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Cain spoke to Abel his brother.4 And when they were in the field,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akilled him. Then the Lord said to Cain, “Where is Abel your brother?” He said, b“I do not know; am I my brother’s keeper?” 10 And the Lord said, “What have you done? The voice of your brother’s blood cis crying to me from the ground. 11 And now d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s opened its mouth to receive your brother’s blood from your hand. 12 When you work the ground, it shall no longer yield to you its strength. You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on the earth.” 13 Cain said to the Lord, “My epunishment is greater than I can bear.5 14 Behold, fyou have driven me today away from the ground, and gfrom your face I shall be hidden.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on the earth, hand whoever finds me will kill me.” 15 Then the Lord said to him, “Not so! If anyone kills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isevenfold.” And the Lord jput a mark on Cain, lest any who found him should attack him.

4 Hebrew; Samaritan, Septuagint, Syriac, Vulgate add Let us go out to the field

a Matt. 23:35; Heb. 12:24; 1 John 3:12; Jude 11

b John 8:44

c Heb. 12:24; [Rev. 6:10]

d Deut. 27:24; [Num. 35:33]

e ch. 19:15

5 Or My guilt is too great to bear

f Job 15:20–24

g 2 Kgs. 24:20; Ps. 51:11; 143:7; Jer. 52:3

h ch. 9:6; Num. 35:19

i Ps. 79:12

j [Ezek. 9:4, 6; Rev. 14:9, 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4:8–15.

 

 

8절) 7절에서 죄가 가인을 삼키려고 문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제 8절에서는 그 죄에 삼켜진 가인이 웅크린 자세에서 일어나 아벨을 죽였다. 고대 역본에서는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라고 청했고 ‘가인이 일어나 그의 동생 아벨을 대항하여 그를 죽였다’라고 표현된다. 

말하자면 죄가 우리를 삼키려고 웅크리고 있고 이제 가인이 죄에 삼켜지고 나서 일어나 아벨을 쳐 죽인 것이다. 

 

9절) 이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지금 죽임을 당한 것을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아담과 여자를 찾으시며 물으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냉담한 가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나의 아우를 지키는 자 입니까?’라고 말이다. 가인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창 2:15절에서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아바드(경작하고 섬김)하고 사말(지키다)하게 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앞서 2절에서 가인은 땅을 아바드(경작)하는 자로 소개 되었는데 9절에서 가인은 땅이 아니라 아벨은 사말(지키는) 자인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다. 가인의 이 대답과 질문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회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도리어 가인은 자신의 대답과 반문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섬기는(아바드)자였으며 또한 동생 아벨을 지키는(사말)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이 역할을 빼앗기게 된다. 

 

지키는 자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샤마르'를 번역한 말로서, 우리는 이미 이전에 2-3장에서 두 번이나 단어를 만났다. 2:15에서는 아담의 고유한 사명을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3:24에서는 그룹들이 해야 할 일을 묘사할  또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 단어는 책임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에덴 동산이라는 신성한 장소를 책임지는 일을 잃었고, 그들이 추방되자 그들이 선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선악괴를 보호해야 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가족에 한 어떤 책임 의식도 거부하였다. 심지어 아벨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그에게 는데도 일체의 책임 의식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가 책임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때, 우리는 늘 비난을 면할 구실을 만들어 왔다. 이 과정에서 상호 책임은 이산산조나시작한다.(NIVAC 창세기, 392)

 

10절) 아벨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한다’라고 대답하셨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해 땅에 묻힌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호소가 하나님의 귀에 들린다라는 것이다. 10절에서 네 아우의 핏소리는 바로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벨의 피’이다. 이는 무고한 희생자가 정의를 위한 외침을 비유하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Genesis 4:10 is the likely background for the NT’s use of the phrase “the blood of Abel” as the paradigm for an innocent victim crying for justice (Matt. 23:35; Luke 11:51; Heb. 12: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8.

 

11-12절)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몇가지 벌을 내리신다. 첫째 가인의 동생 아벨의 피로 적신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벌은 가인이 땅을 경작하여도 땅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않아 그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되여 결과적으로 농사일로 먹고 사는 가인에게 심각한 타격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망자, 부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시 109:9-10)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열매를 풍성히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도 깨뜨려 버렸다. 인간의 죄는 땅의 생식력, 풍요함과 관계가 있다. 

