King Hezekiah with the offer of a gift of 2,000 horses if Hezekiah could find enough soldiers to ride them (Isa. 36:8). Similarly, in the period of Jeremiah, the southern kingdom was wiped out by the hosts (armies) of Babylon.
In the postexilic period of Malachi, the postage-stamp-sized Judah, as a tiny province within the vast Persian Empire, had no army of its own. It is precisely in such times, when God’s people are painfully aware of how limited their own resources are, that there is no greater comfort than the fact that the Lord has his invincible heavenly armies standing at the ready. It is like the comfort that Elisha prayed for his servant at Dothan when they were surrounded by the Syrian armies: “ ‘O Lord, pleas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So the Lord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all around Elisha” (2 Kings 6:17). Perhaps it is like the comfort felt by Jesus before the cross: “Do you think that I cannot appeal to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send me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Matt. 26:53).
The following chart shows the percentages of verses in a book containing at least one occurrence of the phrase, “Lord of hosts” (or related variation):
1. Malachi (43.6%)
2. Haggai (31.6%)
3. Zechariah (21.8%)
4. Amos (6.1%)
5. Jeremiah (5.9%)
6. Isaiah (4.7%)
7. Nahum (4.3%)
8. Zephaniah (3.8%)
9. Habakkuk (1.8%)
10. Micah (1.0%)
11. 2 Samuel (0.9%)
12. Psalms (0.7%)
13. 1 Samuel (0.6%)
14. Hosea (0.5%)
15. 1 Kings (0.4%)
16. 1 Chronicles (0.3%)
17. 2 Kings (0.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76.

2-5절) 첫번째 논쟁 : 하나님께서 선인과 교만한 악인을 구별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입증되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 말라기는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영적 결핍대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동시대인들의 의심을 폭로하고 이에 대해 답변한다.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에서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에게 넘겼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싸으리라”하였지만 이에 대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에돔,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악한 지역이라 또한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이스라엘은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도다”라고 할 것이다.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를 경험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적 사랑은 여전히 유효함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 관계의 핵심을 상호성이다. 

2-3절) 이 본문을 바울이 롬 9:13에서 인용한다. 이 문맥에서 사랑하였고는 애정보다는 선택을, 미워하였으며는 적의보다는 거절을 가리킨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이다.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함께 태어난 이 형제중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이라 하셨고 그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신다. 반면 에서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부를 경험하게 된다. 본문속에서 말라기의 관심은 에서와 야곱이라는 개인보가 에돔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고백에서 대해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 시대 이스라엘은 누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했고 70년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한 반면에 에돔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이 맞느냐라는 질문과 의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서 말라기는 렘 9:11절을 암시한다. 
(렘 9:11, 개정)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말라기는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에돔에게 적용시킴으로 에돔도 유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심판은 주전 550년부터 400년 사이에 나바테아 아랍인들의 활동을 통해서 닥쳤을 가능성이 높다. 나바테아 아랍인들은 에돔족속을 그들의 본포에서 몰아내어 훗날 이두매라고 불리는 한 지역에 재정착하게 했다. 이들은 반-유목인들로 그들의 양 떼를 지나치게 많이 방복함으로 이전 경작가능한 땅을 페허로 만들어 버렸다. 반면에 유다는 심판이후에 은혜로 회복되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니님의 사랑을 반영한 반면 에돔의 심판은 영구적이고 돌이킬 수 없었다. 에돔 족속 개인은 계속 존제하겠지만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상실했다. 
-In a classic text, which Paul quotes in Rom. 9:13, Malachi appeals to God’s elective and unconditional love of Jacoband corresponding hatred of Esau. In this context lovedrefers to choice rather than affection, and hatedrefers to rejection rather than animosity (which was explicitly prohibited against Edomites, Esau’s descendants, in Deut. 23:7). For a similar use of these terms, see Prov. 29:24; Luke 14:26; 16:13. Although Jacob and Esau were brothers, Jacob experienced God’s sovereign favor by which he was granted a privileged role in redemptive history as a bearer of the messianic promise, while Esau experienced God’s rejection in terms of this same role. Malachi’s concern, however, is primarily with the nations of Israel and Edom, of which Jacob and Esau were the representatives and progenitors. To Malachi’s contemporaries, it must have seemed that the prophet had committed a terrible blunder by citing the contrasting national fates of Israel and Edom as proof of Israel’s favored status. If God had chosen Jacob/Israel over Esau/Edom, why did he allow his people to suffer the total devastation of their country in 586 b.c. by Nebuchadnezzar and 70 years of Babylonian captivity, while Edom remained intact and seemed only to benefit from Israel’s loss? Malachi makes his point, however, by alluding to Jer. 9:11. Two centuries earlier Jeremiah announced the Lord’s impending judgment against Judah: “I will make Jerusalem a heap of ruins, a lair of jackals, and I will make the cities of Judah a desolation, without inhabitant.” By applying this same threat to Edom, Malachi makes clear that, like Judah, Edom would not escape God’s judgment. It is likely that this judgment came through the agency of Nabatean Arabs, who gradually forced the Edomites from their homeland between 550 and 400 b.c., causing them to resettle in an area later called Idumea. Being semi-nomadic, the Nabateans allowed the cities of Edom to go to ruin while their herds overgrazed and destroyed previously arable land. Whereas Judah was graciously restored after her punishment, reflecting the Lord’s love for his people, Edom’s judgment was to be permanent and irreversible (Mal. 1:4). There would continue to be individual Edomites (implied by 1:4; cf. Mark 3:8), but they had forfeited their national identit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74.

 5절) 이스라엘은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도다” 하리라. 
눈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을 사실이지만 지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해 의심을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말라기는 청중들에게 세가지 외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 말라기는 그의 청중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적 사랑을 보여주는 세 가지 외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여호와의 선언이다(2절). 두 번째 지지하는 증거는 만일 백성들이 그들 주변에서 펼쳐지는 현재의 사건들을 관찰하기만 한다면 더욱 분명해진 것이었다. 곧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사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에돔이 한 일에 대하여 심판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시편 기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시 137:7 참조). 시편 기자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는 것은 믿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효과적인 해독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시 73:2, 16–17 참조). 세 번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증거는 그들 가운데 서 있다. 곧 제2성전이 재건되었다는 것이다(4절 참조).
 힐앤드류E., 학개·스가랴·말라기, ed. 백승현 and 정희연, trans. 유창걸, 초판., vol. 28, 틴데일 구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400.
이처럼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는 것은 의심에 빠진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조치임을 상기시킨다. 
이후 바울이 롬 9장에서 인용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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