 

13-15절) 가인은 자신이 받게 될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다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없는 곳으로 쫓겨나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을 또한 자신을 만나는 이들이 자신을 살해할 것을 두려워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신다. 가인을 죽인자는 벌을 7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보복 금지 규정이 가인 개인에게 준 것인지, 공동체에게 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가인 개인에게 한 것이지만 가인 외의 사람들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다. 본문의 히브리어 표현은 가인의 몸에 표를 새긴 것이 아니라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표를 세웠다는 의미이다. 가인의 시대에 문자가 없었기에 이 표가 어떤 형식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것임에 틀림없다. 구약 성경에서 특히 생명과 죽음,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공적인 법 집행을 제외하고 살인은 용납되지 않았다. 

왜 7배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7이라는 숫자는 신적인 완전수이며 보복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확실함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마 18:21-22, 일곱번씩 일흔번)

 

가인의 표가 무엇일까? 겔 9:4에는 이마의 표를 말한다. 가인의 표는 저주와 심판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죽임을 면케하는 안전의 표이기도 했다. 

This “mark of Cain,” as it is popularly known, has proven to be a seedbed for confusion (v. 15b). “Mark” is the common word for “sign” (ʾōt); the exact nature of the sign or its place on the body (“on Cain”) is unknown. One Jewish tradition pointed to Cain himself as the “sign” who served to admonish others to repentance (Gen. Rab. 22.12). In effect this has become true for later generations, if not his own, for Cain the man has become a token of sin’s fruit and divine retribution (1 John 3:12; Jude 11). Although “sign” is used figuratively in several passages (e.g., Exod 13:9; Deut 6:8; 11:18), the only parallel is Ezek 9:4, where certain men receive a mark on the forehead. But even there it is in an extended vision in which it only has symbolic force. What is important here is its purpose: “so that no one who found him would kill him” (v. 15). “Mark” in our passage is not a sign of the “curse”; in fact, it assures Cain’s safety rather than acts as a reproach. The mark in Ezekiel’s vision had the same effect; it distinguished those who bore the brand and gave them protection.

Gen. Rab. Genesis Rabbah, ed. J. Neusner

 K. A. Mathews, Genesis 1-11:26, vol. 1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278.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또 다른 벌이 있다. 14절 전반부에 있는 벌이며, 이 벌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벌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2절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가인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는 벌의 내용은 12절의 벌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히브리어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כִּ֤י תַֽעֲבֹד֙ אֶת־הָ֣אֲדָמָ֔ה לֹֽא־תֹסֵ֥ף תֵּת־כֹּחָ֖הּ לָ֑ךְ נָע֥ וָנָד֭ תִּ֖הְיֶהֽ בָאָֽרֶץ12 

키 타아보드 에트–하아다마 로–토셉 테트–코하 락 나아 와나드 티웨 바아레츠

הֵן֩ גֵּרַ֨שְׁתָּ אֹתִ֜י הַיּ֗וֹם מֵעַל֙ פְּנֵ֣י הָֽאֲדָמָ֔ה וּמִפָּנֶי֭ךָ אֶסָּתֵ֑ר וְהָיִ֜יתִי נָ֤ע ונָדָ֙ בָּאָ֔רֶץ14 

헨 게라스타 오티 하욤 메알 페네 하아다마 우미파네이카 에사텔 베하이티 나아 와나드 바아레츠

14절의 가인의 말은 그가 유리 방황한다는 말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주며, 16절의 표현과 더불어 가인의 유랑자 생활의 의미를 정의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절 – 내가 당신의 얼굴을 피해 숨을 것이며

16절 –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가인이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고 두 번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전적인 추방이다. 가인은 단지 쫓겨날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숨었든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피해 숨어 다니게 된다.

창 3:8וַיִּתְחַבֵּ֨א הָֽאָדָ֜ם וְאִשְׁתּ֗וֹ מִפְּנֵי֙ יְהוָ֣ה אֱלֹהִ֔ים 와이트하베 하아담 베이쉬토 미페네 야웨 엘로힘

창 4:14וּמִפָּנֶי֖ךָ אֶסָּתֵ֑ר 우미파네이카 에사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창세기 3:15와 같은 종말론적 소망을 주었지만, 가인에게는 그런 소망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성소인 에덴에서 추방이었지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아니었다.31) 하지만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났다는 것은 창세기 4:25–26에 있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셋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나 방황하며 살게 됨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말과 더불어 레위기 26장의 언약의 저주의 내용들과 유사하다. 레위기 26장은 안식일과 성소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언약의 축복을 받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언약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 언약의 저주는 세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번영, 둘째, 보호, 셋째, 하나님의 임재이다.

20절 너희 수고가 헛될찌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33절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가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가인이 받은 벌은 언약의 저주와 또 다른 점이 있다. 언약의 저주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쫓겨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오는 약속을 받지만, 가인의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된다.

31) 창세기 4:1과 4:25에서 하와가 가인과 셋을 낳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79–180.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추방과 심판이었고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는 가인, 결국 3장의 타락 사건이 인간을 어떤 자리에 떨어뜨렸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3장 13절에서 범죄의 이유를 묻는 진술,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심판의 선언을 시작하신 것처럼 4장 10절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땅으로부터의 저주는 결국 효력을 가인에게 주지 않음으로 음식을 제공받지 못하여 그 음식을 얻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유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와 가인의 저주를 비교해보자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의 존전에서 멀어졌다면 가인은 하나님의 존전과 그분의 보호에서 추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를 성막에 비유한다면 아담과 하와는 성소의 출입을 금지당한 셈이고 가인은 성막의 진영 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에덴 동산에는 풍부한 식량이 있었다. 반면에 동산 밖에는 경작이 가능한 땅이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농사 지을 희망이 전혀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그 결과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해야 했다. 

 

여기서 몇가지 질문은 가인이 쫓겨난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인지? 누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만나 결혼하게 되는 여자는 누구인지라는 질문과 여호와께서 붙여주신 표는 과연 어떤 형태의 표식인지이다. 

바울 신학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 급속도로 가족을 확대해 나가게 되어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후손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인이 받은 표는 어쩌면 3장 21절에서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3장에서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이야기를 보여주었다면, 4장에서는 죄가 그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죄는 그 가족안에 다툼과 불화, 나아가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커라이어스는 ‘악은 유혈이 낭자한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은 그 마음을 적시고 부패시킨다. 

‘폭력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 못지 않게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해를 끼친다. 당신이 도끼로 나무를 찍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 나무는 강철에 비하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강철은 도끼질을 할 때마다 점점 무디어지고, 나무의 수액은 그것을 녹슬게 하며 움푹 파이게 할 것이다. 강철 도끼가 무력한 나무에 폭력을 가하지만, 또 그 나무에 의해 해를 입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영혼이 해를 입지만 말이다.’

As Zacharias observes, “Evil is not just where blood has been spilled. Evil is in the self-absorbed human heart.”16 And the violence a person commits soaks into the heart and corrupts.

Violence harms the one who does it as much as the one who receives it. You could cut down a tree with your axe.… Wood is soft compared to steel, but the sharp steel is dulled as it chops, and the sap of the tree will rust and pit it. The mighty axe does violence to the helpless tree, and is harmed by it. So it is with men, though the harm is in the spirit.17

16 Zacharias, Deliver Us From Evil, 175.

17 R. Jordan, The Eye of the World (New York: Tom Doherty, 1990), 312.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69.

 

우리는 모두 하나님 의 용서를 경험했지만, 우리 가운데 현행범으로 붙잡혀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극적인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그와 같은 강력한 은혜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극적 인 상황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장 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다. 그 결과 그는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마침내 출소했을 때 ,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은 친절한 비앵브뉘 몬시뇰(묜시뇰은 나의 주님’이라는 뜻으로 과거 왕이나 귀족에게 ‘전하’,각하'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주교들과 교황청에 고위 성직자들에게 이 칭호가 사용된- 역자 주) 주교가 그를 맞아 주었을 때,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한밤중에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는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다음 날 그는 그 소중한 물건들을 돌려주러 그 집으로 연행 되어 간다. 그런데 그는 몬시놀 주교의 반응에 깜짝 놀란다.

 

“아! 여기 왔군!’ 그는 소리치면서 장발장을 보았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그래, 이게 어찌 된 건가? 나는 자네에게 촛대도 주었네. 나머지 것들처럼 은으로 만들어졌지. 분명 200프랑은 될 걸세, 왜 포크랑 수저도 함께 가져가지 않았나?

'내 친구여’ 주교는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여기 자네 촛대들이 있으니 가져가게 그는 벽난로의 선반으로 걸어가서, 은촛대 둘을 가져다가 장발장에게 주었다. 장발장은 사지를 떨고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두 촛대를 받아들었고, 어찌나 당황했던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교는 그를 가까이 묻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게, 절대 자네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이 돈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셈 일세."

장 발장은 이무것도 약속한 기억이 없었기에 말없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에게 말하면서 그 말을 강조했다. 그는 진지한 척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장 발장, 내 형제 여! 자네는 이제 악에 속하지 않고 선에 속해 있네. 내가 자네에게서 산 것은 자네의 영흔일세. 나쁜 생각과 파멸의 영에게서 그것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네 ”

 

이 사건은 정말로 장발장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고, 소설의 나머지 부분 그가 살면서 은혜를 되돌려 갚은 사건들의 흔적을 따라간다. 우리는 은혜와 자비를 다룬 이 이야기를 읽고, 은혜 받은 자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보면서 당황할뿐만 아니라 두려움마저 느끼 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 의 은혜와 긍홀에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 우리는 가인이 하나님께 그러한 감사로 반응했는지 결코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첫 반응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이 어떻게 반웅했느냐와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힘에 감동받는다면 어떻게 반웅하느냐 하는 것 이다.

We have all experienced forgiveness from God, but for many of us, the experience may have lacked the poignancy of being caught red-handed, standing face-to-face with God. If that is so, perhaps we can only come to appreciate such bold grace secondarily. Such poignancy is powerfully captured in Victor Hugo’s Les Miserables. Jean Valjean, the subject of the novel, steals a loaf of bread. As a result he spends nineteen years in prison and, when finally released, finds it difficult to escape his past. On one occasion, taken in by the kindly Monseigneur Bienvenue, he finds himself unable to resist temptation and, in the middle of the night, steals away with a cache of silverware. He does not get far before being throttled by the police. The next day he is hauled back to the house to return the valuables. He is startled at the Monseigneur Bishop’s response.19

“Ah! here you are!” he exclaimed, looking at Jean Valjean. “I am glad to see you. Well, but how is this? I gave you the candlesticks too, which are of silver like the rest, and for which you can certainly get two hundred francs. Why did you not carry them away with your forks and spoons?”

“My friend,” resumed the Bishop, “before you go, here are your candlesticks. Take them.” He stepped to the chimney-piece, took the two silver candlesticks, and brought them to Jean Valjean. Jean Valjean was trembling in every limb. He took the two candlesticks mechanically, with a bewildered air [and] was like a man on the point of fainting.

The Bishop drew near to him, and said in a low voice: “Do not forget, never forget, that you have promised to use this money in becoming an honest man.”

Jean Valjean, who had no recollection of ever having promised anything, remained speechless. The Bishop had emphasized the words when he uttered them. He resumed with solemnity: “Jean Valjean, my brother, you no longer belong to evil, but to good. It is your soul that I buy from you; I withdraw it from black thoughts and the spirit of perdition, and I give it to God.”

This indeed becomes the turning point in Valjean’s life, and the remainder of the novel traces the reverberations of grace in his life. When we read this account of mercy and compassion and see its impact in the recipient’s life, we are appropriately bewildered and awestruck. How much more should we be in awe of God’s mercy and compassion. We can never know whether Cain responded with such gratitude to God, though his initial response might suggest not. But it is irrelevant how Cain responded. What is important is how we respond once we are impressed with the power of God’s mercy and grace.

19 From chapter 1.2.6 in a slightly abridged form.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72–273.

+ Recent posts